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회귀자 사용설명서 162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3)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옆에 있는 조혜진의 손을 꽉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말고요. 이래 보여도 나 꽤 매력적인데. 가면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수 없으려나. 이런 점은 불편하네. 벗을 수도 없고….”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함께하도록 하죠.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잠깐이라도 어때요? 그것도 불편하면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네요. 아무한테나 이러는 거 아닌데… 정말이라니까?”
“죄송합니다.”
눈앞에 있는 정신 나간 여자를 어떻게든 해결해 보라는 듯 조혜진을 살짝 바라보자 내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앞으로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이니 대충 내가 불편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해두시죠. 확실하게 거절하시지 않았습니까? 더 이상 이러는 것은 무례입니다.”
“아아아….”
“빨리 가자, 유카.”
“네. 하루카 님.”
“뭐야. 애인이 아니라 부하였어?”
“제가 이분과 무슨 사이든 당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닙니다. 이제 그만 비켜주시겠습니까. 더 이상 저희를 곤란하게 하신다면 경비를 부르겠습니다.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으니 제 눈앞에서 그만 사라져 주셨으면 좋겠군요. 지금 계속 앞을 막고 계시는 것도 상당히 불쾌합니다.”
“생각보다 소유욕이 강하네. 부하 씨는….”
“소유욕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예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
“…….”
두 여자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조금 떨리기야 했지만 눈앞에 있는 정신 나간 여자가 뭘할 수 있을 리가 만무.
이곳에서 소란을 일으킨다면 안 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조혜진은 나를 자신 쪽으로 한 번 더 끌어 당겼고 자연스럽게 내 몸은 그녀와 조금 더 밀착되기 시작했다.
이상한 의미는 아닐 것이다.
어디까지나 보호해 주기 위한 행동인 것 같기는 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 모습이 영역 표시라도 하는 것처럼 비치는 모양.
고유 기벽이 시체애호가인 여자는 이쪽을 바라보다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고 마찬가지로 고유 기벽이 고통을 주는 주인님인 여자도 관심을 떼버렸다.
‘뭔 정신 나간 여자가 이렇게 많아.’
정신 나간 놈들도 많기는 하지만 애초에 그쪽은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 논외.
조금 더 시선이 집중되는 걸 느낀 모양인지 결국 샤오린은 천천히 이쪽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던 남자 몇몇이 그녀에게 달려가는 것을 보니 함께 온 수행원인 모양이다.
“종이랑 펜.”
“네.”
“이쪽이 편지를 받을 수 있는 주소예요. 꼭 연락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여유가 된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서로 정체를 밝히기 싫은 건 피차일반인 것 같은데… 여기 있는 걸 보니까 당신도 마찬가지인 것 같지만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능력 있는 사람이거든요. 아마도 도움이 될 거예요. 여러 가지로….”
“꼭 연락을 드린다는 약속은 하기 힘들지만 언젠가는 찾아뵙도록 하죠.”
‘절대로 안 한다, 이년아.’
“꼭이요. 약속하신 거예요? 그럼 전 이만….”
‘빨리 사라져. 제발 사라져라. 대륙에서 사라져….’
아쉬운 듯 계속해서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괜스레 소름이 끼치는 것은 당연지사.
최대한 시선을 피하자 어느 순간 이쪽의 시야를 완벽히 벗어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기가 많으시군요.”
“이런 곳에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인기야. 조금 더 밀착해서 걸어줬으면 좋겠는데.”
“…….”
“나도 별로 유카랑 사이좋은 척은 하기 싫지만 최소한 영역표시라도 하는 것처럼 해줄 수는 없어? 여기저기에서 시선들이 꽂히는 게 괜히 불편하거든.”
“페로몬이라도 뿌리고 다니는 겁니까?”
“비슷한 것 같아. 영향을 받는 게 저런 사람들이라는 건 조금 가슴 아프지만…. 뭐 아무튼 간에 조금 더 사이좋게 걸어보자고….”
“너무 달라붙으니 조금 불쾌한 기분입니다.”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상당히 가슴 아프네.”
“…….”
그렇지만 효과는 있다.
사랑을 속삭이는 것 같은 연인의 모습으로 걸어가니 확실히 다른 이들의 사정권을 벗어난 것 같은 느낌.
애초에 이곳에서 타인에게 말을 건다는 행동 자체가 상식적인 행동은 아니다.
방금 봤던 샤오린이라는 여자가 조금 지나치게 적극적이었던 게 분명.
보안과 고객의 안전에 철저해야 하는 장소인 만큼 어떤 사건이 터질 걱정은 조금 줄여도 될 것 같았다.
‘우리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이곳에 있는 여자들과는 앞으로도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다.
물론 다들 한 가닥씩 능력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더 이상 감당해야 할 여자가 늘어나는 건 이쪽에서 사양이라는 거다.
아무튼 간에 목적이 목적인만큼 다시 한번 천천히 주변을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조혜진 역시 적응이 된 모양인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기 시작. 지금 당장은 이 장소에 불쾌해하기보다는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괜스레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람들이 꽉 찼던 복도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보면 모두 개인 용무를 보기에 정신이 없는 모양.
슬슬 들어가 봐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냥 적당한 곳에 들어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방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들에게 눈짓하자 그들이 커다란 문을 여는 것이 보였다.
이후에 시야에 비치는 것은 전형적인 노예 경매장.
꽤나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은 그들이 이 상황에 익숙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이종족을 보는 건 처음인가.’
조혜진을 이끌고 자리에 착석하자 안내인 한 명이 이쪽에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적당히 가져와 주셔도 됩니다.”
