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회귀자 사용설명서 128화
함정 카드 발동(1)
별다른 감흥은 없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정해져 있었고 지금에 와서 사교계에 데뷔한다는 것 자체에 별 다른 무게를 두지는 않았다.
‘할 일만 잘하면 돼.’
새로운 인물이라는 건 어딜 가나 관심을 받게 마련, 특히 용병여왕의 정부이자 이번 모임에 뜨거운 감자의 주인공.
유리한 위치다.
애초에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의 혐의를 벗고 있다고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꼴.
빅터하르트의 보호를 받고 있는 내게 개짓거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간 큰 놈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문이 열리자 고급스러운 내부가 시야에 들어왔다.
한쪽에 비치된 테이블들과 가벼운 디저트나 와인을 들고 다니는 하인들도 보였고 검은 머리를 한 동양인들도 눈에 띄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들어왔던 것은 형형색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제국의 귀부인들.
옷은 대충 보기에도 그 원단이 고급스러워 보였고 그들이 하고 있는 액세서리는 가격을 측정하기 힘들 정도였다.
‘제국 귀족.’
신성제국의 신관의 옷을 입고 있는 이들도 눈에 띈다.
아마 저들이 교황청 쪽에 속해 있는 이들.
조금 황당했던 것은 저들 역시 무척 비싸 보이는 옷과 장식을 하고 있었다는 것.
아무래도 이쪽의 종교는 청렴함을 모토로 하지 않는 모양이다.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기도 전에 슬쩍 나에게 손을 뻗는 차희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약간의 죄책감이 그녀의 표정에 감돈다.
“잡아, 자기.”
신성제국의 경우에도 남자가 여자를 에스코트 하는 게 일반적, 그렇지만 차희라는 그런 건 엿이라도 먹으라는 것처럼 내 손을 잡고 나를 이끌기 시작했다.
흘러들어오는 마력에 팔이 아프기는 했지만 애써 입을 꾹 다물고 발걸음을 옮긴다.
‘더럽게 아프네. 시바….’
걸음걸이는 커다랗게.
주변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눈으로 주변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용병여왕 그 자체.
나름대로 병약해 보이는 남자가 강한 여성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입장하는 게 이곳에 있는 이들에게는 어떻게 비칠지 모르겠지만….
‘효과가 있어.’
이건 내 이미지에 도움이 된다.
“저분이….”
“용병여왕님께서 푹 빠지셨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이런 적은 처음이죠? 아마?”
“생각했던 거랑은 조금 다르게 생기셨네요. 조금 더 거친 이미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능력 있는 연금술사라는 모양이에요. 학자 타입이신가 봐요.”
“누구를 해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얼굴이네요. 조금 귀엽게 생기기도 하신 것 같고….”
“아. 저도 느꼈어요. 보호해 주고 싶은 그런 느낌?”
“맞아요. 그런 생각이 들죠.”
“용병여왕님의 취향도 훌륭하시네요. 언뜻 보기엔 평범해 보이기는 하지만 묘한 색기가 보이는 게….”
“네. 네. 저도 느꼈어요.”
가지고 있는 부채로 입을 가린 채로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하고는 있지만 전부 다 들려온다.
‘저 아줌마들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확실하지는 않지만 귀부인 쪽에 인기가 많은 것 같은 느낌.
보호 본능을 일으킨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기는 했지만 지금 내 모습이 그렇게 비치기는 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나를 아니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남자들도 있기는 있다.
가슴 아프기는 하지만 용병여왕의 뒤나 쫄레쫄레 따라다니는 멍청이로 기억되는 편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내 가치는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있고 지금 당장은 그저 피해자로 기억되는 것이 더 편하니까.
‘저런 놈이?’
‘농담이겠지.’
‘살인은 무슨.’
‘무슨 사정이 있는 모양이구만.’
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게 첫 번째.
차희라가 이걸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행동 덕분에 일단 대중들에게 그런 이미지를 넣어주는 것이 반쯤 성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이 사교회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시선이 떨어질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 상황.
어떻게든 말을 붙여오기 위해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람들이 시야에 비친다.
누구와 먼저 대화를 나누는 지도 이곳에서는 조금 중요한 문제.
기왕이면 권력자가 좋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자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정하얀의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우리 세컨드 표정이 말이 아니네.”
“…….”
“내일은 네가 함께 입장해도 돼.”
“아… 네.”
