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회귀자 사용설명서 099화
율리에나(4)
“기영 씨, 거기에는 무슨 내용이 적혀 있나요?”
“아, 희영 씨. 게드릭과 율리에나의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끄응… 이 검 때문에라도 알아야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아. 안쪽에 있는 방 안에서 발견하신 책을 말씀하기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읽다 보니까 생각보다 볼만하더군요. 전설 같은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고… 음… 아무튼 흥미롭습니다.”
“재미있겠네요. 혹시 어떤 내용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무척이나 궁금해하는 선희영의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린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도중에도 이쪽을 기웃거리는 것을 보니 정말로 궁금하기는 한 모양.
사실 봉사 활동을 함께 나가는 것 이외에는 그동안 커다란 접전이 없었던 터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옆에서 내 팔을 꼭 잡고 있는 정하얀 역시 선희영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것도 잠시, 내가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바라는 눈치다.
지속된 행군이 지루했던 것이 틀림없으리라.
‘긴 이야기는 아니니까.’
목적지에 도착하는 길에 즐길 수 있는 이야기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정확히 만 년 전입니다.”
“만 년이요?”
“네. 우리가 자리해 있는 신성제국 베니고어가 생겨나기도 전의 이야기 입니다. 처참한 전투가 계속되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저주의 신을 숭상하는 신도와 축복의 신을 따르는 신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종교 전쟁이었다고 합니다.”
“아아아….”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네. 지금의 신성제국이 있는 것은 그때의 종교전쟁이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네. 그 당시에 율리에나는 저주의 신을 모시는 성녀였고 게드릭은 축복의 신을 모시는 성자였다고 하더군요. 둘은 직접적으로 부딪치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대한 이야기를 항상 들으며 전선에 섰다고 합니다. 실제로 둘이 전선에서 부딪친 것도 전쟁이 시작되고 15년이 흐른 뒤라고 적혀 있습니다. 아무튼 간에 거의 모든 병력이 부딪친 큰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베르만 절벽 전투.”
“알고 계십니까?”
“신전에 몸을 담고 있는 자라면 대부분 배우죠. 물론, 율리에나나 게드릭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만약 기영 씨가 가지고 있는 책이 거짓이 아니라면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게 되는 거네요.”
“신성제국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운이 좋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군요. 하하. 아무튼 수많은 신도들이 목숨을 잃었고 게드릭과 율리에나 역시 최후의 최후까지 싸우다 절벽에 떨어지는 것으로 그날의 전투는 마무리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사실 이때의 기록은 책에는 기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율리에나와 게드릭이 정확히 1년 뒤에 각자의 신전으로 돌아와 있다고만 되어 있죠. 물론 율리에나의 일기에는 아주 정확하게 적혀 있기는 합니다만 말하기 민망한 내용이 많아 정확히 설명해 드리기가 부끄럽군요.”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게드릭과 율리에나는 떨어진 절벽의 동굴에서 1년 가까이 함께 생존하고 결국에는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
동굴 안에서 있었던 내용을 대충 설명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보였다.
물론 엄한 내용은 빼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는지 연애 박사 박덕구도 슬그머니 이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그때부터 율리에나와 게드릭이 만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마침 전쟁 역시 소강 상태로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죠. 베르만 절벽 전투에서 양측의 피해가 무척이나 컸으니까요. 당연히 두 신은 처음에는 이 둘을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이미 서로를 열렬히 사랑한 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나 봅니다.”
“어째서 이런 꼴이 된 건지 이해가 되네요.”
“네. 당연하게도 둘은 서로의 신에게 분노를 사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게드릭은 축복신의 신전 안에 작은 신단을 만들었는데… 그곳이 바로 저희가 다녀왔던 던전, 저주받은 신단입니다. 둘은 이곳에서 사랑을 키웠고 결과적으로는 분노를 사게 되어 이 신단에 묶여버렸죠.”
“아….”
저주의 신은 율리에나에게 이 저주받은 신단의 작은 방을 빠져나갈 수 없는 저주를 내렸고, 축복의 신은 게드릭에게 율리에나를 영원히 그릴 수 있는 축복을 내렸다.
