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회귀자 사용설명서 175화
본능에 충실한 암사자(2)
“최소 전설급의 네임드 몬스터를 상대한다는 생각으로 싸움에 임하겠습니다. 희영 씨는 근접 직군들에게 버프를. 덕구 씨와 혜진 씨는 후열을 무너지지 않게 주력합니다. 저와 예리가 최대한 앞을 막아설 테니 하얀 씨와 기영 씨 그리고 정연 씨는 그녀를 막을 수 있는 마법을 캐스팅해 주시면 될 것 같군요.”
“네. 알겠어요.”
“거, 알겠소.”
선희영과 박덕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본래대로라면 후위에도 버프를 넣는 게 정석이겠지만 아마 근접직군이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전위에 버프를 집중하려는 느낌. 나였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재미있었던 것은 김현성이 이 상황에 제법 익숙해 보였다는 것. 앞으로 일어날 미래에도 차희라가 폭주할 만한 일이 몇 번 일어나는 모양이다.
‘물론 이런 상황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김현성은 이런 상황을 한 번 정도는 겪어 봤다는 거다.
“크르르르륵….”
이쪽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차희라의 모습은 조금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아까 전 잠깐 몬스터의 피를 뒤집어 쓴 덕분에 붉은 머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붉게 물들었기 때문.
산발이 된 머리로 이쪽을 바라보는 차희라를 보니 몸이 떨려왔다.
‘어후….’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아군과 적군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는 것.
붉은용병의 단원을 죽이지 않은 것을 보면 이쪽에게도 위험한 공격을 날리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차희라가 살짝 던진 돌에 이쪽은 머리가 날아갈 수도 있지만 아무튼 간에 치명적인 공격을 해오지 않는다는 것만 해도 충분한 메리트라는 거다.
“옵니다.”
“크륵!!”
앗 하는 사이에 커다란 건물의 파편이 이쪽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
‘죽일 생각 없는 거 맞지?’
순식간에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우리 파티원들을 집어삼켰지만 황정연이 주문을 외우자 파편이 공중에서 우뚝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염동력을 사용하는 마법인 모양인 것 같았지만 탄성을 내지르는 파티원은 없다. 건물에 잠깐 가려진 덕분에 차희라의 위치를 잡을 수 없었으니까.
순식간에 옆쪽으로 나타난 그녀가 아무렇게나 팔을 뻗는 것이 보였다.
차희라를 막은 것은 의외의 박덕구.
“형님한테는 손 하나… 끄억!”
방패로 공격을 막자마자 반대쪽으로 튕겨져 나가는 박덕구의 모습은 비현실적.
일직선으로 날아간 녀석이 굉음을 내며 건물에 처박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죽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아마 팔정도는 으스러져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1초 컷?’
의기양양하게 방패를 내밀기는 했지만 공격을 한 번 막아내는 것이 한계. 그렇지만 그 틈에 그녀에게 돌진하는 조혜진과 김현성 그리고 김예리를 볼 수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김현성을 귀찮다는 듯이 팔로 쳐내지만 사랑스러운 회귀자는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한다.
그 사이로 뻗어나가는 것은 조혜진의 창. 공기를 뚫어버리는 것 같은 파공성이 먼저 들려왔다.
‘보여.’
신기한 것은 전혀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녀석들의 공격이 눈에 들어왔다는 것. 아마 이것 역시 마음의 눈이 전설 등급으로 진화한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이어서 차희라가 자신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창을 손으로 쳐내자 조혜진의 균형이 흐트러진다.
주먹을 날리려고 준비하고 있는 차희라의 뒤에서 나타난 것은 단검을 들고 있는 김예리.
멍하니 입을 벌리고 보게 만드는 합격술이다.
1회 차에서도 셋이 호흡을 많이 맞춰봤다는 걸 가정해 보면 김현성이 저들에게 잘 맞춰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잇!”
입을 꽉 다문 채 단검을 내지르지만 차희라가 발을 굴리자 근처에 있던 세 명이 마력의 충격에 휩쓸려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다.
잠깐 동안의 틈,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은 정하얀의 마법.
“이익! 사라져!!”
‘죽이는 거 아니야!’
자신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온 모양인 것 같았지만 차희라가 정하얀의 마법에 피해를 입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차희라를 향해 빠른 속도로 쏘아져 나간 것은 시연회 때 정하얀이 한 번 보여준 적이 있는 마법 원소폭탄.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마력이 뒤섞인 것이 땅바닥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리며 차희라를 집어 삼키려고 하고 있다.
