# 176
회귀자 사용설명서 176화
본능에 충실한 암사자(3)
“다시 만나서 영광입니다. 아름다운 샤오린 님.”
너무나도 반가운 인사에 조금 황당해하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그래요? 글쎄…. 나는 처음 뵙는 분 같은데 어째서 내 이름을 알고 계신 걸까?”
“당연히 그때 봤던 샤오린 님의 아름다운 자태가 머릿속에서 떠나지가 않아서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거짓말.”
“거짓말이 아닙니다, 샤오린 님.”
“하….”
“도와줄 생각이 있어서 나오신 거 아니십니까?”
“이쪽은 한 번 차인 상태라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은데…. 정확히 말하면 나를 찬 남자가 어떻게 죽는지 구경하러 나왔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앙큼한 년!’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대충 예상했다.
그렇지만 아마도….
‘분명히 도와줄 거야.’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면 저렇게 모습을 드러낼 이유가 없다. 계속해서 튕기고 있는 건 아마 이쪽과 무언의 거래를 하기 위함이 분명하리라.
공화국 소속일지도 모르는 여자가 이쪽의 외침에 대답해 신성제국의 요충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름대로 페널티라면 페널티라고 할 수 있는 부분.
물론 그 모습을 본 것은 나와 김현성 그리고 이성을 잃은 차희라가 전부지만 아마 나름대로 얻어갈 것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단순히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나왔다는 건 자의식 과잉이지만 지하 경매장에서 만났던 그녀의 반응을 생각해 보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이쪽과 협상을 원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은 부정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게 뭔 협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 당황스러웠던 것은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반응.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분노를 쏘아내는 것으로 모자라 나를 바라보고 있는 표정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적의를 보내는 것은 아니지만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
마침 그녀가 이쪽을 가면남이라고 칭했기 때문에 순간적이지만 그럴듯한 변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가면무도회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파티원들이 사냥을 나섰을 때 혜진 씨와 한 번 마주쳤던 사람입니다.”
알리바이는 조혜진이 만들어 줄 것이다.
“혜진 씨와 함께 말입니까?”
“예. 이전에 저분에게는 조금 곤란한 제안을 받아서… 거절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도시에 머무르고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는데 다행히 체류하고 있었군요. 혹시 누군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아니요…. 저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김현성을 납득시키기 위한 짧은 대화를 하고 있었을 때 다시 한번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불러놓고 이렇게 무시할 셈? 그냥 가도 상관없는 건가요?”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랜만에 만났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십니까? 샤오린 님. 저번에는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당시에 옆에 있는 파트너가 제 안전에 조금 민감했던 터라….”
순식간에 편집증이 되어버린 조혜진에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일단은 그녀에게 잘 보이는 게 최우선 사항이다.
이렇게 말을 나누고 있는 와중에도 차희라는 계속 이쪽을 쫒아오고 있었으니까.
“내 기억에는 분명히 불편해하던 쪽은 그쪽이었던 것 같은데요?”
“하하하하. 제가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을 마다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함께 온 부하와 샤오린 님의 아름다운 얼굴을 가린 가면이 죄인 아니겠습니까? 아름다우실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우십니다. 저도 모르게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 같습니다.”
“입에 발린 소리.”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야 지금 당신이 절박한 상황이니까요.”
“본래 절박한 상황이야말로 서로에게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배경입니다. 보통 영화 속 주인공들이 전부 그런 식이니까요. 일단 구경만 하지 마시고 조금 도와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않아서….”
“도와주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신성제국의 맛탱이 간 용병여왕을 막으라는 건 조금 비싼 주문인데…. 이쪽도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고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지 않겠어요?”
“최선을 다해서 싸워달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30분 정도만 함께해 주시면 정말로 감사할 것 같은데…. 원하시는 게 있다면 최대한 맞춰드리겠습니다. 물론 캐슬락을 안전하게 빠져나가는 것 역시 포함해서 말입니다.”
“흐음…. 30분이 절대로 쉬운 게 아닌데?”
“금화는 어떻습니까?”
“글쎄….”
“물질적인 것을 원하신다면….”
“저도 돈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라서….”
“정식으로 식사라도 한 번 대접해 드리도록 하지요. 그뿐만 아니라 이쪽에서 맞춰드릴 수 있는 건 전부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흐음….”
“부탁드립니다. 아름답고 고귀한 샤오린 님.”
“그럼… 일단은 급해 보이니 계약은 이걸로 성립이라는 걸로 할까요?”
“죽이지 않고 제압한다는 조건입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내가 죽이려고 한들 죽을 사람은 아니니까. 저 미친 고릴라는… 이 기회에 고릴라한테 빚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제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네요.”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차희라와는 면식이 있는 모양인 것 같았다.
만약에 그녀 역시 어딘가에서 한 자리 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신성제국을 대표하는 플레이어인 차희라와 한 번쯤 만난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 좋은 건가.’
어찌되든 상관없지만 이쪽에게는 그녀가 차희라를 막아준다는 사실 하나만이 중요하다.
그다지 사이가 좋아 보이는 것 같기는 하지만….
‘나쁘지 않아.’
샤오린이 조용히 손을 뻗으니 어디에선가 튀어나온 남자 한 명이 그녀에게 조용히 상자 안에 있는 무구를 건네기 시작.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받아든 그녀가 자신의 무기를 길게 늘어뜨렸다.
‘채찍?’
차희라는 그녀를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오직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그녀를 향해 거대한 마력이 틀어박힌 것은 바로 그때였다.
공기가 찢어버리는 파공성이 들려온 이후에 차희라의 몸이 왼쪽으로 쳐 박힌 것.
콰아아아아앙!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와 나도 모르게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정도였다.
‘저렇게 강했나?’
