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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8화 (87/1,590)

# 88

회귀자 사용설명서 088화

우린 영원히 함께예요(2)

-저주가 내리리라.

‘무슨 개소리…….’

나에게만 들린 목소리가 아니다.

모두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이 신단 전체에 울리고 있는 목소리가 분명했다.

“방금.”

“사제들은 다시 한번 정화 주문을…….”

“네.”

커다란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지만 저런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은 확실히 긴장될 만하다.

솔직히 당장 이곳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

이상희나 2번 대의 파티는 아직까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파티는 조금 혼란스러워 보였다.

-저주가 내리리라…….

“마력은 느껴지나요?”

“아뇨. 느껴지지 않습니다. 마력 반응은…… 없습니다. 신성력 역시.”

-침입자들에게 저주를 내려 주리라…….

“아마도 던전 자체에 심어져 있는 기능으로 보입니다.”

“어떤 종류의 저주인지는…….”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단순히 목소리가 들려오는 게 고작이라.”

“일단은 뒤로…… 당장 뒤로 빼고 신성 방어 주문을.”

라고 이상희가 입을 열었던 그때였다.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머리가 어지럽고 순식간에 구토감이 올라왔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변화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물론 이것마저도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정확히 지금 이 현상을 뭐라고 설명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아마 나 말고도 다들 이런 현상을 겪고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풍경이 바뀐 뒤에 어디에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조금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어요?

-어째서…… 저를 버렸나요.

‘이런.’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이름 모를 여자였다.

얼굴은 기억이 난다.

튜토리얼 당시에 아귀들에게 뜯어 먹히고 있었던 여자였으니까.

살기 위해서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고는 하지만 저 여자를 잊을 수 없었다.

저 여자 대신 선택한 것이 식수와 식량이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줄곧 미안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개 같은 상황이야.”

내장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이쪽에 다가오고 있는 모습은 가관. 아쉬들에게 뜯겨 먹히고 있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인상이 찡그려지기는 했지만 무섭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미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이건 가짜야.’

틀림없이 가짜다.

-아팠어요. 무척이나요. 구해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분명히 그럴 거라고 믿었는데. 당신은 등을 돌렸어요.

“지랄.”

-넌 쓰레기 같은 인간이야.

“박혜영.”

심지어는 정하얀에게 죽은 박혜영의 목소리도 귓가에 들어와 꽂힌다.

팔과 다리가 절단된 채로 이쪽을 바라보는 눈에는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어째서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느냐에 대한 원망이다.

물론, 그녀는 이름 모를 여자와 조금 경우가 다르다.

그녀를 살리는 선택지도 분명히 있었다.

그렇지만.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당신은 항상 그런 생각으로 자기 자신을 방어합니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무척이나 재미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당신은 저와 같은 종류의 인간입니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미친 살인마 새끼가. 난 너랑 엄연히 달라.”

‘정진호.’

김현성의 칼이 목에 박힌 채로 다가오는 모습은 조금 그로테스크 하다.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같은 종류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럽지요. 석우 씨가 죽은 이유도 필요에 의해서였습니까?

선희영이 죽여 버린 빈민, 유석우와 정진호의 똘마니 둘. 나와 관련된 이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종류의 저주인 건가.’

다른 이들도 이런 걸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모습은 내가 가장 보기 싫어하는 종류의 장면이었을 것이다.

일말의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남아 있는 모양, 솔직히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네가 죽였어.

“닥쳐.”

-합리화. 당신은 비겁한 사람이야.

“합리화하는 게 뭐가 나빠. 인간은 원래 그렇게 설계되어 있어. 어떻게든 상황을 합리화하게 되어 있다고 머저리들아.”

-그리고 넌 죄책감을 느끼고 있지.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감정이지만 후회하지는 않아.”

-쓰레기.

“할 말은 그것밖에 없나. 아무리 나를 비난한다고 한들, 현실은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거고 너희들은 뒈져서 이곳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거야. 그건 절대 변하지 않아. 다시 한번 기회가 와도 나는 똑같이 행동한다.”

-언젠가 너도 이 자리에 함께 서게 될 거야.

“지랄. 그건 네 희망사항이겠지.”

시야가 점점 밝아지기 시작한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 순식간에 욕지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우웨에에엑.”

나도 모르게 안에 있는 것들을 쏟아낸 것은 당연지사.

한 번 뒈졌던 놈들의 시체를 다시 보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대충 떠들어 댔던 아까와는 다르게 흥건한 식은땀 때문에 온 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다리는 덜덜 떨리기 시작, 가짜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입이 말라왔다.

‘가짜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정말로 가짜일까?

‘입 닥쳐.’

심지어는 현실로 돌아온 이후에도 계속해서 내 귓가로 속삭이는 놈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기랄.’

-네가 우릴 죽였어.

‘제기랄.’

-네가 우릴 죽인거야. 네가!

‘제길.’

생각보다 데미지가 있다. 불쾌감이 치솟아 올라온 것은 너무나도 당연.

거칠게 숨을 헐떡이자 내 어깨를 두드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흠칫 놀라 순식간에 어깨에 있는 손을 뿌리치자 편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장 꺼져!”

“괜찮으십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김현성.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곳은 그곳이 아니다.

“아…… 네. 괜찮습니다.”

김현성이 이쪽에 조금씩 마력을 보내주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아마 모두들 나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을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으아아아아아…….”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몸을 부여잡고 있는 김예리, 손을 휘두르며 자꾸만 뭔가를 뿌리치려고 하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밀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입을 오물오물거리며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은 눈치.

