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회귀자 사용설명서 145화
집으로(5)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리폰을 주고 싶은 생각이 날아가 버리기 일보직전이었지만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벌써부터 선물을 공개하고 싶다.
김현성 자식이 표현하는 게 서툴다는 것을 대충 알고 있었지만 환한 웃음까지 꿍쳐두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주 좋아.’
솔직히 조금 섭섭할 뻔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 회귀자를 향해 충심으로 버텨온 지난 1년. 빠진 독에 물 붓는 건 아닌지 걱정했었지만 제대로 열매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정이 들어가는 마당에 놈이 그렇지 않는다는 것은 어딜 봐도 이상한 일.
그 동안 내 행적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물론 튜토리얼에서 처음 봤던 놈의 무표정한 얼굴을 봤을 때는 우여곡절 끝에 회귀한 이 자식이 인간성을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야 했었지만 우정의 힘이 얼어붙은 놈의 마음을 살살 녹이고 있었던 것.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표정이 제법 다양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의 녀석은 어디까지나 우리들을 사무적으로 대했었다. 아직까지도 서로 말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
최근에 와서는 제법 웃어주거나 농담을 하기도 하면서 변하고 있었지만 애매한 거리감이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아 불안하던 차였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관계는 진전하고 있었다.
‘너무 비인간적이면 안 좋아.’
동료의 위기와 멸망을 앞둔 세계, 이후에 우리 현성이가 이 두 가지 중 하나의 선택권에 도달했을 때 내가 원하는 것은 무조건 전자다.
‘나를 먼저 구해줘야지.’
무조건 나를 먼저 구해야 한다. 당연하지만….
‘먼저 가!’
라든가.
‘나 대신 세계를 구해!’
라든가.
‘꼭 행복하게 살아. 내 몫까지 힘차게 살아줘!’
라든가.
‘죽기 참 좋은 날씨네. 현성 씨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여기는 제게 맡겨 주세요.’
따위의 대사를 외친 이후에 장렬하게 퇴장할 생각은 하나도 없다. 기껏 충성을 바친 이후에 녀석이 덜컥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내뱉으며 나대신 세계를 선택하면 그게 바로 죽 쒀서 개 준 꼴.
녀석이 이쪽에 정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은 어딜 봐도 청신호였다.
너무나 아름다운 소식에 순간적으로 표정관리를 하지 못한 모양. 재미있다는 듯이 이쪽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조혜진이 시야에 비쳤다.
“기뻐 보이십니다.”
“현성 씨는 평소에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편이라 저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몰랐습니다.”
“좋군요. 동료라는 건.”
“동료라기보다는 친구나 동생 같은 느낌입니다. 물론 현성 씨도 같은 생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파란에서 함께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
“아.”
“사실 그렇게 긴 시간을 함께 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파티원들끼리 쌓아올린 유대라는 게 있으니까요.”
“유대….”
얼마나 공들여서 쌓았는지 알면 놀랄 것이다. 죽을 정도만 아니라면 김현성과 정하얀, 박덕구를 위해 칼이라도 대신 맞아줄 수 있다.
‘실제로도 그렇게 해왔고.’
“캐슬락에서 문제가 생겨 이쪽으로 오셨다고 들었는데 혹시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 그건….”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들어오게 됐는지 궁금한 것은 당연지사.
슬쩍 운을 띄우니 곧바로 벽을 치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아무래도 말하기 싫은 모양.
자꾸만 말을 더듬는 것 같았다. 어차피 그녀가 말하기 싫어도 이쪽은 따로 정보통이 있어서 상관은 없지만….
‘마를린 영애한테 편지 한 통 써야겠네.’
뭔가 구린내가 나는 것은 사실.
알리기 싫어하는 것만 봐도 대충 답이 나온다. 뭔가 실수를 했거나 숨겨야 할 사정을 가지고 있다.
애초에 이런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 자유민이 구태여 다 죽어가는 파란을 선택한 것도 이상한 일.
물론 김현성이 그녀를 포섭하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기야 했겠지만… 뭔가 캥기는 것이 있기는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현성이는 그걸 알면서 받아줬을 테고….’
녀석 역시 은근히 감언이설에 능하니 어느 정도 패널티를 떠안고 그녀를 받아줬을 것이다.
그녀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을 테니까.
따로 알아보기로 결정을 내린 것은 순식간. 더 이상 쪼을 필요는 없다. 인맥이 많은 건 이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 거다.
