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회귀자 사용설명서 116화
수도로(1)
“정하얀 님이 깨어나셨습니다.”
차희라가 길드를 나간 이후에야 들려온 소식이었다.
오랫동안 잠을 자고 있었던 정하얀이 드디어 몸을 일으킨 것.
타이밍이 조금 묘하기는 했지만 기쁘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때 당시 정하얀이 나를 막아줬던 기억은 아직까지 생생하다.
조금 웃기는 표현이기는 하지만 정하얀이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고생했지.’
내가 정하얀에게 빠졌다거나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그래도 정이 든 것은 사실.
물론 연애감정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이르지만 금수도 은혜를 안다.
이쪽의 목숨을 구해준 만큼 자연스럽게 호감을 가지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 잠깐 보러가는 게 좋겠군요.”
“네.”
“길드 마스터에게 인수인계는 제가 오늘 안으로 해놓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중기 씨, 미영 씨는 일을 전부 마무리 지은 이후에 제가 지시한 일들을 검토해 주도록 하세요.”
“네.”
김현성과 함께 고생해 줄 박중기와 김미영의 어깨를 두드린 이후에 조금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자 곧바로 정하얀의 병실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안이 조용한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내가 첫 번째인 것 같았다.
“하얀아.”
“아. 오…… 빠.”
사실 매일 봐왔지만 실제로 깨어 있는 모습을 본 것은 오랜만.
평소대로의 모습이었다. 이전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살짝 기가 죽은 것 같아 보였다는 것.
뭔가 겁을 집어먹은 것 같은 느낌에 어째서 그녀가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
그녀가 정신을 잃기 전 내가 했던 폭언 때문이었을 것이다.
너무 정신이 없어 비키라고 소리를 지르며 쌍욕을 했던 것으로 기억.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할 거라고 생각했다.
미움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하얀 역시 그때 당시 정신이 없는 상태였겠지만 아마 내가 말한 것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분명.
조금은 무서웠으리라.
왠지 모르게 조금은 어색한 상황에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를 하기에도 조금 민망했다.
‘어색해.’
정하얀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으리라.
그렇지만 굳이 말을 꺼낼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순식간.
살짝 팔을 벌리니 마치 고양이가 쥐를 향해 점프하는 것처럼 나에게 튕겨져 안기는 정하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흐으으윽… 오빠. 제성해여… 흐그윽.”
“아니야. 나야말로 고맙고 미안해.”
“오빠아으으응.”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가슴에 얼굴을 묻은 이후 얼굴을 부비는 것은 가관.
조금은 섬뜩하게 느껴졌던 평소의 행동도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귀엽다.
심지어 평소보다 더 건강한 모습을 보니 마음 한구석에 있었던 내 걱정은 기우였던 모양.
떨어질 생각이 없는 모습이 괜스레 부담스러웠다.
“많이 아팠지?”
상처가 많았던 등을 쓰다듬자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다.
혹시나 상처가 남았는지 걱정되는 것이 당연.
살짝 정하얀을 뒤로 돌려 윗옷을 들어 올리니 꺅 하는 기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처도 안 남았고.’
뭐라도 할 줄 알았는지 붉어진 얼굴로 뒤를 돌아보고 있는 표정. 심지어는 몸을 슬그머니 이쪽에 가져대는 것 같아 조금 민망했다.
당연하지만 엄한 의미의 등짝을 보자는 의도는 아니다.
다시금 그녀의 상의를 내린 이후니 지나치게 실망한 듯한 정하얀의 얼굴이 나를 반겼다.
“이제는 멀쩡하네. 다행이다.”
“아… 거,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오빠.”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다음부터는 그러면 안 돼, 하얀아.”
“네….”
“나는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 네!”
천천히 뺨을 쓰다듬자 경련이라도 일어난 듯 몸을 부들부들 떨어오는 모습은 겁먹은 동물 같다.
평소와 별로 다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정하얀이 이렇게 경기를 일으키는 것은 아마 평소와 조금 다른 내 눈빛 때문일 것이다.
진심으로 걱정스럽고 진심으로 고맙다.