“나는 공평한 걸 좋아하거든.”
이 와중에도 슬그머니 정하얀을 배려해 주는 모습은 무척이나 고맙다.
그렇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여기에 주인공들이 전부 모여 있으신 것 같은 느낌이네요.”
“오랜만에 보는군. 카트린 공작부인.”
“빅터하르트 님도 간만이시네요. 용병여왕님은 잘 지내셨나요?”
“네. 저는 잘 지냈습니다.”
‘나쁘지 않네.’
이쪽에 말을 걸어온 것은 남색의 머리를 하고 있는 여자.
대충 보기에도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눈에 보인다.
‘카트린 공작부인.’
사교회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여자.
공작부인이라는 위치도 그렇지만 특유의 친화력 때문인지 이곳저곳에 인맥을 많이 만들어 놓고 있다는 걸로 알고 있다.
나이가 많아 병상에 누워 있는 자신의 남편 대신 일선에 나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성제국에서도 많은 영향력을 행세하고 있는 사람.
말하자면 친목을 다지기에 최적화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소리다.
“이분이 떠들썩한 소문의 주인공이신가요?”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카트린이라고 합니다. 제가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시네요.”
“무슨 의미이신지….”
“저는 조금 더 무서운 모습을 상상했거든요. 이렇게 훤칠하실 줄은 몰랐네요.”
“감사합니다. 카트린 공작부인께서도 듣던 대로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어머. 저를 알고 계신가 봐요?”
“네. 물론입니다. 평소에 누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니까요.”
이정도 립 서비스는 해주는 것이 당연. 예상했던 대로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리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용병여왕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남자친구 분을 잠깐 빌려가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공작부인. 안 그래도 심심하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무척 다행이로군요.”
“후훗. 감사합니다.”
정하얀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감돌았지만 일단 차희라의 오케이 사인은 받았다.
그녀 역시 따로 할 일이 있는 것이 당연.
아마 검은백조의 마스터와 함께 현재 린델의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정하얀 역시 궁정 마법사들과 함께 안면을 터놓아야 할 테니 내 쪽은 이쪽을 상대하는 것이 당연.
카트린 공작부인에게 왼쪽 팔을 내밀자 의외라는 듯이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보였다.
사실 아까 희라 누나가 잡은 오른팔을 보호하기 위한 것뿐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내가 에스코트 하는 것으로 보였던 모양.
당연하지만 그녀를 제외한 다른 귀부인들도 천천히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가십의 중심에 있으니 이런 대우를 받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사방에서 눈길과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부터 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을 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최대한 주제와 관련이 없는 이야기부터 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기초 공사를 해놓는 게 중요하니까.’
다짜고짜 사건의 이야기부터 들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어머… 용병여왕 님께서는 그럼….”
“네. 희라 누나와는 저희 세계에 있었을 때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습니다. 그때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아아. 그러셨구나.”
“율리에나라는 검은 어디서 얻으신 건가요?”
“파티원을 구하기 위해 던전 공략에 나섰다가 얻었습니다. 본래는 저희 길드 마스터인 김현성 님의 소유가 될 예정이었지만 율리에나에게는 선택받았지요.”
“굉장하시네요. 자유 도시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아서 파란이 겪었던 일에 대해서도 들었어요. 저주받은 신단의 공략 도중에 발견하신 보물이 아닌가요?”
“잘 알고 계시는군요.”
“네. 이기영 님께서 만든 물약으로 저주의 효과를 반감시켜 공략에 성공했다고 들었는데 제 말이 맞나요? 연금술사가 공략에서 직접적인 도움을 준 첫 번째 사례이기 때문에 린델에서도 무척이나 화제였다고 들었거든요.”
“부끄럽습니다.”
“어머 정말로 그렇군요?”
“재미있네요.”
이미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들도 있다.
당연하지만 저들이 미리 조사를 해온 것이 아니다.
틀림없이 이지혜가 이곳저곳에 이빨을 털고 다닌 것이 분명. 모르긴 몰라도 이쪽에 대해 좋은 소리만 주입시켜놨을 것이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간의 우정을 돈독히 하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자유 도시 실리아에서 오신 야마토 길드의 이토 소우타 님 입장하십니다.”
이쪽에게 빅 엿을 먹인 녀석이 입구에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한 것.
당연하지만 여기저기서 시선들이 날아와 꽂힌다.
