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회귀자 사용설명서 125화
영혼의 단짝(2)
그 이외에 이 상황을 표현할 말이 없었다.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난 이지혜의 표정은 뭔가 후련한 듯한 느낌.
헐레벌떡 상급자를 찾으러 뛰어가는 경비들이 시야에 비쳤다. 아니나 다를까 내 쪽으로 다가온 이지혜가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 그럼 서로 생각하고 있는 걸 말해 볼까요? 방금 걸로 대충 눈치챘을 것 같은데… 정답이 조금 쉽나요?”
“응.”
“하나둘 하면 동시에 말하기로 해요.”
“…….”
“하나, 둘.”
“일단은 안전.”
“일단은 안전.”
“통했네요. 여론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죠?”
“물론.”
“율리에나를 돌려받는 게 첫 번째예요. 오빠는 피해자잖아요? 사실 돌려받는 게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차선책으로는 신성제국에 있는 유력한 권력자에게 도움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빅터하르트.”
“알고 있는 사람이예요?”
“희라 누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신성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무인이고… 이 사람 정도만 되도 우리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거야. 아니, 오히려 충분하다 못해 넘치지.”
당연하지만 나와 이지혜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안전이 아니다. 정말로 원하는 것은….
‘여론을 뒤집는 것.’
그게 첫 번째 목표다.
아주 작은 것으로도 변화는 온다.
갑작스러운 살인 사건으로 왕성 내에 여론이 집중되고 있는 상태.
내가 경비들에게 감금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그다지 기분 좋은 소식이 아니다.
‘그렇지만….’
보호받고 있다는 인식이 깔린다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경비들이 이쪽을 감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국 최고의 무인이라고 할 수 있는 빅터하르트가 이쪽을 보호한다는 것.
달라붙는 대상이 달라지는 것뿐이지만 겨우 이것만으로도 여론은 손바닥을 뒤집듯 바뀌게 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쪽은 오빠 쪽이니까요.”
“아주 위험한 상태니까. 어쩔 수 없지. 용병여왕이나 무녀의 보호를 받는 것도 효과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신성제국 쪽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게 보여주는 쪽으로는 효과가 클 거야. 언제 야마토의 암살자가 올지 모르니까 그걸 빌미로 찔러보는 게 낫겠네.”
“린델 쪽도 건드릴 생각이죠?”
“정답.”
“언론을 이용하면 반일감정을 키우는 건 일도 아니지만 이건 이거대로 걱정되기는 하네요.”
“린델 테러 사건의 주범이었던 야마토 길드가 죄 없는 파란의 길드원 이기영을 핍박하고 위협했다. 그 과정에서 피치 못할 사건이 일어났고 죄를 뒤집어 쓴 피해자가 오히려 재판을 받게 될 위기에 몰렸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아니면 조금 더 자극적으로 단두대에 올라갈 위기에 처해 있는 죄 없는 한국인. 이런 건 어때?”
“나쁘지 않겠네요. 근데 이거 파장이 생각보다 엄청날 거예요. 그건 알고 있죠?”
“물론. 애초에 노린 게 그건데, 뭐. 나를 처벌하는 건 곧 린델을 처벌하는 게 될 거야.”
“분란을 싫어하는 신성제국의 입장에서는 오빠를 건드리기가 지금보다 더 꺼림칙해질 거고요. 자기 목숨 하나는 제대로 챙기시네요. 그 점이 조금 마음에 들지만….”
“취향 한번 이상하네.”
“말했잖아요. 야망 있는 남자가 취향이라고 기왕이면 오빠 같은 더러운 권력자가 좋다니까.”
“피차일반이야.”
“이쪽은 건드리기 조금 꺼림칙하긴 한데… 뭐, 오빠가 죽는 것보다는 전쟁이 일어나는 게 낫겠죠.”
“전쟁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게 아니야.”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는 한데… 뭐 생각해 보니 제가 알 바는 아니네요. 사실 오빠 혼자 준비했어도 별로 상관없을 것 같았는데 굳이 대리인으로 저를 내세워서까지 일을 벌이려는 걸 보면 따로 생각이 있기는 있나 봐요?”
“물론. 미안하지만 조금 수고해 줬으면 좋겠어.”
“안 그래도 그럴 예정이었어요, 오빠. 사실 피해자가 직접 나서는 것 보다는… 대형 길드의 대리인이 나서는 게 더 효과적이니까요. 푹 쉬고 계세요.”
“안 도와줘도 괜찮겠지?”
“물론이죠. 이런 일은 혼자가 더 편하거든요.”
당연하지만 이지혜가 유능하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내 손을 타지 않는 일이다 보니 조금은 불안한 것이 현실.