“크앙!”
그렇지만 귀찮다는 듯이 마법을 손으로 쳐내는 모습은 가관. 정하얀이 마력을 퍼부어 만들어낸 원소폭탄은 반대쪽 건물에 쳐 박히며 커다란 굉음을 만들어냈다.
콰과아아아아아아앙!
콰드드드득!
‘이런 개….’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건물들을 보니 캐슬락이 안전할 거라고 외쳤던 내가 떠올랐지만 찬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다.
일단은 지금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먼저.
김현성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인지 곧바로 검을 들고 차희라에게 쏘아져 나갔고 조혜진과 김예리 역시 그런 김현성을 보조하기 위해 빠르게 달려오는 중.
다시 한번 검과 창 그리고 단검이 그녀에게 쏘아졌지만 전부 무용지물.
심지어 단검을 뻗고 있는 김예리를 발로 차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위험한 거 아닌가?’
김예리의 내구력은 높은 편이 아니다. 급하게 주문을 외우려고 했을 때 어디에선가 튀어나온 박덕구가 다시 한번 차희라의 공격을 막았다.
“나이스, 박덕구!”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억!”
자연스럽게 반대쪽 건물로 다시 처박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돌아오자마자 급하게 퇴장하기는 했지만 김예리가 리타이어 되는 건 막았다. 근성과 맷집 하나는 나쁘지 않다. 그렇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은 느낌. 아니 이대로 버텨주기만 해도 이득을 보는 것은 이쪽이다.
‘문제는….’
차희라가 언제까지 이쪽의 사정을 봐줄지 알 수 없다는 것. 지금도 상당히 짜증이 올라온 것이 보인다. 그나마 남아 있는 이성이 이쪽을 죽이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이 한 시간 동안이나 지속된다고 한다면 그녀가 힘 조절을 하지 못할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신화급의 능력치를 정면으로 받았다간 반대쪽 건물로 튕겨져 나가는 것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피떡으로 변해 사방으로 터져나갈 것이다.
‘이거 안 좋은데….’
나와 황정연, 정하얀이 계속해서 마법을 쏟아내고는 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는 상황.
김현성도 계속해서 인상일 찌푸리는 것을 보니 조금은 불안한 모양이다.
아직 이쪽도 차희라도 체력에 여유가 있다. 몬스터를 잡아서 경험치를 올려야 할 소중한 체력과 마력을 이런 곳에서 사용해야 한다는 게 짜증나기는 했지만 이것도 경험치라면 경험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대로 가면 안 돼.’
사실 경험치가 문제가 아니다.
만약 김현성과 차희라가 자리를 비운 타이밍에 녀석의 어미라도 나타난다면 도시 안에서 캐슬락의 제국민들과 사이좋게 전멸할 수도 있는 상황.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된다고 생각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성벽 밖에서 거대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워어어어어어어어어….”
낮은 울음소리. 그렇지만 온몸이 찌릿 찌릿 울릴 정도.
‘망했다.’
도시 안에서는 보이지는 않지만 들려오는 울음소리만으로도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비행형은 아닌지 순식간에 이곳으로 넘어오지는 않았지만 성벽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것을 보고 일이 터져도 제대로 터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만 저놈의 목소리는 이쪽에게만 들리는 게 아니다.
김현성 역시 표정을 구겼고 황정연도 깜짝 놀란 표정.
목소리에 깃든 존재감은 영웅 등급의 몬스터와는 차원이 다르다.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성벽에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
차희라도 차희라지만 일단은 성벽이 먼저다.
‘막아야 돼.’
“일단 성벽 쪽으로! 현성 씨! 일단 성벽 쪽으로 향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하, 하지만….”
“아니, 서쪽 지역으로!”
“네?”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저를 서쪽 지역으로 데려다 주신 이후에 곧바로 성벽에 있는 몬스터를 정리하러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위, 위험해요. 오빠.”
“파티원들은 지금 즉시 성벽으로 향합니다. 혜진 씨가 지휘를 맡고 성벽으로 다가오는 몬스터들을 막는 것에 주력합니다. 기영 씨를 서쪽 지역으로 데려다 준 이후에 곧바로 성벽으로 향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말은 듣지 않겠습니다. 최우선 사항입니다.”
