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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53화 (52/1,590)

# 53

회귀자 사용설명서 053화

가난하다고 해서 착한 것은 아니다(2)

지금 나와 정하얀이 저들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을지 대충 예상이 간다.

애초에 외관 자체가 이곳과 무척이나 동떨어져 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한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정하얀은 말끔하다 못해 화장까지 한 것 같은 모습.

심지어 굉장히 예쁘장한 옷을 입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저들처럼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그저 빈민촌이 궁금해 마실 나온 철없는 젊은 커플처럼 비치고 있을 것이다.

사실상 폭동이 일어나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물론 빈민들이 우리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극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자유 도시 린델에서 말끔한 복장을 하고 다닌다는 것은 무력이 강하거나,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골드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자신들에게 화가 닿을 수도 있을 상황을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적의가 깃든 눈빛을 보내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물론 저들이 어떤 눈빛을 보내는 지는 나와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

다만 김현성이 점찍어 둔 것으로 추정되는 저 선희영이라는 여자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건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정하얀도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통감하고 있는지 괜스레 내 눈치를 보고 있다.

결국에는 선희영이 빈민들을 헤치고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교회 누나 같은 인상이다.

긴 머리에 커다란 눈에 고생 같은 건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외모다.

괜스레 시선을 피하며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선희영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저들에게 사과하세요.”

“…….”

“저들에게 한 폭언을 취소하고 저들에게 사과하세요.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당신들에게 폭언을 들을 이유는 없습니다.”

심지어는 저 여자에게 알랑방귀를 뀌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각 클랜의 스카우터들도 목소리를 높인다.

이 어이없는 상황에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어디 사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사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당장 그 폭언을 취소해 주셨으면 합니다.”

“혹시 파란 길드에서 오셨습니까?”

붉은용병이나 다른 대형 길드는 보이지 않는다.

중소형 클랜의 다른 이들은 생각보다 정중한 느낌이다.

가슴에 달려 있는 파란의 휘장이 저들을 얌전하게 만드는 모양인 것 같았다.

저 여자가 저런 말을 하는 건 그나마 이해할 수 있지만 타 클랜과 길드 놈들이 저런 말을 외치는 건 어이가 없다.

‘이기적인 야심가.’

‘계산적인 분석가.’

어딜 봐도 봉사 활동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놈들이 눈에 보인다.

성향이 안 좋은 쪽으로 치우쳐져 있을수록 목소리를 높인다.

누가 봐도 정의의 편은 저들이고 우리는 개념 없는 커플이다.

착한 놈과 나쁜 놈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실수?’

아니.

결코 실수라고는 할 수 없다.

언제부터 저 영입 전쟁이 지속되고 있었는지, 김현성이 저 여자를 작업 치는 것에 얼마나 많은 진전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경쟁자가 저렇게 많은데 제대로 된 영입 제의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저런 상황이 하루 이틀인 것도 아닐 것이다.

왠지 모르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저 여자에게 있어서 최우선 사항은 빈민들을 구제하는 것.

그 일에 매달려 있으니 클랜이나 길드에 들어가 원정을 떠날 수 있을 리가 없다.

저 여자에게 맞는 전혀 새로운 방식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순식간이었다.

조금 풀이 죽은 것 같은 정하얀의 어깨를 살짝 이쪽으로 끌어들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취소하지 않겠습니다.”

“네… 네?”

“취소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남이 주는 것을 받아먹고 있는 이들을 개돼지 같다고 말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당신… 파란 길드로군요.”

“제 소속과 제 말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파란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죠. 파란에 뜻과는 무관한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해도 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 겁니다. 당신은 이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단순히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저들을 비난할 자격은 없습니다.”

잠깐 동안 입을 다물자 기세등등해졌는지 입을 여는 선희영이 보였다.

“모두가 좋아서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사정을 가지고 어쩔 수 없이 몰렸지요. 이 대륙은 조금만 실수해도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당신처럼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 좋은 길드의 컨택을 받고 대충 대충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이들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요.”

특별한 재능이 나왔을 때는 나도 모르게 실소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렇지만 대충 대충 살아가고 있다는 말에는 조금 인상이 찌푸려졌다.

“웃기네요.”

“네?”

