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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54화 (153/1,590)

# 154

회귀자 사용설명서 154화

작은바위(1)

파란은 캐슬락에 훌륭하게 적응했다.

마를린 영애는 우리를 위해 성대한 파티를 열었고 온갖 산해진미와 좋은 술을 마시며 휴식다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오랜 여행의 피로가 풀린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것 역시 일의 연장선임은 변함없었지만 마치 휴양 온 기분으로 캐슬락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특혜 아닌 특혜를 누렸다.

물론 김현성의 경우에는 예외였다.

이쪽이야 본래부터 아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지만 김현성 같은 경우에는 다른 유력 귀족들에게 인사를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피곤해 보였지.’

내가 온다는 소식에 다른 도시에 있는 주교와 귀족들도 캐슬락으로 향한 것이 문제.

5일이 넘게 지속된 연회 기간 동안 모든 이의 얼굴을 익히고 대화를 나눠야 했던 김현성은 정말로 힘들어 보였다.

체질인 나와는 다르게 칼 밥 먹고 살던 녀석에게는 어울리는 그림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캐슬락 백작 때문에 조금 더 힘들었으리라.

마를린 캐슬락의 아버지로서 김현성이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주인공. 문관보다는 무장이라는 느낌이 강한 이 귀족이 김현성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다.

실제 능력치도 웬만한 자유민 정도는 쌈 싸먹을 수준.

덕분에 마를린 캐슬락이 계속해서 이쪽에 달라붙어 있는 상황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큼. 딸아이가 실례가 많은 것 같습니다, 명예 주교님.”

“괜찮습니다, 캐슬락 백작님. 총명하신 따님과 대화를 나누는 건 저 역시도 즐겁습니다. 최근에 마를린 영애 때문에 웃을 수 있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큼… 사실 딸아이가 본래 한 가지에 빠지면 정신을 못 차리는 성격이라……. 최근에 지켜보니 정말로 이기영 님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더군요.”

“하하….”

“저희끼리라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혼담을 진행시켜 달라고 떼를 쓰는 바람에 여간 당황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아, 이건 마를린에게는 비밀입니다. 명예 주교님. 은근슬쩍 떠보기만 해주라고 부탁받았던 터라….”

“네. 그… 렇군요.”

이런 위험한 상황이 생긴다는 거니까.

“저도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부끄럽지만… 끄응. 딸아이 고집에는 당할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자꾸 이런 소리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뇨.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백작님.”

이번이 벌써 두 번째 방어전이다.

슬하에 자식이라곤 마를린 하나밖에 두지 않은 이 캐슬락 백작은 딸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어 하는 딸 바보.

말하자면 마를린 영애의 모든 것을 받아주고 싶어 하는 아버지라는 거다.

처음에는 나를 보고 도둑놈 바라보듯이 바라보기는 했지만 자신 나름대로 계산이 선 모양인지 계속해서 이런 압박 아닌 압박을 넣고 있었다.

사실 나 정도면 어디 가서 빠지는 사람은 아니다. 유력 길드의 부길드 마스터고 교황청의 명예 주교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다.

물론 황제파와 교황파가 사이가 좋지는 않지만 내가 그들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되어줄 수 있다 가정했을 때 내 가치는 천정부지로 올라간다.

‘얻을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하겠지.’

귀족은 원래 조금은 계산적이다.

그나마 이 캐슬락 백작 같은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덜한 편. 사실 여러 계산 이전에 그냥 마를린이 원하는 걸 들어주고 싶어 하는 것이겠지만, 개인적으로 나와 마를린을 이어주는 게 캐슬락에 나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용병여왕님과 인연을 맺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작게나마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항상 붙어 다니는 마법사님과도?”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흐음… 딸아이도….”

“아마 알고 있을 겁니다.”

조금 고민하고 있는 것 같은 표정.

이쪽에서 먼저 운을 띄울 수밖에 없었다.

