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회귀자 사용설명서 123화
뒤통수
사람을 약 올리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녀석을 눈에 담는 순간 그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짜증 나는데….’
동족혐오인지는 모르겠지만 놈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짜증이 치솟는 것은 순식간.
이렇게 1차원적인 함정에 걸려들게 될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율리에나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
나에게 위험이 생기면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율리에나의 기능을 이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녀석의 똘마니가 한 명 죽기는 했지만 지금부터 일어날 일에 비하면 남는 장사일 터, 아니, 애초에 똘마니가 맞는지 아닌지조차 불명확하다.
이 일이 본래부터 계획되어 있었던 건지 나와 만난 순간 이 일을 꾸민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사실 하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아직 끝이라고 할 수는 없는 부분.
어이없게 당하기는 했지만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고였다는 것은 내 옆에 있는 카스가노 유노가 증언해 줄 수 있다.
조사관들에게 율리에나의 기능을 설명하는 것 역시 도움이 될 것이다.
‘율리에나의 대한 정보를 풀 수밖에 없나.’
내 입장에서는 조금 짜증 나는 일이기는 하지만 녀석의 뒤통수를 때릴 수 있다면 나쁜 거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닐 게 분명.
만약 놈이 신성제국의 윗대가리들과의 커넥션을 미리 만들어 놨다고 가정한다면 이후에 있을 논쟁에서 분쟁이 생길 여지가 있다.
재판이 열린다면 이쪽이 불리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
어떻게 변명해도 이쪽이 저쪽의 똘마니를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녀석이 정말로 나와 성향이 비슷하다면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내놨을 것이 자명한 일.
만약 시나리오를 전부 짜놓지 않았더라도 지금부터 큰 그림을 위한 설계에 들어갈 것이다.
‘나였어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녀석의 계산 외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사랑스러운 무녀 카스가노 유노가 이쪽의 편을 들 거라는 것 하나뿐이겠지만 그것마저 대처할 가능성이 크다.
머릿속으로 일어난 상황을 정리해 보고 있는 사이, 바로 앞 쪽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아끼는 부하가 죽었습니다. 신성제국의 왕성에서 말입니다.”
“웃기는 소리 집어 치우세요, 이토 씨. 먼저 살기를 내뿜어 제 손님을 위협한 것은 당신의 부하입니다. 이 사건은 정당방위로 처리될 겁니다.”
“이건 좀 의외로군요, 무녀님. 저희 사이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건 당신 혼자만의 생각일 뿐입니다. 당신의 부하가 제 손님을 위협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정확히 어떻게 위협했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아니, 설사 위협했다고 하더라도 단순한 위협만으로 다짜고짜 검을 날리시다니요. 누가 봐도 피해자는 저희 쪽에서 나왔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겠습니다만 최소한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판단하셔야 될 겁니다. 그게 무녀님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입니다. 물론 당신의 휘하에 있는 요조라에게도 도움이 되는 행동이지요.”
“당신….”
카스가노 유노는 믿을 수 있는 아군이다.
놈이 저렇게 꾀어내려고 한들 꾀어 낼 수가 없는 이쪽의 우방, 그녀와 그녀의 길드 요조라는 최소한 이쪽을 전력으로 변호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
살짝 율리에나를 바라보니 자신이 뭔가 잘못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지 이쪽을 맴돌고 있는 모습.
기가 죽은 것 같아 보이는 검을 다시 허리춤에 가져간 이후에 곧바로 말을 이었다.
“일단은 사과드리겠습니다.”
“단순히 사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기영 씨.”
“제가 가지고 있는 무구, 저주를 내리는 검 율리에나는 주인을 위협하는 행동에 반응하여 움직이는 에고 소드입니다.”
“아아아아. 그렇군요. 그런 무구도 있었군요.”
“알고 계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군요.”
“물론 린델의 한 모험가가 전설 등급의 무구를 얻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그게 이 무기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틀림없이 알고 있었다.
소문으로 들었는지 아니면 본인이 직접 확인한 건지에 대해서는 미지수지만 일단 저 얄미운 자식이 린델 테러사건의 주범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아니라면 나에게 작업을 칠 이유는 없을 테니까.’
“네. 어째서 그쪽의 길드원이 저를 위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희 길드원은 당신을 위협한 적이 없습니다.”
“아뇨. 틀림없이 위협했습니다. 만약 이 사건을 법정으로 끌고 가도 저는 당신의 길드원이 제 손님을 위협했다고 증언하겠습니다. 당연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저희 길드원들 역시 같은 증언을 할 것입니다.”