“제가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저기 있는 이들 보다는 10배는 더 치열하게 살았을 겁니다. 아마 이곳에 계신 분들 모두 마찬가지겠지요. 저기 보이는 클랜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목숨을 걸고 사냥을 나가는 것은 물론, 궂은 일, 힘든 일 가리지 않고 살아감으로써 저 위치를 얻었을 겁니다. 죽고 싶은 사람은 그 누구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일하고 싶은 사람도 아무도 없지요.”

“아….”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몇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기며 파란에 들어갈 수 있게 됐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위해 무엇도 걸어본 적이 없는 인간일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어째서.”

“…….”

“어째서 저들이 저렇게 되었는지 대충 알 것 같군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저들을 저렇게 만든 건 당신입니다.”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표정이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없다.

“저들을 길들인 것은 당신입니다. 먹이를 주고 있을 곳을 마련해 주고 입을 옷을 건네준 당신이 저들을 길들인 겁니다. 당신들이 저들을 패배자로 만든 겁니다.”

“뭘 안다고 그런 말… 말을 하시는 건가요.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으셨다고 하셨지요. 현재 도시의 정확한 상태에 대해서 모… 모르고 계신 상태로 이런 말을 하시면… 빈민들이 생겨난 건 저 때문이 아니라… 당, 당신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세하게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저런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아아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이들 말이군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오직 자기 이득만 챙기는 당신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린델을 썩게 만드는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저 긍정할 수는 없다.

“저는 제 이득을 챙기기 위해 남에게 부당함을 준 적은 없습니다. 일부 인간이 그렇게 느낄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방금의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당신이 도와줘야 하는 대상은 이곳에 있는 이들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원정을 떠나는 모험가, 힘든 장소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이지요.”

궤변이다.

당연히 궤변이고 개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당연하지만 봉사 활동 자체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이런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렇지만 이 여자의 방법은 잘못되었다.

성향.

‘이상적인 봉사자?’

어쩌면 봉사를 위한 봉사를 하는 타입일 수도 있으리라.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알 것 같군요.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면 된다는 뻔한 말을 하… 하시려는 거군요.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습니다. 이분들을 위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당신의… 말은 설득력이 없어요.”

“행동하려고 찾아왔습니다.”

“뭐….”

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 전원, 제가 고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 제가 고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위험한 일은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고된 일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은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시급도 기본 시급 이상을 쳐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

“지금 상태에서 벗어나 재기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숙소는 제공해 드릴 수 없겠지만 중식 정도는 제공해 드리지요.”

“당신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요?”

“계속해서 남에게 빌붙는 이들로 이곳에 남을 건지 아니면 당당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것인지는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스스로 일어날 때가 됐습니다. 여러분.”

나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조용하다.

그렇지만 용기를 낸 누군가를 시작으로 질문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말 그대로 위험하지 않은 간단한 일입니다. 절대로 위험은 없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습니다. 단순 노동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시급은….”

“1골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추가 근무가 발생된다면 따로 수당까지 쳐드릴 수 있도록 하지요. 하루 근무 시간은 기본적으로 8시간으로 책정하는 게 좋겠군요.”

금방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믿지 못하겠다면 이곳에 있는 이분을 저희 회사의 고문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안심할 수 있게 말입니다.”

“저는 한다고 말한 적이!”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 지켜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그건 그렇지만….”

“여러분들에게는 기회입니다. 몸이 불편하신 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네. 그렇고말고요.”

선희영을 회사의 고문으로 모신다는 말이 꽤나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천천히 손을 들기 시작한다.

“하겠습니다.”

“저… 저도 하겠습니다.”

“저도….”

“맡, 맡겨만 주신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너도 나도 손을 들기 시작한 상황에 무척이나 기분이 좋다.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선희영이나 다른 클랜 녀석들의 시선도 말이다.

“일은 내일부터 곧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간단한 일이니 내일 아침 9시까지 몸만 오시면 됩니다.”

“네.”

이쯤 되면 선희영도 방금의 말이 민망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나를 완전히 믿는 표정은 아니었다.

사실 믿을지 믿지 않을지에 대한 여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선희영을 조금 경계하는 것 같은 정하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리자 조용히 이쪽으로 다가온 그녀가 아주 천천히 내게 입을 열었다.

“뭐,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 할지 모르겠지만… 일, 일단은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뭐가 감사하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네요.”

“네?”

“감사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

“별로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요.”

“무슨 소리를….”

“아까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네?”

“저들을 길들인 건 당신입니다.”

정말로 저 사람들이 선희영에게 길들여졌는지 아닌지에 대한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차피.

그렇게 생각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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