“저… 아직 마를린 영애가 성인식이 지난 지 얼마 안 되서 혼란스러워 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국민에게 자유민들이란 조금 신기하고 특별하게 다가오기도 하니까요. 당연히 저로서도 아름다우신 따님을 배필로 맞이하고 싶지만 혹시나 한 순간의 실수로 마를린 영애의 앞날을 망쳐 버리지는 않을지 큰 걱정이 됩니다. 자유민에게는 자유민의 인생이 있고 마를린 영애의 앞도 창창하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마를린 영애는 장차 캐슬락을 물려받아 운영해야 하는 만큼 너무 급하게 일을 진행시키기보다는 그저 차분히 영애를 지켜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큼.”

“마를린 영애에게는 제가 잘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일단은 부탁드립니다. 제 생각보다 조금 더 좋은 분이신 것 같군요. 명예 주교님은.”

‘시바… 점수 땄나?’

“아닙니다, 백작님.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하하!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오늘 식사는 함께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마침 좋은 술이 들어왔는데… 딸아이도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안은 감사드립니다만 오늘은 따로 할 일이 있어서… 내일은 어떻습니까?”

“내일도 괜찮을 것 같군요.”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백작님.”

“네. 즐거웠습니다.”

슬쩍 방문을 닫고 나오니 진이 빠진다.

캐슬락 백작과 함께하는 둘만의 진지한 오찬은 대부분이 이런 이야기.

조금 표정이 안 좋은 것을 보면 평소에 얼마나 마를린이 자신의 아버지를 달달 볶는지 알 수 있었다.

사실 나로서도 마를린과 연결되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다.

만약에 캐슬락에 붙어 있지 않아도 된다는 전제조건이 붙는다면 말이다.

애초에 자유민들을 일반 평민이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하지만 귀족과 결혼한다는 것은 귀족이 될 수 있다는 거니까.

그렇지만 조금만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굳이 필요한 일도 아니다.

나는 이미 귀족 이상의 위치에 있는 교황청의 명예 주교이며 그 지위는 백작에 필적한다.

괜히 캐슬락 백작이 나와 함께 대담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는 거다.

캐슬락 백작이 죽은 이후에 마를린에게 캐슬락의 통치권이 넘어간다면 아주 조금이나마 생각해 볼 여지가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마를린은 짐.

가문과 가문의 결합, 집단과 집단의 협치라고 생각하는 제국민의 결혼관습은 이쪽에게는 머리 아프게 다가올 뿐이다.

‘어느 정도만 관리해 주는 게 맞아.’

정하얀, 차희라, 이지혜를 생각하면 이게 맞다.

방을 빠져나오자 곧바로 마를린 영애가 다가오는 게 시야에 비쳤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

처음부터 모든 걸 설계해 둔 주제에 저런 표정을 보내는 게 꽤나 우습다.

“이기영 님! 아버님과의 오찬은 마음에 어떠셨는지요.”

“캐슬락 백작님이 편하게 대해주셔서 마음 놓고 식사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영애.”

“다, 다행이네요. 혹시 다른 이야기를 듣지는 않으셨는지….”

“말씀드리기 조금 부끄럽습니다만 캐슬락 백작님께서는 저와 마를린 영애를 이어주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네. 하하….”

“아… 버님도 참…. 이기영 님이 이해해 주세요. 아버님이 이기영 님이 무척 마음에 드신 모양이라….”

‘네가 마음에 든 거겠지.’

“캐슬락 백작님께서 영애를 무척 아끼시는 것 같습니다.”

“네. 그렇죠. 그, 그보다 대, 대답은… 어떻게 하셨는지….”

“일단은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유민으로서의 제 삶도 있고 결혼은 아직 제게도, 마를린 영애에게도 이르니까요.”

“그 말씀은?”

“일단은 차차 서로를 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영애.”

“아!! 네… 네!”

“그리고 오늘 식사는 내일로 미루기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할 일이 있어서…. 그럼, 저는 이만.”

“네, 이기영 님.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을….”

“네. 알겠습니다.”

여기는 일단 이정도로 끝. 그 동안 즐길 만큼 즐겼으니 이제 일을 하러가는 게 맞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아까의 마를린과는 또 다른 표정의 정하얀이 보였다.

이 여자와 대화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여자를 만나니 정말로 바람둥이가 된 것 같은 느낌.

괜스레 김예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애써 무시해 버렸다.

“오빠!”

“가자, 하얀아. 많이 기다렸지?”