조금은 기계적으로 스킨십을 했던 예전과 지금의 모습이 무척 달라졌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정하얀이 느끼고 있을 터.
아니, 그 누구보다 내가 더 잘 느끼고 있다.
정체모를 애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하얀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갑작스레 정하얀이 작은 비명을 내질렀던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음?”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배를 감싸 안은 것.
갑자기 이게 뭔 상황인지 어안이 벙벙한 것은 당연지사.
뭔가 고통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네. 괜, 괜찮아요.”
걱정하는 듯한 말투를 보내자 표정이 슬그머니 변하기 시작한다. 다시금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 보인 것이다.
‘얘 봐라….’
“정말로 괜찮아?”
“네. 오빠 괜찮아요. 배가 조금 아파서… 그 칼, 칼에 찔린 상처가… 자꾸 욱씬거려서….”
“희영 씨를 불러오는 게 좋지 않을까?”
“그,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 정도는… 그냥 아주 조금 고통이 느껴질 뿐이라서….”
꾸미고 있는 짓이 무척 앙큼하다.
걱정되는 것이 기분 좋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저주받은 신단 회귀 사건 이후에는 조금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었는데 뭔가 이상한 병이 또 도질 것 같은 느낌이다.
이대로 내버려뒀다간 자해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정하얀의 이상 행동은 초기에 잡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무척 짜증나는 것은….
‘마음 약해지네.’
저 어처구니없는 엄살에 자꾸만 반응하는 내 양심이었다.
‘진짜 아픈 건 아니겠지.’
그만큼 정하얀이 내 위에서 피를 쏟으며 나를 꽉 안아줬던 기억은 생생하다.
그 뜨거운 피도 그리고 지켜주겠다는 목소리도 말이다.
일부러 찡그린 저 표정에 설마 정말로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없게 느껴질 정도.
이번 한 번은 속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적어도 나 대신 칼에 찔린 정하얀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하는 게 맞다.
조용히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까의 포지션을 유지하자 다시 한번 몸을 부르르 떠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친다.
“아… 아파요.”
‘…….’
“역시 희영 씨를 불러오는 게 좋겠다.”
“아,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 정도는… 조금 쓰다듬어 주시면 그, 금방 나을 것 같아요. 오빠가 쓰다듬어 주면….”
이쯤 되면 내 대신 칼에 맞은 게 설계는 아니었는지 의심이 될 지경.
본인이 직접 입고 있는 옷을 살짝 들어 올리며 배를 내보이는 행동은 강아지가 따로 없다.
심지어 맨살을 쓰다듬어 달라는 주문이다.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내 반응을 살피는 게 눈에 보인다.
‘상이라고 생각해야 되나.’
아마 그게 맞을 것이다.
굳이 망설일 이유는 없다.
살짝 배 위에 손을 얹으니 곧바로 풀어지는 표정.
자기 딴에는 표정관리를 하겠다고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미 헤벌쭉한 얼굴로 변해 있다.
자꾸만 아프다고 칭얼거리고 있었지만 이미 보여주고 있는 표정은 아픈 사람이 아니다.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옳으리라.
“이제 좀 괜찮아?”
“조, 조금 더 아래가… 아픈 것 같아요.”
“여기?”
“조금 더 아래요.”
“여기 즈음?”
“조, 조금 더 아래예요.”
‘시바… 어디까지 내려가는 건데….’
“조금만 더 아래… 조, 조금만 더….”
‘그만 내려가….’
“거기서 조금만 더 아래예요.”
‘그만.’
뭔가 조금 발전했다.
지금까지는 무식한 방법으로 내 쪽을 향해 돌진만 해왔다고 한다면 지금의 정하얀은 뭔가 수작을 부리는 것 같은 진화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
아니, 틀림없이 변화하고 있다.
애초에 내 동정심에 호소해 이런 일을 꾸민다는 건 예전의 정하얀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
혹시나 나를 보고 이것저것을 배우고 있는 건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필사적으로 머리를 흔들며 쓸데없는 생각을 치워버렸다.
‘그래봤자.’
아직 어린애 수준이다.
애초에 정하얀은 이런 쪽에는 영 재능이 없다.