이 저주받은 신단을 계속해서 떠돌아다니며 율리에나를 찾아 헤매야 하는 상태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물론 축복의 신은 게드릭이 율리에나를 찾아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불쌍해요.”
정하얀의 말에 선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주를 받는 게 당연할 거예요. 신전 지하에 다른 신을 모시는 신단을 세운다는 건…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발상이네요. 아마 저주받은 신단 밖에 있는 언데드도 축복의 신이 내린 저주의 영향이겠죠.”
“게드릭의 일기에는 축복의 신이 영생을 살아가는 축복을 내렸다고 했었지만 이들의 입장에서는 사실 저주나 다름없었을 겁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율리에나는 찾아오지 못할 게드릭을 영원히 기다리게 됐고, 게드릭은 찾을 수 없는 율리에나를 영원히 찾아 헤매게 됐다는 이야기로 말입니다.”
무거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정하얀에게는 무척이나 감동적인 이야기였는지 벌써부터 훌쩍 거리는 것이 보였다.
“스, 슬퍼요.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렸다고 하니….”
살짝 머리를 쓰다듬어 준 건은 당연지사.
이때가 기회라는 듯 내 품에 푹 안기는 정하얀이 보였다.
“그럼 그때 왼쪽 방에서 발견된 언데드가 게드릭이라는 소리요? 형님?”
“응. 맞다.”
혹시 모를 생존자를 수색하는 과정에 발견한 것이 게드릭과 언데드 무리.
율리에나가 쓰러진 영향인지 쓰러져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던 이들이었지만 우리가 발견한 언데드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오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녀석의 품에서 흥미로운 아이템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드릭의 청혼 반지-영웅 등급]
[율리에나의 저주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슬쩍 내 손에 들려 있는 아이템을 바라보니 이 던전의 본래 공략 방법이 어떤 것이었는지 대충 알 것 같은 느낌.
더불어 김현성이 왜 그렇게 밤만 되면 싸돌아 다녔는지, 또 이곳에서 전 파티가 봤다는 언데드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아마도 일반적으로 저주받은 신단을 공략하는 방법은 이곳을 떠돌아다니는 게드릭을 발견하는 것이 먼저였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랜덤으로 리스폰되는 게드릭이라는 몬스터를 먼저 잡아낸 이후에야 비로소 저주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영웅 등급 이상의 판정을 받아도 될 정도로 까다로운 공략 방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 신단은 넓다.
아무리 싸돌아 다녀도 게드릭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공략 방법이 거의 없는 것과 같다.
말 그대로 율리에나의 저주에 노출되어 서서히 죽어가는 수밖에 없다.
우리 파티 같은 경우에는 게드릭을 발견한 것보다 먼저 저주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것.
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면 김현성이 게드릭을 찾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일단은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사랑이라는 건 확실히 무섭네요.”
“네.”
그 누구보다도 공감할 수 있다.
내 품에 안겨 있는 정하얀만 봐도 답이 나온다. 아무튼 간에 일단은 게드릭에 대한 정보를 모조리 모을 수밖에 없는 상황.
지금 당장은 율리에나의 자아가 검 안에서 잠들어 있지만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만큼 대비할 수 있는 건 모두 해둬야 한다.
“그런데 여기 들어온 지도 좀 된 것 같은데 그 지원군이니 뭐니 데려온다고 하던 양반들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것 같소.”
“누구?”
“그, 이설호 그 할배 말이요.”
“아아아. 아마도 아직 붉은용병이 돌아오지 않은 탓도 있고 여러 가지 문제가 겹쳤겠지. 사실 우리가 던전 공략을 생각보다 빨리 끝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라도 데려와야 되는 거 아니요? 형님이나 김현성 형씨가 있어서 다행이었지 만약에 아니었으면 아마 우리도 그 곳에서 죽었을 수도 있었소.”
“뭔가 사정이 있었을 거다.”
‘사정은 개뿔….’
아마 우리가 이곳에서 죽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게 녀석들에게 조금 더 유리할 테니까.
시기상 조금 애매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상희는 이설호를 비롯한 구태세력에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형님은 너무 착해서 탈이오.”