“아, 아니에요!”

“점심은 먹었어?”

“네. 현성 씨랑 덕구 오빠랑 그리고 예리랑 희영 씨랑 혜진 씨랑 정현 씨랑 같이요.”

“다행이네. 현성 씨는….”

“이 앞을 둘러보고 온다고 하셨어요. 뭔가 조사하러 나가신다고 했는데….”

“음. 알겠어. 그럼 가자.”

“네!”

“서류는 챙겼지?”

“네!”

“기분 좋아 보이네.”

“오… 오랜만에 오빠랑 둘만 나가는 거니까요. 헤헤….”

“생각해 보니 정말로 그렇구나.”

오랜만에 외출이라 조금 들뜬 얼굴이 보였다.

굳이 정하얀을 데려가는 이유는 호위의 개념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호위야 비밀리에 나를 보호해 주는 캐슬락의 기사들도 있고 신성기사단과 이단심문관들도 있다.

함께 나들이를 나선 건 그 동안 잘 참아왔던 것을 보상해 주는 의미가 강하다.

정하얀의 기준으로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을 몇 가지 사건들과 상황들을 훌륭히 참아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라고 하는 것이 맞으리라.

‘조금씩 조금씩 챙겨줄게, 하얀아.’

마치 강아지를 길들이는 것처럼 참으면 보상 받는다는 개념을 확실히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했다.

괜스레 캐슬락에서 폭주하기라도 하면 큰일.

이지혜는 정하얀이 흥분하지 않는 내에서 선을 잘 지켰고 차희라나 카스가노 유노 같은 경우에는 애초에 정하얀보다 월등히 강하다.

그러나 마를린 영애 같은 경우에는 아무런 힘도 없는 일반인.

괜스레 기분에 취해 날뛰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으리라.

‘회귀 사건으로 한 번 멘탈을 잡아 놔서 다행이야.’

만약 그때 한 번 바로잡지 않았다면 사건이 터져도 백 번은 더 터졌으리라.

“그럼 지금부터 어디 가는 건가요?”

“일단은 데이트 좀 한 다음에 작은 바위에 갈 거야.”

“데이트….”

“그동안 하얀이가 열심히 해줬으니까.”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이 장하게 느껴진 모양. 생각보다 조금 더 귀여웠다.

“그, 그럼 가요.”

“그래.”

“캐슬락 근처에 구경할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많은 것 같더라.”

“정말요?”

“그럼.”

짧은 시간이지만 제법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즐기는 게 맞다.

“오빠! 저거 봐요! 나무가 거북이 모양이에요.”

“아. 응.”

멋진 경치를 구경하고.

“너무 귀엽다.”

“이건 얼마나 합니까?”

지나가다 보인 예쁜 액세서리를 선물해 주기도 하고.

“연극도 보러갈까?”

“네… 네!”

지구와 별다를 바 없는 코스를 밟는다.

“저기 보트도 탈 수 있어요!”

“…….”

“저거 타러가요, 오빠.”

“저건… 나중에 타자.”

“그치만 지금 타고 싶은데….”

“시간이 없으니까 나중에 또 기회가 있을 거야.”

지구보다야 문화가 낙후되기는 했지만 이곳에서도 즐길 거리가 충분하니까.

“헤헤헤.”

행복하고 웃고 있는 정하얀을 보니 왜 진즉 이렇게 해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

물론 그간 바쁘기는 했지만 앞으로는 조금 시간을 내서라도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풀어주면 되지.’

“너무 좋다. 헤헤….”

“다행이네.”

손도 잡고 가끔 포옹도 하고 노을 지는 저녁에는 살짝 입도 맞춰준다.

‘얘가 이렇게 예뻤나.’

사실 예전부터 내가 정하얀에게 은근슬쩍 빠지고 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정면으로 진지하게 마주하니, 조금 더 끌어 당겨지고 있는 듯한 느낌.

최근에는 정상인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해 주고 있다는 게 더 마음에 든다.

“항상 고마워, 하얀아.”

“저, 저도요.”

미친 소리 같겠지만 만약 결혼을 할 거라면 이런 여자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럼 작은바위로 가볼까.”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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