“괜찮을 거야, 하얀아.”
정하얀이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김현성은 내게 무슨 생각이 있는 줄 아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명령은 이미 떨어졌다.
순식간에 이쪽으로 다가온 김현성은 내 손을 붙잡고 곧바로 서쪽을 향해 달려가는 중. 빠른 민첩 능력치만큼 순식간에 배경이 휙휙 뒤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안락하고 따스한 회귀자의 품 안에 안겨 달리는 기분이 뭔가 이상하기는 했지만 방금 전 조혜진이 나를 붙잡고 달릴 때와는 속도 자체가 다르다.
사랑하는 애인을 불한당에게 뺏긴 것처럼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차희라가 보이긴 보였지만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며 빠르게 달려가는 김현성을 잡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무슨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녀석 역시 숨이 차는지 헐떡거리며 이쪽에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마 궁금할 것이다. 난데없이 갑작스레 서쪽 지역으로 향하자는 게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도박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지금 캐슬락 내에는 싸울 수 있는 세력이 하나 더 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지원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네?”
“며칠 전에 우연히 만난 사람이….”
“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얼굴.
그야 미친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나 역시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쪽이 지하 경매장을 다녀온 이후 곧바로 도시를 떠났다면 내 생각이 틀렸을 가능성도 있지만 경매장을 다녀온 이후에 곧바로 캐슬락에 계엄령이 내려 떨어졌다.
‘있을 거야.’
경계가 삼엄해진 것은 물론 붉은용병이 개미새끼 하나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캐슬락을 꽁꽁 에워싸고 있었다.
이쪽이 알지 못하는 지하 출입구가 따로 있다면 또 알 수 없지만 지하 경매장을 중심으로 조사한 결과, 외부로 나가는 출구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만약 이쪽에 조금이라도 미련이 있었다면 금방 도시를 빠져나갈 수 있을 리가 만무. 혹여나 다시 만나지는 않을까 지하 경매장을 기웃거렸을 가능성도 있다는 소리다.
‘있어.’
아마 기회를 봐 탈출할 시기를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 주머니를 뒤적거리자 이전에 받았던 쪽지가 보이기 시작. 다시는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쪽에서 먼저 찾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디까지 가면 되는 겁니까?”
아마도 이 근처.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이후에 부르기 싫은 그 이름을 다시 한번 불러볼 수밖에 없었다.
“샤오… 린!!”
“뭐….”
“샤오린! 나와!!”
당황스러워 하는 회귀자의 얼굴.
기묘하게 비틀린 눈에는 어째서 네가 그 이름을 알고 있는지 묻고 있는 것 같았지만 입술을 꽉 깨물 뿐 다른 건 묻지 않는 것이 보였다.
‘시바…. 아는 사이였구나.’
그것도 악연으로 얽혀 있는 것 같은 느낌. 정진호 같은 반응은 아니었지만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샤오린의 기벽을 생각해 보면 그다지 정의에 편에 서지는 않았던 것 같았지만….
‘공화국 출신일 수도 있으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다. 나중에 적당한 변명거리를 생각해 대충 말해주면 수긍할 수도 있으리라.
“샤오린!! 나와!!”
“정말로 있는 겁니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아마도… 아니 분명히 있을 겁니다.”
오늘만 해도 극적인 상황에 도우미가 나타난 것만 여러 번.
목소리를 듣고 있다면 제발 나와 달라고 절이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차희라가 제정신이 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34분.
아직까지 미친 듯이 이곳을 쫓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김현성에게 안겨 34분 동안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 지금까지는 어떻게 피해내고 있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해 아슬아슬하다. 그만큼 뒤쪽에서 게걸스럽게 달려들고 있는 광년은 왠지 모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어디에선가 폭음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생각 못 했는데…. 그리고 이런 상황에… 그러니까 뭐라고 불러야 되는 거지? 가면남? 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시야에 비치는 것은 건물 위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저번 그 여자.
이전에 만났던 모습 그대로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미인이라고 하더니 정말 미인이 맞았던 모양.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것은 당연지사.
‘이거지!’
정신이 나간 짐승은 똑같이 미친년으로 상대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명언이 계속해서 귓가에 흘러들어오기 시작.
‘힘의 균형은 유지되어야 한다!’
“다시 만나서 영광입니다. 아름다운 샤오린 님.”
너무나도 반가운 인사에 조금 황당해하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