이전에는 능력치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지사.
[플레이어 샤오린의 상태창과 잠재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 - 샤오린]
[칭호 - 사디스트]
[나이 - 22]
[성향 - 호기심 많은 탐구자]
[고유기벽 - 목 조르는 로맨티스트]
[직업 - 채찍기술자 - 영웅등급]
[직업효과 - 기초검술지식 습득]
[직업효과 - 중급채찍지식 습득]
[직업효과 - 고급무투지식 습득]
[직업효과 - 고급채찍지식 습득]
[직업효과 - 고급마력운용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 - 87/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민첩 - 89/성장 한계치 전설 이상]
[체력 - 71/성장 한계치 희귀 이상]
[지력 - 81/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 - 64/성장 한계치 희귀 이상]
[행운 - 81/성장 한계치 영웅 이하]
[마력 - 89/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특성 - 활기찬 채찍질 - 영웅 등급]
[채찍으로 입힌 대미지의 비례에 체력을 회복합니다.]
[총평 - 낮은 체력 능력치와 내구능력치가 아쉽지만 기본에 충실한 스탯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나 부족한 체력 능력치를 특성으로 지속적으로 회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군요. 성향은 좋으나 기벽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위험한 호기심에 눈을 뜰 수 있는 플레이어라고 하는 편이 맞겠군요. 가까이 해서 좋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 하나는 확실합니다.]
확실히 강자라고 분류할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기는 하지만 차희라에게 비빌 정도는 아니다.
근력 능력치에서 이미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나는 상황.
종합적인 능력치를 판단해 봤을 때는 그다지 강하게 보이지는 않는다는 거다.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것은 그녀가 들고 있는 채찍.
[장비 - 여신을 벌한 채찍 울드 - 전설 등급]
[오래된 고신전에서 발견된 무구입니다. 누가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바가 없지만 여신을 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채찍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아주 오랜 세월동안 파묻혀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힘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이템의 소유자는 랜덤으로 스탯 10포인트가 영구적으로 내려갑니다. 채찍 본연이 머금은 마력이 증가합니다.]
‘역시.’
뭔가 믿고 있는 구석이 하나는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전설 아이템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저쪽 역시 대부분의 기능이 봉인되어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의식도 깨우지 못하고 있는 내 율리에나와는 천지차이.
전설 등급의 아이템을 가지고 있다면 단신으로 차희라를 막으려고 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스탯 포인트가 10개나 내려간 상태에서….’
아마 저 아이템은 스탯이 내려간 값어치만큼의 효율을 보여줄 것이다.
실제로 그녀가 데리고 왔던 부하들은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혹시나 위험한 일이 생긴다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집단이겠지만 아직까지 거리가 가깝지 않기 때문에 차희라를 상대할 수 있다는 거다.
계속해서 무너진 건물의 틈으로 파공성이 들리는 것은 가관.
“크르르르르륵!”
자신의 몸에 직접적인 위협이 다가온 이후에는 차희라도 더 이상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곧바로 건물에서 튀어나와 채찍을 든 정신 나간 여자를 향해 쏘아지는 것은 순식간.
김현성도 더 이상 나를 들고 뺑뺑이를 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곧바로 성벽을 향해 달려가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함께 움직일 생각은 없다.
“먼저 성벽으로 향해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쪽은 따로 들려야 할 곳이 있어서….”
“네?”
“생각하고 있는 보험이 있습니다. 아! 그보다 혹시 모르니 붉은용병의 단원들을 이쪽으로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지금까지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계속해서 이런 상황이 왔을 때 둘 중 하나를 말려야 되니까요.”
“네. 무슨 말인지 알겠군요. 그럼 저는 지금부터 성벽으로 향하겠습니다.”
“네, 현성 씨.”
“그리고….”
“네?”
“오늘 일에 대해서는 조금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아까처럼 표정이 별로 좋지는 않다.
‘그야 의심스럽겠지.’
공화국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여자를 알고 있는 것으로 모자라 그녀가 있는 위치를 직접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까지 했다.
물론 정확한 주소는 모르고 있었고 이쪽은 샤오린이 뭐하는 여잔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만 보면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녀는 내 말에 응답한 셈이다.
솔직히 말하면 경매장에서 잠깐 마주친 인연은 완전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서쪽 지역은 어차피 아슬아슬하게 뚫리는 것이 계획. 그 이후에 몬스터들을 침입시키고 한꺼번에 밀어버리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으니까.
거인 길드 마스터가 지휘권을 받았으니 서쪽 지역의 병력이 보강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현재는 이 지역이 무너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그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물론 밖에서 울고 있는 저 미친 괴물이 날뛴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지만….
“그럼 조금 있다 보겠습니다.”
“네. 현성 씨.”
사랑스러운 회귀자 역시 걱정이 되긴 되는지 곧바로 몸을 날린 것이 시선에 들어왔다.
밖에서는 수성전과 레이드가 한참 일 터. 별다른 문제는 없겠지만 만약을 위해 한 곳 더 들릴 곳이 있다.
‘물론 밖으로 나가기가 조금 무섭기는 하지만….’
혹시 샤오린이 차희라에게 개짓거리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어차피 붉은용병이 오기 전까지는 이곳에 숨어 그녀를 지켜봐야 한다.
그 정신 나간 여자의 말대로 차희라가 죽거나 다치는 건 상상하기 어렵지만….
‘만약의 상황이라는 게 있으니까.’
일단은 지켜보는 것이 옳다.
“미친년!!”
“크르르르르륵!!!!”
밖에서는 정신 나간 괴수 대격돌이 펼쳐지고 있는 상황.
안전한 후방에서 손가락질만 하면 끝날 줄 알았던 수성전을 생각해 보면 개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괜스레 서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