“말씀하시기 싫으시다면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굳이 심문하는 것도 아니니 긴장하실 필요도 없고요. 조혜진 씨에 대한 프로필은 잠깐 방위로 올라가 읽었습니다. 저희 길드에 오시는 게 과분할 정도로 많은 활약을 해주셨더군요.”
“과찬입니다.”
“환영인사를 저만 드리지 못한 것 같더군요. 혜진 씨, 파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부길드 마스터.”
“네.”
그녀와의 짧은 대화는 이걸로 끝, 지금 당장은 권력의 양분화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한 일 년이나 이 년 정도 후라면 모르겠지만… 이쪽이 확실히 위라는 걸 계속해서 인지시키면 되니까.
인사를 한 뒤에 발걸음을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슬그머니 정하얀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손에는 독창적인 요리들을 담은 접시가 자리하고 있다. 박덕구는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고 선희영도 슬그머니 자리를 옮긴다.
저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는 걸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고 느낀 것은 당연.
애써 시선을 돌리자 정하얀이 한 발자국 다가온다.
“오, 오빠. 한 번 드셔보시겠어요?”
“아….”
도박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물론 필요할 땐 던져야 된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이건 굳이 주사위를 던질 필요가 없는 작업.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다고 생각해 슬그머니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보다는 잠깐 붉은 용병에 다녀올까?”
“네?”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 선물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네….”
사람이 제법 감성적으로 변하는 저녁 10시. 우리 회귀자에게 그리폰을 선물해 줄 시간으로는 제법 적절하다.
문제는 자신이 해준 음식을 먹어주지 않은 게 내심 섭섭한 것 같은 정하얀의 표정.
함께 다녀온 정하얀에게는 따로 챙겨줄 것이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저런 것 한 입 정도는 먹어주는 게 수지에 맞으리라.
생각 없이 수저를 들어 입 안에 집어넣는 것은 순식간, 맛을 느끼기도 전에 사정없이 목구멍으로 삼켜버렸는데도 불구하고 입안에 이상한 맛이 감돌았다.
‘시바.’
방금 목구멍으로 넘어간 흐물흐물한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일단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최대한 이 상황을 벗어나야만 했다.
“맛있네.”
“아!!!”
“그럼 다녀올까?”
“네!!”
모두들 몰래 밖을 나서는 게 왠지 두근거리는지 정하얀이 달라붙어 왔지만 용무는 야외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붉은 용병에 맡겨놓은 선물을 되찾기 위함.
그러고 보니 저녁에 린델에 나온 것은 제법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의 린델 역시 제법 활기차다.
치안이 안 좋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르다.
물론 빈민촌 쪽은 위험하기는 하지만 광장이나 길드들이 밀집되어 있는 장소는 낮보다 안전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벽까지 불을 밝히는 야명주가 있고 야시장을 운영하는 상인들도 있다. 집집마다 불이 켜져 있기도 하고 당연하지만 그건 붉은 용병 길드도 예외는 아니다.
짧은 시간 동안 왔다 갔다 하는데 용병 여왕을 부를 수는 없는 노릇. 잠깐 동안 잠깐 마구간에 들려 그리폰과 창고에 맡겨놓은 물건들을 가지고 나오니 괜스레 시선이 집중됐다.
“쿠룩.”
하얀색 그리폰과 검정색 그리폰이다. 그리폰을 무려 두 마리나 끌고 다니는 모습에 모두가 신기한 듯 이쪽을 바라본다.
굳이 예를 들면 시골에 외제차를 끌고 나타난 셈. 당장 수도에서도 그리폰들을 신기한 듯 바라본다. 린델에 4개체 밖에 없는 그리폰이다 보니 시선이 집중되는 것도 당연하다.
‘이게 형이 줄 선물이다, 현성아.’
김현성이라고 저들과 다를 리가 없다. 물론 1회 차 때는 수도 없이 타고 다녔을 테지만 차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는 별로 없다.
실용적이고 전투에도 활용이 가능한 게 요 녀석들이니까. 회귀자한테 줄 검은색 녀석은 제법 날카롭게 생기기도 했고 카리스마도 있어 보인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중요시하는 이토 소우타가 타고 다녔던 놈인 만큼 관리가 무척 잘 되어 있다.
괜스레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고 사람들이 몰려든다.
지구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시선을 이런 곳에서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파란 길드 하우스에 도착할 때까지 시선이 떨어지지를 않을 정도에 이제는 점점 부담스러워졌지만 정하얀은 마치 이게 내 남자친구라는 듯한 표정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부끄러운데.’
그저 마냥 좋은 모양이다.