특히나 우리 희라 누나의 오랜 친구인 빅터하르트를 끌어들이는 건 조금은 도와줘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틀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이지혜가 가진 컴플레인 능력의 위대함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내 의뢰인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당신들이 책임질 거야? 아니 이미 생긴 것 같은데….”
‘옳지.’
“아. 켄드릭 님이시라고요? 당신이 이곳의 책임자입니까?”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반 감금 상태에 대한 정신적 피해는 어떻게 보상해 줄 겁니까? 켄드릭님?”
‘최고다, 이지혜.’
“야마토 길드에 대한 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까?”
‘지혜 누나! 파이팅!’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신성제국의 앞잡이들을 털고 다니는 이지혜의 모습은 이전 삼국시대의 여포를 보는 듯한 착각을 하게 할 정도.
예상은 했지만 밑바닥에서부터 털어나갈지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사실 켄드릭과 경비들에게는 미안한 것이 사실.
이들이 얼마나 나를 신경 써주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에게는 죄가 없지만 이지혜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피해자는 우리다.’
라는 것을 강력하게 어필하고 있는 것.
야마토 길드의 이토 소우타가 모종의 이유로 파란의 이기영을 암살하려고 하고 있다는 헛소문을 왕성 내에 뿌림과 동시에 시작된 이 언론 플레이는 무척이나 효과적이었다.
아니, 단순히 효과적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하다.
검은백조의 유력 간부가 나를 변호해주고 용병여왕이 나를 보호해 주며 무녀가 계속해서 이쪽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준다는 상황 자체가 저들에게는 달갑지 않을 것이다.
키워드로 잡고 있는 것은 안전, 위협, 목숨.
‘확실히 능력이 좋긴 좋아.’
내가 간지러운 부분을 어떻게 이렇게 긁어줄 수 있는지 놀라울 지경.
덕분에 나는 내가 개인적으로 벌이고 있는 일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아마 이지혜가 아니었다면 야마토 길드를 상대하는 데 조금 더 힘을 들였어야 했으리라.
“의뢰인이 무척이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을 고려해 저희 쪽에서도 최대한 편의를….”
“편의를 봐준다는 게 겨우 이 정도 입니까? 저희 검은백조 길드의 사제가 내놓은 소견서를 확인해 보시면 의뢰인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지 나와 있습니다. 이후에 트라우마를 생각했을 때 당신들이 얼마나 제 의뢰인을 압박하고 핍박했는지….”
“그렇지만….”
“말씀드린 율리에나는 어째서 이렇게 늦는 겁니까? 혹시나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군요.”
“지금 방안을 찾고 있는 도중입니다. 상층부에서도 여러 가지 회의를 하고 있는 도중이라서… 조금만 더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실 생각이십니까?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혹시나 율리에나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요?”
“무구는 아무런 이상도 없습니다.”
“그건 저희가 확인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켄드릭 님.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율리에나는 제 의뢰인 개인의 사유 재산이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이미 한 번 위협을 받은 상황에 두 번째 위협이 없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사건 정황상 야마토 길드에서 제 의뢰인의 목숨을 위협하려고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어떻게든 해결해 주시는 게 좋을 겁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저희가 24시간 경비를 서고 있습니다.”
“이토 소우타가 의뢰인의 목숨을 해치러 온다고 가정했을 때 당신들에게 그를 막을 수 있는 힘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례되는 말이지만 신성제국의 몇몇이 그들과 결탁하고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해 봤을 때 조금 더 확실한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 이 말입니다. 빅터하르트 님께 요청드린 보호 조치도 아직이다. 율리에나를 돌려받은 것도 안 된다고 하시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겁니까?”
“그것은….”
“이대로 흉수들이 찾아오면 목을 빼놓고 죽으라는 겁니까? 정식으로 보호를 요청한 지 벌써 18시간이 지났습니다. 저희 의뢰인은 지금도 무척이나 불안해하는 상태입니다.”
“그게, 그러니까….”
“빅터하르트 님에 대한 요청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용병여왕님께서도 심히 걱정하시고 계십니다. 자꾸만 자리를 비워야 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데 왕성 안에서 살해 위협을 받고 있는 피해자의 대한 신변보호가 이렇게 미비하다니요. 마음 같아선 의뢰인을 지금 당장 린델로 데려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희 쪽에서도 최대한 요청을 해 드리고 있습니다. 아, 알고 계시겠지만 빅터하르트 님께서도 무척이나 바쁜 상황이신지라….”