“네.”
아마 어떤 걸 마실 거냐고 물어보러 온 것이 분명하리라.
몸을 반 정도는 눕힐 수 있을 만큼 고급스럽고 푹신한 의자에 앉자 절로 잠이 쏟아질 지경.
아직까지 시작하지 않았는지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채우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여기는?”
“글쎄 확인하고 들어온 건 아니라서… 아마 노예 경매장 같은데. 뭐, 보면 알겠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괜한 소란은 피우지 말자.”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알고 있으면 다행이고. 혹시 이종족에 대해서 아는 건 있어?”
“아뇨. 이야기로만 전해 들었을 뿐입니다. 본 것도 저번 한 번이 전부였고요.”
“그래? 조금 아쉽네. 이쪽도 그쪽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는데.”
“그것보다 저기 멀리 앉아 있는 여자. 아까 그 여자 아닌가요?”
조혜진이 눈짓하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확실히 그 여자가 맞다.
‘시… 바….’
“따라온 건 아닐 거야. 괜히 시선 보내지 마. 이쪽이 여기 왔다는 걸 알리기는 싫으니까.”
분명히 우리가 들어오기 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
애써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니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무대 위에 사람이 들어서는 것이 보인다.
밝은 조명이 쏟아지고 마치 영화관처럼 어두운 이쪽에도 빛이 쏟아졌다.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도 저희 경매장을 찾아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상품에 품질에 대해서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항상 진심을 전하는 저희 클럽에 마음이 담겨져 있으니까요.”
전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싸구려 멘트. 고급스러운 분위기라 조금 기대했는데 이런 부분은 역시 어쩔 수 없는 모양인 것 같았다.
“제가 너무 오래 시간을 뺏는 것도 좋지 않겠죠. 모두 바쁘신 분들이니까요. 갑작스럽지만 곧바로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54살의 엘프 루메니아입니다.”
한쪽에서 긴 귀를 가지고 있는 여자 한 명이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
이러기는 싫지만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 봐왔던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겉모습에 혹한 것도 잠시.
누가 봐도 겁에 질린 것 같은 얼굴로 무대를 올려다보는 엘프를 보니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찡그려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손과 발에는 구속구를 차고 있었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은 동정심을 유발하기에 충분.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의 눈에는 금방 탐욕이 깃든다.
입을 뻐끔뻐끔거리고는 있지만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마법이라도 걸어놓은 것 같았다.
“아주 어렵게 구해온 개체입니다. 흔하지 않은 에메랄드 색 머리를 가지고 있고 보시는 것처럼 몸매도 아주 훌륭합니다. 영양 상태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아주 관리가 잘된 깨끗한 상품이지요.”
함께 나온 사람 두 명이 천천히 루메니아라는 엘프의 몸을 붙잡고 구속하자 비명을 지르며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뒷모습을 보게 하려는 것 같았지만 그것만으로도 공포에 질리는지 부들부들 떨고 있다. 눈에서는 눈물이 닭똥 흐르듯이 터져 나오고 다리가 풀렸는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전투 능력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교육은 일부로 시키지 않았습니다. 가학적인 성격을 가지고 계신 고객님께 필요한 물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엘프치고는 상당히 어린 나이이기도 하고요.”
“목소리가 듣고 싶군.”
“아. 고객님이 원하신다면 당연히 들려 드려야지요. 다른 고객님들께서는 양해 부탁드립니다. 지금부터 잠깐 동안만 걸려 있는 마법을 풀도록 하겠습니다.”
무대 한 쪽에 있는 마법사가 천천히 주문을 외웠고 곧바로 비명과 비슷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누군가… 제발 도와주세요.”
목소리 자체는 맑고 청량했지만 내용이 맑지 않다.
울부짖는 목소리로 주변을 둘러보지만 반응이 있을 리가 만무.
애초에 신성 제국의 일부 귀족은 이종족을 인격체로 보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이곳에 들어온 자유민이야 인성이 어떤지 뻔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좋은 목소리로군.”
“하하하. 당연히 그렇게 느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충 이런 상황이라는 거다.
슬그머니 옆을 바라보자 부들부들 떨고 있는 조혜진이 시야에 비쳤다.
마치 똥이라도 씹어 먹은 것처럼 구겨진 얼굴과 꽉 쥔 주먹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조금 화가 날 거라는 것은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분노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부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혜진의 인성이 조금 더 훌륭한 모양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괜한 소란 일으키면….”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건 인권 유린의 현장이다.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분명.
환호를 보내거나 손가락을 들어 구매 의사를 표현하는 잡놈들을 우리의 정의로운 조혜진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저들은 타인의 고통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타인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며 즐긴다.
“문제가 뭐일 것 같아? 뭐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무슨 소리가 듣고 싶으신 겁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유카.”
후회하는 것 같기도 했고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 그녀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정도로 규모가 크고 이렇게 광기로 점철된 공간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확인한 것은 단순한 장부였으니까.
실제로 이곳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피부로 느끼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이 정도는 보통이야. 솔직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깔끔해서 놀라울 정도지. 뭐, 특별한 노예를 취급하는 곳도 있겠지만 시간도 없으니까. 거기는 넘기는 게 좋겠네.”
“…….”
“노예 거래의 실상은 눈으로 확인했고. 그럼 불법으로 잡아온 몬스터들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아?”
“그건….”
“일어서자.”
입술을 꽉 다물고 있는 조혜진의 얼굴이 보였다.
“저도 한 잔 주세요.”
이렇게 반응할 거라고 생각했다.
“장소를 옮기도록 하죠, 하루카 님.”
“알겠어. 유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