고개를 끄덕이는 박덕구와 정하얀.
그렇지만 선희영의 표정은 별로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거겠지.’
이설호를 비롯한 늙은이들은 빈민에 있는 부랑자들과 별 다른 차이가 없다.
쓸모없고, 스스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이 앉아 있는 그 자리에 눌러앉아 어떻게든 아득바득 이득을 꾀하려고 한다.
저번에도 한 번 말한 적이 있지만 부랑자들과의 차이는 조금 더 운이 좋았다는 것밖에 없다.
사회의 암 덩어리, 이설호는 그녀에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리라.
‘지혜는 잘하고 있을까.’
이지혜에게 시켰던 일도 갑작스레 떠오르기 시작.
그녀라면 내가 시킨 일을 거의 완벽하게 마무리 지어놨겠지만 우리가 나오는 타이밍이 생각보다 빨라 일을 끝내지 못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멀리서 누가 뛰어왔다.
‘박가현?’
시야에 비치는 인형은 틀림없이 이상희가 우리보다 한발 앞서 길드로 보냈던 박가현이다.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한 건 당연지사.
어떤 소식을 들고 왔을지 기대가 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불안하다.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온 것치고는 무척이나 초조하고 정신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이윽고 이상희 앞에 당도한 그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하아… 하아…. 부 길드 마스터.”
“소식은 전했나요? 어째서 혼자….”
“일단은 시키신 대로 전부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 전, 전해야만 하는 소식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먼저….”
“진정하시고 말씀해 주세요.”
뭔가 눈치를 보는 느낌.
이곳에서 말해도 되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결국 결심한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귓가로 그녀의 목소리가 꽂혀 들어왔다.
“그… 길드 마스터가 돌아가셨습니다.”
“네?”
“길드 마스터가… 돌아가셨습니다.”
“그게 무슨… 분명히 저주가 풀리셨을 텐데….”
“돌아가신 건 정확히 3일 전이라고 들었습니다. 주무시는 동안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고…. 이, 일단은 이상희 님께 알리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서….”
“…….”
입을 꽉 다물고 있는 이상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물을 쏟고 있는 박가현 역시 마찬가지.
나는 파란의 길드 마스터의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인성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던 모양.
대충 봐도 분위기가 내려앉은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사실 우리 파티에게 나쁜 상황은 아니다. 길드 마스터가 없다면 우리가 실권을 쥐는 게 더욱더 쉬워질 테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갑자기?’
확실히 이상한 타이밍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 단순한 자연사라고 하기에는 늙은이들에게 무척이나 유리한 타이밍이다.
물론 이 정도로 저주에 장시간 노출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왠지 모르게….
‘이설호인가?’
단순한 추측일 뿐이지만 영 설득력이 없는 가설은 아니리라.
“일단은 서둘러 길드로… 모두 힘드시겠지만 행군 속도를 조금 올리도록 하… 겠습니다.”
“네.”
당연히 바라던 바.
그렇게 원정대는 조금은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천천히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의외의 소식 때문인지 이상희는 입을 꾹 다문 채 원정대를 이끌었고 다른 파티원들 역시 이상희를 위로하며 묵묵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후 눈에 들어온 자유 도시 린델.
물론 린델에 당도하기 전 마중 나온 늙은이들과 이지혜가 같이 있었다.
검은백조의 몇몇도 함께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액션 정도는 취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무사생환을 축하드립니다. 이상희 님. 마침 출발하려던 차였는데….”
“그것보다 설호 씨, 마스터는 어떻게 됐습니까? 정말로 돌아가신 게 맞습니까?”
“네. 편안하게 숨을 거두셨습니다.”
“시, 시신은 어디에 있죠?”
“일단은 길드의 지하에 모셨습니다. 안 그래도 장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도중이었습니다. 3일 전에 갑자기….”
“아….”
저들의 이야기는 이미 관심 밖이다.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이설호와 이상희의 뒤로 이지혜를 바라보고 손가락으로 툭툭 머리를 두드리자 마찬가지로 미소를 띄우며 다리를 툭툭 건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럼 그렇지.’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