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회귀자 사용설명서 075화
세 번째 직업(1)
나쁜 타이밍은 아니다.
이제야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듯한 느낌이었고,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조금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싶을 타이밍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외부적으로 방해되는 요인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붉은용병, 검은백조의 일은 마무리 단계에 있었고 이지혜의 일은 확실하게 맞아 떨어졌다.
‘여러분이 승리했습니다. 여러분의 승리입니다. 린델은 평소처럼 평화롭고 이전보다 더욱더 안전할 겁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합시다.’
정유라의 사과를 받았다는 언플과 함께하긴 했지만 겨우 이 정도의 발언으로도 대중들을 진정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지만 변한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계속된 언론의 선동에 대중들은 자신들의 승리에 환호했고 스스로 만족했다.
한 개인이 대형 길드의 압력에 맞서 싸워 이겨낸 것에 함께 기뻐했다.
이쪽에게도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내 발표가 끝난 이후 며칠 뒤 검은백조는 지휘체계 개편과 초보 모험가들에 대한 기부를 홍보했다.
갑론을박이 있기는 했지만 나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검은백조의 모든 간부가 나와 고개 숙여 사과한 것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대형 길드의 간부들이 이런 사과를 한 적이 없으니 대중의 입장에서도 무척이나 신선했으리라.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면 그 날 이지혜가 떠난 이후의 정하얀의 반응.
당장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종종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전보다 달라붙어오는 게 더 심해졌고 나와 함께 하는 것으로 자신의 불안감을 잊으려는 상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설명하자면 조금 더 자기 주도적으로 변했다고 하는 게 어울리리라.
‘좋지 않아.’
당연하지만 정하얀의 이런 변화는 그다지 달갑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물론 아직은.
‘어디가요, 오빠?’
라고 묻는다든지.
‘언제 돌아오실 건가요.’
라고 물어오는 것이 전부였지만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종류의 집착은 내 쪽에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지혜와 어느 정도의 커넥션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묘한 분위기 같은 걸 느낀 게 틀림없다.
물론 이지혜는 얼굴의 철판을 깔고 모른 척하기는 했다지만 그녀와 나 사이에 유지되고 있는 묘한 긴장감 같은 걸 캐치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시스템이 공인으로 인정한 영혼의 단짝이니 정하얀이 뭔가 낌새를 차린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가짜 연인 컨셉을 유지하고 있는 용병여왕 차희라보다는 이지혜를 조금 더 신경 쓰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녀를 컨트롤해야 한다.
항상 그걸 머릿속에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평생 끌려 다닐 수도 있다.
아무튼 간에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성장하기에는 최고의 적기다.
파란 내에 미친 늙은이들을 제외하면 우리를 억압하는 외부적인 요인은 없다.
사이좋은 삼권 동맹 추진, 조금 더 좋아진 던전 문화와 사냥 문화, 우리 곁에 있는 언론을 통해 여기저기에서 지원들이 쏟아지는 최고의 상황.
어느 정도는 날아오를 준비를 마친 것처럼 보였다.
그게 현 김현성 파티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이다.
“여러분도 대충 이해하시고 있겠지만 전직을 하는 데 필요한 선행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사냥으로 경험치를 쌓는 것 그리고 직업 고유의 특정 행동을 반복하는 것. 능력치를 오르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력을 사용하면 마력이 오르고 근력을 사용하면 근력이 오를 거라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물론입니다.”
“지난 번 던전행 이후로 여러 사정 때문에 잠깐 휴식기를 가지기는 했지만 지금보다 좀 더 빠르게 성장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최소 지금의 선희영 씨 정도로 성장하면 이상적일 것 같군요. 아니 최소한 저번에 함께 던전 공략을 진행했던 다른 분들 정도의 스펙은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소한 초보자 타이틀은 때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렇군요.”
“최소 세 번 혹은 네 번의 전직, 60대의 주요 능력치. 그게 제가 여러분들께 요구하는 전부입니다.”
어려운 문제이기도 했고 쉬운 문제이기도 했다.
김현성의 저 발언은 아마 나와 박덕구 그리고 꼬맹이 김예리.
그중에서도 꼬맹이와 나를 저격한 발언으로 들렸다.
물론 녀석은 우리의 능력치를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마력이 40대 후반으로 다다르고 있었고, 김현성 자신은 이미 능력치가 50대를 넘어섰다.
본래부터 우리보다 늦게 들어온 선희영 같은 경우에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고 느리기는 했지만 박덕구도 차근차근 성장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
아직 어린 김예리와 내가 김현성 파티의 유일한 골칫거리로 느껴지고 있으리라.
‘흠.’
김예리는 차라리 낫다.
전설 이상의 잠재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성장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김현성 파티의 골칫거리는 바로 나.
물론 성장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니다.
연금술사라는 내 직업은 빈약한 마력을 커버할 수 있는 직업이기도 했고 어느 정도 나와 맞는 느낌이니까.
그렇지만 확실히 전투직군으로 분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물론 아직까지 완전히 성장한 모습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흑마법사를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 때도 있었다.
어차피 성장의 한계야 있었겠지만 지금보다는 강했을 테니까.
물론.
‘이곳이 신성제국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끄응….”
