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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17화 (116/1,590)

# 117

회귀자 사용설명서 117화

수도로(2)

김현성의 표정은 무척이나 필사적이었다.

제발 정하얀을 데리고 가달라는 표정, 어차피 정하얀이 이곳에 있어봤자 업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지력은 높지만 정하얀의 업무 능력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그나마 나와 함께 있다면 능률이 올라갈 수는 있겠지만 내가 없는 곳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길드를 시끄럽게 만들게 분명하다.

이미 한 번 내가 없는 원정을 나가본 김현성은 내가 없는 정하얀을 통제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느껴본 바가 있다.

하루 종일 울고 지치고 잠들고를 반복하는 것은 물론 히스테리가 담긴 돌발 행동까지.

행정 능력이 후달려 일을 처리하기 바쁜 김현성이 정하얀까지 케어해 줄 수 있을 리가 만무.

박덕구가 입을 열었을 땐 반갑기 까지 했을 것이다.

‘이… 나쁜 놈.’

문제는 이쪽도 정하얀을 책임지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

‘사교계야.’

차희라의 정부로서 참가하는 사교 파티에 정하얀을 끼고 가는 것 자체가 무리수다.

신성제국의 귀족이나 귀부인들을 상대로 열심히 입을 털어야 하는 상황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물론, 차희라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행동에도 제한이 생긴다.

그나마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휴가가 무너지기 일보 직전.

조금의 반항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함께하는 것 자체는 좋을 것 같지만 보시다시피 하얀이가 조금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오랜 여행을 견딜 수 있을지가 걱정됩니다.”

“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복통을 호소했었습니다.”

“지금은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정하얀!’

평생 엄살을 부리며 칭얼대는 기회를 날리면서까지 당장의 쾌락을 좇겠다는 심보.

방금 전에 아픈 척했던 것이 거짓말 같다.

‘머리를 굴려야 해.’

“아냐, 하얀아. 그래도 안정기가 필요하니까….”

“거, 누님은 형님 옆에 있을 때가 가장 안정되는 거 아니요.”

“마, 맞아요. 덕구 오빠.”

시간이 너무 짧다.

이미 떠나기 전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최대한 정하얀과 같이 가지 않는 쪽으로 설계하고 싶었지만… 무논리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거, 원래 사랑이라는 게 가장 달콤한 회복약이요. 만병통치약이다! 이 말이요!”

‘그게 무슨 논리야.’

“아니예요. 덕구 씨. 사실 기영 씨 말이 맞아요. 몸은 완전히 회복했지만 그래도 안정기라는 게 필요할 거예요. 몸이랑 마력은 이상이 있는 걸로 보이진 않지만….”

“그래서 필요한 게 마음의 안정이라는 거 아닙니까. 희영 누님.”

정하얀이 일어난 순간부터, 아니, 심지어 차희라와의 수도행이 결정된 이후부터 이 치밀한 설계가 계획되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 발언을 무시하는 박덕구의 탱킹력과 치고 들어오는 김현성의 공격력에는 속수무책.

가끔씩 터져 나오는 정하얀의 마법 같은 발언은 이상할 정도로 신뢰를 받고 있다.

이쯤 되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미 확정된 사안을 되돌릴 수는 없는 분위기.

“…….”

이미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

조금은 참담한 심정으로 말을 꺼내는 것이 유일한 정답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어쩔 수 없군요. 함께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큼….”

“잘 생각하셨습니다.”

“나이스! 누님!”

“헤헤….”

패자는 고개를 숙이고 승자는 축배를 든다.

한숨이 나오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 기왕 이렇게 된 것 정하얀을 잘 교육시키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

‘특히 차희라에 대해서 교육시켜야겠지.’

“떠들다 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기영 씨와 하얀 씨 슬슬 출발할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네. 아 그전에 잠깐 인수인계를….”

“아. 그렇군요. 짐은 전부 챙겨 놓으셨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곧바로 가지고 내려오면 됩니다.”

마음 같아서는 인수인계도 하지 않고 도망치고 싶지만 어차피 내가 없는 동안 일이 잘 되어 있지 않으면 수습하는 것도 내 역할이다.

이미 대부분은 황정연에게 말해놔서 괜찮기는 하지만 그래도 김현성이 직접 듣는 것과 직접 듣지 않은 것은 차이가 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미리 작성해 둔 서류를 보이며 설명을 시작하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 지력이 낮지는 않으니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현성이는 멍청하지 않으니까.