제법 날렵하게 생긴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평소에도 이미지 관리를 잘해왔을 것이 분명.
교황파 뿐만이 아니라 귀부인이나 다른 귀족들의 시선에서도 왠지 모를 호감이 머물러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능력은 있구만….’
이만한 사람들에게 호감 어린 시선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능력이다.
벌써부터 이곳저곳에서 놈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는 상황.
언뜻 보면 내 쪽에 과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맥과 능력 그리고 힘.
움직임에는 기품이 넘치고 선량한 인상은 누가 봐도 뒤로 거지같은 짓을 저지를 이미지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언제부터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이곳의 인간들을 관리했다고 생각한다면 아마 놈에 대한 신뢰도는 상상 이상일 것이다.
기껏 해야 빅터하르트와만 친분을 유지한 차희라와는 상황이 다르다.
검은백조의 박연주도 길드 마스터가 된지 얼마 안 됐고 카스가노 유노 역시 그럴 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인기인이라는 거네.’
유치하고 1차원적인 표현이지만 틀림없이 이토 소우타는 이곳의 인기인.
조금 뜻밖이었다는 것은 이쪽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는 것.
순식간에 표정을 바꾼 것은 당연지사.
조금은 겁먹은 듯한 표정과 자세를 취하자 녀석이 활짝 웃는 모습이 들어왔다.
“오랜만이로군요.”
이쪽에 말을 거는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다.
단순한 과시? 아니면 화해?
생각보다 이쪽을 건드린 게 파장이 커지자 지레 겁을 먹고 먼저 왔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네… 오랜만입니다.”
귀부인들은 슬그머니 길을 비켜주기 시작했고 빅터하르트는 조금 녀석을 경계하기 시작.
내 호위라는 입장에 있는 이상 이런 행동은 무척이나 당연할 터.
녀석의 얼굴에 살짝 묻어나온 것은 흥미였다.
‘하….’
재미있어 하는 표정.
‘그렇다, 이거지.’
놈은 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아마 이번 일 역시 쉽게 끝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과는 다르다.
나는 법정이 아니라 사교장에 서 있고 현재의 린델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상태.
신성제국에서도 나를 함부로 하지 못하는 입장에 있다.
어쩌면 처음 겪어보고 있는 상황에 신기하고 재미있어 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놈같이 모든 걸 다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는 나 같은 놈이 그저 흥미 거리로 비칠지도 모른다.
“조금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기영 님.”
‘개새….’
이건 납작 엎드리는 게 아니다.
내가 던진 카드와 주사위에 겁을 먹고 피하는 행동이 아니다.
녀석은 나를 확실히 내려다보고 있다. 승자가 패배자에게 아량을 베푸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본인이 예상하지 못한 수에 감탄을 보내면서 박수를 치고 이쪽으로 들어올 공간을 마련해 준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열심히 했네. 제법이야. 그래서 이제 어쩌게? 어차피 이것밖에 선택지가 없는 거 알잖아? 내 손을 잡아. 그게 최선이야.’
놈의 목소리는 내게 이렇게 들려온다.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거짓말. 뒤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제 와서 오해라니 개소리도 작작해.”
“차희라 님, 저희 실리아는 어디까지나 린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을 뿐입니다. 이유야 어찌됐든 두 집단이 너무 과열되어 있습니다.”
“글쎄?”
“신성제국에서는 분쟁을 바라지 않습니다. 사건의 경위가 어떻든 간에 서로가 가지고 있는 앙금을 풀어 버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길드원 한 명을 잃은 것은 가슴 아픕니다만… 신성제국의 테두리 안에서 한 편이라고 할 수 있는 저희들끼리 부딪치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 아닙니까.”
요약하자면 본인이 희생한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평화를 위해 양보해 주겠는 느낌.
“그걸 말해야 될 대상은 내가 아니라 우리 자기야, 이토 소우타.”
“네. 물론 이기영 님께 드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부디 이 이상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 저희의 행동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손을 뻗어오는 모습은 가관.
신성제국의 권력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녀석의 손을 잡는 것밖에는 선택지가 없어 보인다.
못이기는 척 살짝 손을 내밀자 내 손을 꽉 쥐며 웃고 있는 놈의 표정이 보였다.
녀석이 한 가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면….
“합리적인 선택에 감사… 어?”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내 한쪽 팔이 정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함정 카드 발동이다, 이 새끼야!’
“아아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