“한 달 이내입니다. 여러분이 전원 한 달 이내에 세 번째 전직과 능력치를 맞출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말은 쉽지만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되지는 않을 거요. 직업은 어떻게 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능력치 같은 경우에는 훈련을 해도 오르는 속도가 더뎌지고 있기도 하고… 사냥을 하면 달라지는 점이야 있겠지만….”
“아마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일단 사냥을 나가는 것부터 시작하겠지요. 적어도 목표로 했던 것들을 완성할 때까지는 도시를 나가 돌아오지 않을 생각입니다.”
“음.”
“원정에 나가는 인원은 다섯. 기영 씨를 제외하고 모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형님이….”
솔직히 조금은 가슴이 철렁할 수밖에 없는 상황.
승차감 좋은 김현성 버스에서 내리라는 소리처럼 들렸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솔직히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 그건 안 돼요.”
짧은 시간이지만 오만가지 생각이 뇌리에 꽂힌다.
혹시 이제부터 비전투직군으로 굴리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혹은 메인 파티에서 밀어내려고 하는 게 아닐까?
따위의 잡생각이다.
박덕구와 정하얀은 나보다도 깜짝 놀란 표정. 심지어 선희영도 별로 기분이 좋아보이지가 않았다.
어쩌면 파티 내에서 확대된 내 영향력을 줄이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표정은 무척이나 담담하다.
애초에 김현성의 성격상 그 정도의 일로 나를 밀어낼 결심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놈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 있는 소중한 파티원이었으니까. 심장은 쿵쾅거리지만 별다른 동요 없이 입을 열었다.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김현성의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너무 의지하고 있습니다.”
“아.”
“덕구 씨나 하얀 씨는 너무 좋은 환경에서 성장해 왔습니다. 사냥에 익숙하지 않은 희영 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편하거나 사냥이 쉽다는 종류의 환경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의 노고를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만 여러분은 기영 씨의 존재로 인해 생기는 심리적 안정감이라는 환경에 너무나도 편하게 안주해 있습니다.”
“심리적 안정감 말이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는 간다. 아니, 이해만 간다.
“조금 과대 해석하자면 기영 씨의 존재가 여러분의 성장을 막고 있는 겁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에는 부끄럽지만 제 존재 역시 악영향을 끼치고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들과 함께 원정을 나가기야 하겠지만 크게 개입하지 않을 겁니다. 오롯이 저와 기영 씨를 제외한 네 분이서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터무니없는 과대평가.’
골칫거리가 나였던 것은 일단은 완벽한 정답이다.
물론 그 의미와 해석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내가 성장을 못 하고 있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성장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문제란다.
김현성이 나를 과대평가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정하얀이나 박덕구가 나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내 존재가 성장을 막고 있을 정도의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까놓고 이야기하면 김현성이 뭔가 착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기영 씨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군요.”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하얀이나 덕구는….”
“기영 씨가 생각하시는 것보다 기영 씨는 파티에 기여하는 부분이 큽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 눈에는 보입니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기영 씨가 없는 이번 원정은 철저한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클 겁니다.”
“그, 그렇지 않아요. 아니 만약에 그렇다고는 해도 어떻게 오빠랑… 한, 한 달이나….”
“우리는 어린애가 아니요, 형씨. 물론 기영이 형님이 대단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적어도 이 파티를 이끌어가는 입장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번복은 없습니다. 이번 원정에 기영 씨는 참가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를 제외한 네 분이 사냥과 공략을 진행하게 될 겁니다.”
모두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러나 일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진 않아.’
나로서도 조금 의아하기는 하지만 김현성이 그렇게 판단하고 성장 방향을 결정했다면 그게 맞을 것이다.
특히 박덕구는 몰라도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내가 없는 상황에서도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
이쪽을 따르는 것은 좋지만 너무 과한 것보다는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한 달 동안 떨어져야 한다는 현실이 믿기 힘든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나 역시 김현성의 결정에 반기를 들 생각은 없다.
“후우….”
“뭐, 저도 현성 씨 말에 동의합니다. 그게 성장 방향에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문제는 저들이 아닌 나.
김현성 버스에서 내린 이후라면 미아가 되기 일보 직전의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
파티원이 강해지는 것은 좋다.
그렇지만 내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다면 앞으로 함께하는 데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건 안 돼.’
굳이 나를 따로 뺀 것을 보면, 회귀자가 남겨둔 안배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잠재 능력이 낮은 것처럼 보이는 나를 위한 선물이 있을 거다.
능력치의 상승과 전직.
무척이나 달콤하게 들려오는 울림. 어떤 것을 준비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꽤나 달콤한 꿀단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그동안 저는….”
그렇지만 그건 내 착각에 불과했던 모양.
이쪽을 바라보며 싱긋 웃는 김현성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신뢰감이 가득 차 있었다.
“기영 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능력치 상승과 전직을 중점으로 생각하고 한 달 동안 움직여 주시면 됩니다.”
“아… 네.”
“출발은 최대한 빠르게 하는 걸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기영 씨는 도와주지 말아 주십시오. 출발 준비부터 해야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쪽은 신경 쓰지 마시고 곧바로 기영 씨 본인의 성장에 집중해 주세요.”
“네….”
무슨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자식은 나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
뭔가 심경의 변화가 생긴 듯한데 이런 상황이 찾아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제가 없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믿고 있겠습니다, 기영 씨.”
‘믿지 마, 이 새끼야.’
라는 말이 혀끝에 맴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