‘주인님 힘난다! 유노야!’
“무녀님이 그렇게 증언하고 말고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조금 이상하군요. 지금은 틀림없이 자신의 검을 제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만약 당신의 증언대로 이쪽이 먼저 위협을 했다고 하더라도 제 충성스러운 부하가 죽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어째서 제 부하 녀석이 살기를 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동료를 죽인 살인범과 기영 님이 조금 닮아보여서 자신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나 봅니다.”
“…….”
“겨우 그것 가지고 목에 검이 박히게 되다니… 이렇게 불쌍한 경우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무기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것도 죄라는 겁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찢어지는군요.”
‘이 새끼….’
계속해서 피해자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보면 마음을 먹어도 어지간히 먹은 모양.
어떻게 해서든 간에 이쪽에게 가해자 프레임을 씌우고 싶은 거라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확 받아버려?’
자해 정도라면 이쪽도 가능하다.
지금 뒤져 있는 놈의 칼로 이쪽의 배를 한 번 쑤시면 확실한 정당방위가 성립.
문제는 눈앞에 있는 녀석이 쉽게 길을 열어주지 않을 거라는 것에 있다.
민첩 능력치 99의 움직임은 내가 스스로 내 배에 단검을 꽂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선택지는 제한적, 모함을 외치는 앵무새가 되기는 싫지만 찔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애초에 제 갈 길을 가려고 했던 저를 붙잡아 세운 것은 소우타 님이 아니십니까. 갑작스레 사고가 일어났습니다만 혹시 뭔가 다른 뜻이 있어 길드원 중에 한 명을 희생시킨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이 되는군요.”
“그럴 리가요. 상상력이 풍부하십니다.”
“상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말씀 드린 것뿐입니다.”
“쓸데없는 음모론은 제국의 조사관에게 설명해 주시면 됩니다. 일단은 왕성 안에서 사람이 죽었으니 절차는 밟아야겠지요. 아, 마침 저기 오는군요.”
담담한 척했지만 속이 뒤틀린 것은 당연지사.
무장한 왕성 내 경비들이 이쪽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용의자 취급을 받는 것도 놈이 준비한 덫에 걸려들었다는 것도 짜증난다.
“무슨 일입니까?”
경비의 목소리에 대답한 것은 무녀. 두 번째로는 녀석이 대답했고 그 다음으로는 내가 말을 이었다.
“야마토 길드의 길드원이 이기영 씨를 위협했고 그에 대한 정당방위로 목에 검이 꽂혀 죽은 것이 전부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위협한 것은 아닙니다. 서로 잠깐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다짜고짜 이쪽으로 검을 날리더군요.”
“제 검은 위협에 발동하는 무구입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아이템 정보는 확인시켜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야마토 길드의 길드원에게 위협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 사실은 요조라 길드의 카스가노 유노 님과 그녀의 길드원들이 증언할 것입니다.”
당연하지만 양측의 주장이 다르다.
서로 귓속말을 한 이후에 어디론가 뛰어가는 것을 보니 상급자라도 불러올 모양.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더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녀석 한 명이 황급하게 다가온다.
심지어 녀석의 권한도 아닌지 녀석 역시 서둘러 뛰어가기 시작.
사건이 점점 커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 이토 소우타가 바라는 상황일 터, 복잡하게 돌아가고는 있지만 지금부터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에 대해서 생각하자 머리가 아파왔다.
‘아마 조사를 시작하겠지.’
물론 용의자는 나다.
이유야 어찌됐건 무슨 사건이 터졌던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던 간에 신성제국 베니고어의 왕성 내에서 사람이 죽었다.
우리들이 자유민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엄연히 우리들도 제국법에 영향을 받는다.
제국에서 길드와 길드간의 지나친 분쟁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살인을 저지른 나는 일단 용의자 취급을 받을 것이다.
소우타의 말대로 그게 바로 절차라는 거다.
예상대로 슬그머니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화려한 복장의 남자 한 명이 시야에 비쳤다.
‘제국민.’
“제국 내에 소속된 신성 기사단의 칼리튼이라고 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잠깐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
‘역시.’
짜증 나지는 하기만 아직은 괜찮다. 셋의 증언이 다른 지금, 이토 소우타 역시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당장에는 피해자의 신분으로 조사를 받을 것이 분명하지만 우리의 무녀님의 증언이 있다면 살인자라는 여론은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다.