그렇게 파란의 길드 하우스로 도착한 것은 순식간. 잠깐 산책을 나간 줄 알았던 두 사람이 갑자기 그리폰을 데리고 오자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의 사람들이 시선이 비쳤다.
“형님. 어디 갔다가… 엉? 그거….”
“사실은 시간을 내서 따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지금이 딱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마침 파티 중이기도 하고 선물을 드리기에 적절할 것 같습니다.”
“오!”
선물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자기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길드 직원들은 별다른 관심이 없기는 했지만 당연히 저들을 위한 선물도 있다.
“직원분들은 미처 선물을 준비해 드리지 못해 일단 수도에서 파는 간단한 것들로 준비했습니다.”
“와!!!!”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간단한 선물이 아니다.
꽤나 고급 브랜드로 취급되는 귀중품.
남자들에게는 만년필 세트와 시계, 여자들에게는 화장품 세트와 가방.
가격이 제법 나가기는 했지만 이번에 벌어온 돈에 비하면 푼돈이나 마찬가지. 물론 자필 편지 정도야 전부 적어 두었다.
모두의 이름을 적어 놓는 것도 기본.
이게 사회생활이라는 거다. 부하 직원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사기진작이 된다.
옆에서 정하얀이 하나하나 나누어 주는 모습을 보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차별하는 건 아닙니다만 간부 여러분들께는 따로 선물을 준비했으니 직원분들은 괜히 아쉬워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쉬워 할 리가 없다.
애초에 비전투직군인 저들에게는 저런 선물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할 테니까.
“덕구는 저번 원정에서 방패를 구했으니까 검으로….”
“어? 고, 고맙소. 어어어어!”
아이템의 기능을 확인한 박덕구의 눈이 엄청나게 커졌다. 무거운 무게에 당황한 것이 아니다. 능력치를 보고 놀란 것이 틀림없으리라.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 영웅 등급 중에서도 상등품으로 취급되는 물건이다.
[거인의 단검으로 만든 대검 - 영웅 등급]
[이제는 잊힌 종족인 거인족이 사용하던 작은 단검의 조각으로 만든 대검입니다. 명장 카할라스의 작품으로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이 무거운 대검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면 위협적인 파괴력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소유하는 것만으로 근력 능력치가 6 상승합니다. 다른 부가기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상희 님과 정연 씨는 각각 영웅 등급의 목걸이를 준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기영 씨.”
[베니고어 여신의 축복이 깃든 목걸이 - 영웅 등급]
[베니고어 여신의 축복이 깃든 목걸이입니다. 중급 저주 해제와 중급 해독, 상급 치유 마법이 깃들어져 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 됩니다.]
“우리 꼬맹이는 단검으로….”
“고마워….”
[대마법사 아이작의 투척용 단검 - 영웅 등급]
[소환과 역소환이 가능한 단검입니다. 어떤 경로로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부 전문가는 이 단검이 다른 차원을 넘어온 것은 아닐까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수많은 세월의 흔적이 담겨져 있습니다. 뒷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민첩 능력치가 3 상승합니다.]
“희영 씨는 반지로 준비했습니다.”
“고마워요, 기영 씨.”
[카를레나 여왕의 결혼반지 - 영웅 등급]
[망국의 여왕 카를레나가 평생을 간직하고 있었던 결혼반지였습니다. 매우 수수한 이 반지는 카를레나 여왕의 성품을 그 누구보다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카를레나 여왕의 진실한 기도의 효과로 신성력을 품게 되었습니다. 모든 신성 주문의 효과가 소폭 상승합니다.]
모두가 특등품이다.
일부는 신전에서 선물로 받은 것들이고 일부는 야마토 길드가 망하면서 이쪽에 넘어온 물건.
사실 이것 말고도 이토 소우타가 가지고 있는 바람의 검이라든가, 간부들이 사용하던 몇몇 물건이 있기야 있지만 이후에 추후 분배를 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모두에게 선물을 주고 남은 것은 김현성.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녀석에게 아이템을 받아먹던 것이 나였다는 걸 생각해 보면 조금 황당한 그림이기는 하지만 우리 회귀자에게는 자격이 있다.
“우리 파란의 길드 마스터를 위해 준비한 선물은 바로 이 그리폰입니다.”
“아!”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검은색 날개를 활짝 핀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김현성의 표정을 살펴본 것은 당연지사.
‘입 찢어지네.’
좋아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내 예상보다 더 좋아하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물론 정말로 활짝 웃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녀석의 기준에서 입이 찢어진다는 표현.
그렇지만 입가에 그려진 미소는 한동안 얼굴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형 마음이다, 자식아.’
내가 다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