당장 지금만 봐도 자신을 자제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땅굴을 파는 장인 마냥 계속해서 다운을 외치고 있는 것을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처음에 시작을 잘했다고 해도 조금 더 교묘해야 이쪽을 옭아맬 수 있다는 걸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기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확실한 상을 주는 건 어떨까 생각했던 바로 그때였다.
“어디 아프신 곳이 있으신가요?”
들려온 것은 선희영의 목소리였다.
“안 그래도 형님 찾으러 갔었는데 이미 만나고 있었구만.”
“하얀 씨, 일어나셔서 다행입니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뭔가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박덕구부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김예리까지.
심지어는 그런 그녀의 눈을 살며시 가리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 역시 시야에 비쳤다.
뭔가 민망해하는 것 같은 김현성의 얼굴 뒤로 우리 파티 유일의 미성년자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도 알 거 다 알아… 아이 만들기….”
‘네가 뭘 알아. 꼬맹이가 아이 만들기는 개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순식간.
조용히 팔을 꺼낸 이후에 조용히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내 말에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하얀이가 배가 아프다고 해서 말입니다. 그, 잠깐 상태를 살펴보고 있는 도중이었습니다.”
“네… 아, 혹시 저희가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흐흐… 역시 조금 있다 다시 오는 게 더 좋은 거 아니요?”
‘박덕구, 이 새끼.’
“아니다, 덕구야. 정말로 상, 상태를 확인해 보고 있는 것뿐이었으니까.”
어째서 정하얀이 말을 더듬는지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 약간의 해프닝은 있었지만 무척 오랜만에 7번 대 파티의 모두가 모인 상황.
다들 조금씩 웃는 것을 보니 말은 안 했지만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볼을 부풀리고 있었던 정하얀조차 조금은 기쁜 것 같은 반응.
물론 지금도 길드는 무척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박덕구나 김예리는 그렇다고 쳐도 선희영이나 김현성은 함부로 움직일 수 있는 타이밍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찾은 것은 잠깐이나마 함께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렇게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은 역시나 즐겁다.
물론 전부 모인 7번대 중에서 가장 신나는 반응을 보인 것은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는 박덕구.
귀가 다 아플 정도였다.
“거, 정말로 깜짝 놀랐다니까! 형님이 수도로 간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갑자기 누님이 기적적으로 눈을 번쩍 뜨고 순식간에 몸을 일으키는데 거, 옛날에 우리 할매가 교회에서 봤던 앉은뱅이가 몸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였다는 거 아니요. 이게 사랑의 힘이지. 아암!”
“정신만 깨어나면 되는 상태였으니까요. 어쩌면 희미하게 의식이 남아 있었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틀림없이 몸의 치료는 완벽했거든요.”
“아… 그렇군요.”
“왠지 일어날 것 같았다는 거 아니요. 거, 형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살짝 움찔움찔 하는 게 있었는데 역시 그렇게 따악! 일어나니까 정말로 놀랐….”
‘그만해.’
박덕구의 이야기로 추론해 봤을 때 정하얀이 사실이 깨어 있었던 건 아닌지에 대한 의심이 들긴 들었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무척 안정된 정하얀의 반응이 더 신경 쓰인다.
박덕구의 말대로라면 이미 내가 수도로 떠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
울고불고 달라붙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무척이나 침착한 저 표정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을 때 내 의문을 해결해 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님이 하도 힘들어 하기에….”
‘이 새끼….’
“내가 현성 형씨한테 달려가서 누님도 함께 가는 게 어떻겠냐 건의했다는 거 아니요. 이건 칭찬받아 마땅한 일 아니요?”
‘이 돼지가….’
“용병여왕님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기영 씨. 조금 생각을 해 봤지만 역시 함께 다녀오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얀 씨는 아직 업무를 보기에는 무리이기도 하고….”
‘볼 수가 없는 거겠지.’
“기영 씨와 함께 있는 게 심적으로 도움이 될 겁니다.”
내가 떠난 이후의 정하얀을 감당하기 싫은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김현성 너마저….’
다분히 나를 저격한 것만 같은 설계였다.
아니, 틀림없이 저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