뭐, 사실 그렇게 크게 할 일이 많지도 않다.

“그렇게 크게 할 일은 없을 겁니다. 새로운 인원도 뽑았고 업무 분담 역시 확실히 재정립되어 있는 상태니까요. 아마 분류된 서류를 정리하고 이해하는 일이 전부일 겁니다. 그리고 최종 책임자로서의 결정이나 확인해야 할 일을 확인해 주시면 됩니다.”

“네.”

“연금 기획실은 정연 씨에게, 제국 법무팀은 새로 들어온 김미영 팀장에게 보고를 받으면 됩니다. 사업부에게 맡긴 일은 가이드라인을 전부 짜 두었으니 생산 라인과 유통 라인을 전부 확인해 주시고… 체크해 놓은 것을 직접 확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위기 대책 위원회의 제반 사항을 전부 점검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는 동안에도 김현성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

아마 내가 해놓은 일이 무척 많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유능하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사실 유능도 뭣도 아니고 그냥 길드직원과 나를 갈아내며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일을 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우리 회귀자에게 유능함을 어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새로운 인력들을 뽑기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의 결과를 만들 수 없었던 것이 현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까닭은 우리의 충실한 노예들이 힘써줬기 때문이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김현성이 나를 유능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부분.

굳이 내 공을 노예들의 공으로 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김미영 팀장은 직접 챙겨주면 되는 거니까.’

“대충….”

“네. 이해했습니다.”

이쯤 되니 김현성의 얼굴에도 슬그머니 죄책감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정하얀을 이쪽에 떠넘기는 걸 미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알면 됐다. 이미 용서했다, 현성아.’

“그… 감사합니다.”

“대부분의 플랜이나 가이드라인은 정연 씨가 알고 계실 겁니다.”

기억력 좋은 인간 컴퓨터와 함께 업무를 보시면 됩니다. 라고 마무리 하고 싶지만 괜스레 황정연에게 미안해져 애써 목소리를 삼켜 넘겼다.

여러 가지 설명을 함께 동반하며 설명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나 흘렀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이것저것 꼬집어 주고 싶었지만 더 이상 차희라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현성 씨.”

“네. 돌아오실 때 즈음이면 조금 여유로워지겠군요. 물론 업무 쪽의 이야기입니다.”

“본의 아니게 일을 떠넘긴 듯한 느낌이 들어 죄송하군요.”

“죄송할 필요 없습니다. 파란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저도 할 일이 조금 많았지만… 덕구 씨나 예리의 훈련도 그렇고… 원정이나 의뢰를 함께 해야 할 새로운 파티원들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으니까요.”

“하하하하하.”

“감사합니다.”

“아뇨.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너무나도 훈훈한 작별 인사에 혹시나 이쪽에 사망 플래그가 꽂힌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는 했지만 아마 별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파란은 여느 때와 같이 이전의 피해를 복구하고 길드를 정상으로 돌리는 데 주력할 것이고 박덕구는 그저 그런 성장을, 잠재 능력이 뛰어난 김예리는 폭발적인 성장을 할 것이다.

린델은 계속해서 활기찰 거고 인재들은 파란으로 몰려드는 것이 당연.

어쩌면 김현성이 알고 있는 미래의 인재가 길드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조금은 그윽하게 바라보는 김현성을 보니 녀석 역시 이쪽에 꽤나 정이든 모양.

나 자신이 정이 많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윽하게 보지 마. 형도 네 마음 이해한다. 새꺄.’

슬쩍 손을 내밀자 김현성 역시 내 손을 맞잡아 왔다. 간단한 악수, 너무 간단하지 않나 싶어 포옹이라도 해야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슬쩍 가까이 다가갔지만 왠지 모르게 어색한 듯한 느낌.

내 모습을 보고 살짝 입꼬리를 올린 김현성이 먼저 이쪽의 등을 두드렸다.

‘잘생긴 새끼, 몸 한번 탄탄하네.’

김현성과 조금은 민망한 인사를 거친 이후에는 박덕구가 슬그머니 다가온다.

“형니임….”

안아 달라는 듯 활짝 팔을 벌리는 놈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친 이후에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녀석과도 포옹할 생각은 없다. 안기면 아플 것 같으니까.

“항상 기억해라, 덕구야. 내가 하면 너는 더 잘할 수 있다.”

“매일 가슴에 새길 거요.”