“그만…… 그만. 엄마…… 엄마! 도와줘요. 구해주세요. 엄마…… 제발…….”

아마 빈민가에서 있었던 기억 중에 하나이리라.

대충 봐도 끔찍한 경험을 하고 왔다는 것이 느껴진다.

박덕구 같은 경우에는 몸을 웅크리고 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로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떤걸 보고 있을지 상상이 가기 시작했다.

선희영도 그때의 기억을 보고 있는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 비명은 지르지 않고 있지만 입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쪽은 정하얀.

“싫어어어어어! 싫어어어. 제발. 제발요. 오빠. 오빠.”

‘…….’

“제발요. 잘못했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제발요. 제발…….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잘할게요. 제발 버리지 말아주세요. 제발…….”

‘시발.’

솔직히 상황이 심각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손톱에는 피가 묻어 있다.

손으로 자신의 살점을 뜯어버린 것이다.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진 것을 보니 자신의 머리도 쥐어뜯은 모양.

숨을 쉬기 힘들어 하는 것은 물론 너무 울어서 쉬어버렸는지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안 돼…….”

‘…….’

“그 여자랑 그러지 마요. 그러지 마요, 오빠. 잘못했어요. 싫어…… 싫어! 싫어!”

대충 무엇을 보고 있는지 예상이 간다.

그밖에도 다른 사람들 모두 고개를 저으며 이상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중간 중간 깨어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대로 쓰러져 토악질을 해대거나 혼란스러워 하는 이들이 대부분.

이상희 같은 경우에는 자꾸만 어딘가를 향해 사과를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정말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지금 이 안에 들어와 있는 길드원들에게 사과를 하고 있는 느낌.

줄곧 생존자들을 걱정하고 있던 그녀였으니 당연한 반응이리라.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황정연도 깨어났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게 시야에 비친다.

김현성을 제외하면 깨어난 이들은 대부분 지력이 높은 이들이다.

개인차가 있지만 가지고 있는 지력이 영향을 미치는 모양. 정하얀의 경우에는 아마 특이 케이스일 것이다.

‘정신이 불안정하니까.’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밀어낼 수 없는 것이다.

“현성 씨는 혹시 언제…….”

“저도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도 이해가 잘되지는 않지만…….”

족히 수십 분은 있었던 것 같은 느낌. 내게 일어난 일이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물론 사태를 파악하는 것보다는 해결하는 것이 먼저. 머릿속에서 맴도는 의문을 지워버린 이후에 김현성을 향해 급하게 입을 열었다.

“깨울 수 있는 방법은?”

“조용히 마력을 넣어주시는 게 가장 좋을 겁니다. 신성력이 조금 더 효과가 있기는 할 테지만……. 기영 씨는 일단 하얀 씨를 부탁드립니다.”

“아. 네.”

김현성은 일단 선희영을 깨워야겠다고 생각하는 모양. 황정연 역시 마찬가지인지 조금은 초췌한 얼굴로 자신의 파티의 사제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마음을 가다듬자 어느덧 이쪽을 옭아매고 있는 이상한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

나 역시 정하얀 쪽으로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겼다.

“죽여야 해…….”

‘뭔 소리야.’

“죽, 죽여야 해. 전부…… 전부 죽여야 해. 그래야 오빠랑 하나가 될 수 있어. 그래. 그래요. 그게 맞아. 전부 죽이는 거야.”

조용히 중얼거려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무섭게 들려오기는 한다.

조용히 다가가 손을 잡고 마력을 밀어 넣으니 정하얀의 혈색이 조금 씩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항상 같이 있을 거야.”

조용히 귓가에 속삭여 주는 것은 당연.

정하얀이라면 금방 벗어날 수 있으리라.

정하얀의 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분명히 눈을 뜨고 있기는 했지만 마치 의식을 회복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거칠었던 호흡은 차차 안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덜덜 떨리던 팔과 다리도 어느 순간 멈칫하고 있는 것을 보니 확실히 정신이 들어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오빠?”

“괜찮지?”

“오…… 오빠.”

“응.”

놓치기 싫다는 듯이 내 목을 꽉 끌어안아 온다.

숨이 턱 막혔지만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

“오빠……. 오빠. 오빠.”

“그래 여기 있다.”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에 이어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방금 자신이 본 것이 환상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악몽을 꾼 자식을 돌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쁘지는 않다.

-넌 그녀도 버릴 거야.

계속해서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무시하는 것이 당연. 저주의 효과일 것이다.

-저주의 효과 같은 게 아니야. 네 마음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인 것이지.

아마 지금 이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깨어난 이후에도 조금씩 혼잣말을 하고 있는 이들이 보인다.

-결국 네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을 거야. 네가 전부 버릴 테니까. 네 옆에 있는 이들도 언젠가는 우리와 함께 너를 바라보게 될 거야. 틀림없이.

“오빠 맞죠?”

“그래.”

“진짜 오빠야…….”

“그래, 맞아.”

자꾸만 확인하려는 듯이 말을 걸고 있는 정하얀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녀에게도 지금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

그게 무슨 목소리인지 이쪽이 알 수 없다는 게 조금 불안한 부분.

엉망이 되어 있는 정하얀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켜 넘겼다.

‘불안한데…….’

폭탄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정하얀의 상태는 불안정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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