“혹여 말로만 요청을 드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
이지혜도 열심히 해주고 있지만 아마 차희라 역시 오랜 친구인 할아버지에게 은근슬쩍 청탁을 넣고 있는 것이 당연.
내 생각보다 조금 더 늦어지는 것 같아 초조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거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예상했던 대로 첫 번째 조각이 완성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허,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켄드릭 님!”
무척이나 행복해 하는 경비의 표정.
식은땀만 흘리고 있는 켄드릭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그 동안 이지혜와 대리인단에게 시달린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리라.
“빅터하르트 님께서 직접 이기영 님을 보호 조치해 주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율리에나 역시 오늘 중으로 다시 반출될 예정입니다.”
“수고했다.”
“아닙니다. 켄드릭 님.”
“다행이로군요, 이지혜 님. 허가가 떨어진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빅터하르트 님께서 정식으로 이기영 님을 보호할 것입니다. 들으셨던 대로 저주를 내리는 검에 대한 조사 역시 끝났기 때문에 일단은 돌려드리겠습니다만… 일부 구역은 반입이 불가 한 점에 대해서는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특히 빅터하르트 님과 떨어져 계실 시에는 율리에나를….”
“야마토 길드의 길드원들을 이쪽과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이 먼저입니다, 켄드릭 님. 그들은 틀림없이 제 의뢰인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억압받아야 하는 건 이기영 님이 아닌 그들입니다.”
“네. 최대한 힘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율리에나를 돌려받은 것보다 더 한 성과를 얻어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온 이후 방 안으로 들어온 이지혜가 살짝 입꼬리를 올린 것이 보였다.
“수고했어.”
“율리에나까지 돌려받을 수 있을지는 몰랐는데 성과가 나쁘지는 않네요. 앞으로는 빅터하르트 님이 오빠를 보호할 거예요.”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소리네.”
애초에 우리가 이곳에 온 이후로 가장 신경을 쓰던 일 중에 하나가 마무리 됐다.
“움직임이 조금 제한될 수 있다는 건 걱정되기는 하지만 나쁜 거래는 아니야. 어차피 우리 지혜 누나가 움직이고 있는 상태고 내 쪽에 빅터하르트가 달라붙어 있다는 건 오히려 이쪽이 계획하고 있는 일에 도움이 되거든.”
“아직도 알려주지 않을 거예요?”
“나만 알고 있는 게 좋아. 그게 더 효과가 좋거든. 일이 진행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섭섭해라…. 뭐, 아무튼 들으셨던 대로 제한구역 역시 조금씩 풀리기 시작할 거예요. 빅터하르트 님과 함께 나간다면 사교회나 예배를 드리는 것도 가능할 테고.”
“혹시 빅터 할배는 야마토와 접전이 없나?”
“알아본 게 조금 있는데… 말씀드려요?”
“물론.”
“신성제국이 황제파와 교황파로 분리되어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그 할아버지는 골수부터가 황제 쪽이에요. 교황쪽에 달라붙어 있는 야마토와는 앙숙이면 앙숙이었지 좋은 관계는 아닐 거예요.”
“뭐, 흥미로운 이야기네. 린델 쪽은 어떻게 됐지?”
“나쁘지 않아요. 반일감정 일으키는 건 누워서 떡먹기죠, 뭐. 막말로 오빠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전쟁이라도 일어날 기세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마 그 할아버지가 오빠 쪽에 붙은 이유로 린델의 배경이 어느 정도 깔려 있을 거예요.”
“린델 쪽의 여론도 계속해서 파악해 줘.”
“시키지 않아도 척척 진행되고 있으니까 급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되요. 그것보다 슬슬 밖으로 나가보셔야 되는 거 아닌가요? 저쪽도 열심히 작업치고 있던데… 교황청 쪽으로는 제가 작업을 치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먼저 자리 잡은 쪽이 저쪽이라 그런지 한계가 보이거든요.”
“황제 쪽은 이쪽에서 하나둘 접선해볼게. 대리인단 구성은 아직이지?”
“제국 쪽 인물들의 포섭이 아직이에요. 이건 오빠한테 맡길게요. 어차피 그 사람이랑 같이 다니면 알아서 사람들이 달라붙을 테니까. 어렵진 않을 거고… 기왕이면 빅터하르트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겠네요.”
“이미 희라 누나와 친한 것 같아 보이던데…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야.”
“흐음… 그럼 내일은 파티에 나오시는 건가요?”
“아마 그렇게 되겠지.”
“살인범이 호위무사까지 대동하면서 파티에 참석하다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나는 어디까지나 피해자인데… 자랑스러워해도 돼. 누나가 이룩한 결과물 이니까.”
희미하게 미소 짓는 이지혜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