“그리고 정연 씨랑 밥 한번 같이 먹어주고. 너랑 자리 한번 만들어 달라고 매일 성화더라.”

“엇!?”

“희영 씨도 잘 지내셔야 합니다. 얼마 걸리지는 않겠지만….”

“네. 기영 씨도 열심히 일하고 오세요.”

“제가 없는 동안 봉사 활동은 금지입니다. 돌아온 다음에는 계속해서 아름다운 린델을 만들어 가도록 합시다.”

“네….”

“꼬맹이 너도.”

“응. 아저씨도 잘하고 와….”

가방을 들고 있는 정하얀을 바라보자 혹시나 자신을 버리고 가는 것은 아닌지 후다닥 이쪽의 옆에 붙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길드 하우스의 문을 여니 기다리고 있는 것은 붉은 머리의 차희라.

그런 그녀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녀의 뒤에 있는 짐승이다.

“어?”

새의 머리, 짐승의 몸에 커다란 날개를 달고 있는 동물은 신화 속에서나 들어봤던 괴물.

“그리폰?”

“린델 내에서도 두 마리밖에 없는 동물이야. 너무 먼 거리를 이동할 때는 이 녀석만 한 게 없거든. 신성제국에서도 양산하고 싶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개체고… 그만큼 귀하지.”

“아….”

“3명이서 갈 줄은 생각 못했는데… 우리 붕붕이가 좋아할지 모르겠네. 본래는 2명이 타는 게 적당하거든.”

“붉은용병에 다른 인원들은 가지 않는 겁니까?”

“나머지 인원은 뒤따라 올 거야. 육로로. 일단 먼저 가 있는 게 편하지 않겠어? 기왕 수도에 갔는데 즐길 건 즐겨야지. 빨리 올라타. 내가 첫 번째, 우리 자기가 두 번째, 저기 있는 세컨드가 마지막 자리에… 혹시나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꽉 잡는 게 좋겠네.”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 슬그머니 올라갔지만 왠지 모르게 적응이 되지 않는다.

무서운 것이 당연.

일단 이 괴물의 등 위에 올라가 있는 것 자체가 뭔가 떨린다.

자연스럽게 차희라의 허리를 꽉 잡을 수밖에 없는 상황.

뭔가 좋은 냄새가 나는 것은 물론, 뭔가 부드러운 것이 닿는 것 같은 느낌은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위에 취할 수 있는 여유는 없었다.

“이이이익….”

‘아파.’

“이이이이익!”

정하얀은 그게 또 분한지 내 허리를 붙잡으며 차희라에게서 나를 떨어뜨리려고 하고 있다. 내가 차희라에게서 떨어지면 우리가 함께 땅바닥으로 떨어진다는 생각은 못하는 모양이다.

‘떨어지면 둘 다 죽는다, 하얀아. 제발 그만 잡아당겨.’

벌써부터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

천천히 그리폰이 공중으로 떠오를수록 이쪽에 손을 흔들고 있는 길드원들이 작아지는 게 보였다.

미처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한 황정연과 이상희 역시 창문을 통해 슬그머니 인사를 해온다.

여러 가지로 이쪽을 도와줬던 박중기나 김미영 팀장도 마찬가지.

“작별 인사를 하는 게 조금 오래 걸리던데. 우리 자기, 그새 정이라도 들었나봐? 그런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누나. 나도 사람이야, 사람.”

“은근히 귀여운 면도 있었네. 조금 더 꽉 잡아도 돼. 세컨드도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그 말 그대로 최대한 딱 달라붙는 것이 좋다. 조금 긴장하며 손을 흔들고 있었을 때 아니나 다를까 아래쪽에서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형님! 누님! 거, 길드로 돌아올 때는 세 명이서 돌아와야 합니다!”

‘두 달도 안 걸릴 거다, 덕구야.’

2년 후에 온다고 하더라도 세 명이서 돌아올 일은 없으리라.

녀석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정하얀이 돌발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다짐하지 마라, 하얀아.’

저런 이상한 소리라도 확실히 배웅 받는다는 건 나쁘지 않은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박덕구가 린델에 처음 도착했을 때 했던 소리가 괜스레 떠오른다.

‘세상아, 박덕구가 왔다.’

자세하지는 않지만 아마 이런 종류의 외침이었던 걸로 기억.

하늘 위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째서 박덕구가 그런 말을 외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작아 보이네.’

끝없이 펼쳐진 대륙이 손바닥 안에 들어올 것처럼 작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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