‘게다가.’
지금 눈앞에 있는 칼리튼이라는 남자의 태도로 미루어 봤을 때 아직 이쪽을 완벽히 용의자로 확정지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존중하고 있지.’
물론 감금되다시피 한 이후 조사를 받는다는 건 변함이 없지만 충분히 뒤집을 수 있다.
“네. 알겠습니다.”
대충 대답을 한 뒤에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을 때였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고 있는 카스가노 유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평소와 조금 다르게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움직이지 마라.”
“음?”
“내 손님을 데리고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네놈들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이 되어 땅바닥을 기어 다니게 될 것이다. 분명히 저자들이 내 손님을 위협했다고 말하였다.”
땅이 부르르 떨려온다.
아까 전에 눈으로 확인했던 정체불명의 주문진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
감은 눈을 치켜뜨자 마치 블랙홀 같은 눈동자가 시야에 비쳤다.
누가 봐도 거대한 마력을 품고 있는 그것은 내가 느끼기에도 이 주변 일대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정도.
침을 꿀꺽 삼켜 넘길 수밖에 없었다.
“무녀….”
심지어 재수 없는 녀석 역시 침을 삼키며 자신의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기 시작.
지금 이 상황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내 손님을 붙잡고 있는 더러운 손을 치워라.”
“…….”
“내가 치우라고 말하였다.”
‘이건 안 좋은데….’
나를 변호해 주는 것은 괜찮지만 소란을 피우는 것은 더 좋지 않다.
신성기사단의 칼리튼이라는 녀석 역시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
최대한 얼굴을 찡그린 채로 이쪽을 바라보며 검을 뽑고 있다.
“이, 일단은 절차에 맞게 행동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왕성 내에서의 이런 종류의 마법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당신이라고는 해도….”
“나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내가 정리하는 것이 맞다.
“괜찮을 겁니다, 유노 님. 일단은 간단한 절차의 조사를 받고 오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
마력이 가라앉기 시작하자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던 주변도 멈춘다.
“그렇지만… 기영 님….”
“별것 아닐 겁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만 증언해 주시면 됩니다.”
어차피 진실은 밝혀지게 되어 있다.
‘세상이 진실대로 돌아가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소우타의 표정은 그걸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쪽을 범인으로 몰아가려는 것 같은 느낌.
일단은 발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자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조사는 감금되어 받습니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절차상 조사를 하는 것뿐입니다. 당연하지만 최대한 편의를 봐드릴 수 있도록 배려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움직임에 제한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은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네. 물론입니다.”
“야마토 길드 쪽과 저곳에 있었던 이들 모두 조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저와는 조금 입장이 다르겠죠?”
“죄송합니다만 그렇습니다. 일단은 살인 사건인 만큼….”
“그렇군요. 대리인을 통해 증언하는 것도 가능합니까?”
“네. 물론 가능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시죠.”
* * *
“엣취.”
“감기라도 걸렸니?”
“아뇨, 언니. 죄송해요. 갑자기 재채기가 나와서요.”
“요즘 조금 무리한 것 같더라니…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네가 먼저야. 뭐, 오랜만에 쉬라고 함께 데려온 거니까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쉬도록 해. 그보다 수도는 어떤 것 같아?”
“살기 좋은 것 같네요. 처음 온 것 치고는 나쁘지도 않고 사람들의 눈에 생기가 보여요. 신성제국의 문명 수준이 이 정도로 높을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생각보다 체계적이라 깜짝 놀란 거 있죠?”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그보다 언니, 오늘따라 화장 진짜. 잘 먹으셨다.”
“얘도 참….”
“아니 그것보다는 피부가 좋아진 건가? 언니, 요즘 남자 만나요?”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겠니? 바빠 죽겠는데… 아니, 나보다는 네가 연애 중인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어? 뭐 이미 다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소개시켜 주면 참 좋을 텐데….”
“조금 더 사이가 진전되면 말씀 드릴게요. 오빠가 조금 사정이 있어서요.”
“하긴. 아, 이제 도착이네.”
“…….”
“…….”
“검은백조의 여러분들 신성제국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박연주 님은 오랜만이군요.”
“네. 오랜만입니다.”
“허허. 오늘은 처음 보는 얼굴도 보이는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성함을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지혜야?”
“네, 언니.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번 튜토리얼 때 검은백조 길드에 입단하게 된 이지혜라고 합니다. 명예롭고 위대한 신성제국의 제국민 여러분들을 이렇게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