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회귀자 사용설명서 047화
호랑이가 있는 곳에서도 여우가 왕이 되는 경우가 있다(2)
‘뭔 소리야….’
얼굴은 정말로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궁금해하고 있는 표정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입맛을 다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해 오는 사람은 없었는데… 자신 있나 봐? 솔직히 말해서 네 외관은 내 취향이기는 한데… 나는 조금 뱀상을 좋아하거든. 눈이 조금 찢어진 게 마음에 드네. 딱 꼬집어 말하면 잘생긴 건 아닌데 매력 있어 보이기는 해.”
“그게….”
“구매 욕구가 아예 생기지 않는 건 아니야. 그래도 믿고 써볼 만한 제품인지 한번 시험해 봐야 될 것 같은데… 어때?”
다리를 꼰 채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린다.
그제야 저 여자가 내 제안을 무슨 뜻으로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질 지경.
‘뭐….’
스폰이라는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았지만 이런 이야기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여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고 있나?’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그럼 무슨 뜻으로 말한 걸까….”
“그건….”
“이기영. 내가 너한테 투자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네가 우리 길드에 왔을 때의 이야기야. 물론, 네 사랑스러운 애인과 함께 왔을 경우에. 너 혼자 온다고 해도 솔직히 받아들일 용의는 있어. 썩 재능이 좋은 것 같지는 않지만… 나는 연금술에 대해서 그리 부정적이지는 않거든. 좋은 관계를 만들어놓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
“아.”
“그렇지만 네가 타 길드로 이적한 뒤에도 이쪽의 투자를 받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건 내 역할이 아니야. 네가 소속된 길드가 할 일이지. 아무것도 아닌 타인에게 투자를 해? 차라리 너와 한 달에 몇 번 함께 놀아주는 걸 대가로 돈을 쥐어주는 게 더 수지가 맞는 장사라 이거야. 그게 이쪽에는 더 이득이라는 소리라고…. 이해할 수 있겠어?”
‘제길.’
팩트가 너무 강하게 치고 올라온다.
말하자면 이기영 개인의 성장 기대치에 투자하는 것보다는 잠자리에 투자를 하는 게 더 수지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비호를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연기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지금 나를 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물론 좋아한다는 감정보다는 단순히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듯한 느낌이었다.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저 여자의 말 잘 듣는 강아지가 되는 게 이득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따져보는 내가 싫어진다.
그렇지만.
‘그럴 수는 없어.’
스스로의 가치를 그렇게 떨어뜨릴 수는 없다.
한 번 품에 들어온 장난감은 언젠가 질리게 마련이다.
나는 겨우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다.
“당연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차희라 님. 개인의 스폰서가 되어 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회 차에 튜토리얼을 첫 번째로 공략한 저희 파티의 스폰서가 되어 주시라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김현성이나 정하얀은 틀림없이 성장할 겁니다. 대륙에서 손에 꼽힐 만큼 강자로 성장할지도 모르죠.”
“그래서?”
“네?”
“그래서 어쩌라고. 그들이 성장하든 말든 나랑은 별로 상관없어. 이미 내가 손에 꼽힐 만한 강자 중에 하나야. 우리 길드의 길드원 역시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고. 마법사가 탐이 나기는 하지만 골드만 뿌리면 마법사는 언제든지 고용할 수 있어. 마도 길드나 마탑의 마법사들을 당장 고용할 수 있는 자금력을 가진 게 붉은용병이야. 정하얀이 성장한다고 쳐도 최소 3년은 걸릴 텐데… 그때까지 내가 너를 스폰해 줄 이유가 있나?”
“…….”
“내가 필요한 건 붉은용병 소속의 마법사들야. 남이 가지고 있는 건 필요 없다고. 계속 말 같지도 않은 소리할 거면 그냥 얌전히 옆으로 와서 애교나 부려 봐. 가격은 섭섭하지 않게 쳐줄 테니까. 선물도 종종 챙겨 줄게.”
‘개….’
화대를 준다는 말은 정말로 당황스럽게 들려올 지경이다.
무슨 말을 해도 이쪽의 말을 장난으로 받아 던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품에 살짝 쥔 아티팩트를 천천히 꺼내든다.
뭔 짓을 하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잠깐이지만 눈에 이채가 생겨났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내 품속에 넣어 준 아이템이었으니까.
[마력 팬던트-희귀 등급]
[마력을 3 올려주는 팬던트입니다. 마법의 효과를 증폭시켜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서 발견됐는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딴 게 필요한 게 아니야.”
침대 옆에 툭 하고 떨어진 팬던트를 보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보내오는 것은 순식간이다.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
확실히 무리수를 던지기는 했지만 최소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다.
“골드도 아니고.”
“…….”
“내가 필요한 건 네 명성과 힘이야. 용병여왕 차희라라는 브랜드가 필요한 거지. 나도 이런 것들은 관심 없어.”
“너,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하고 있어? 신입에게 손을 대지 않는 건 모두가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내용이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네게 좋지 않을 거야. 좋은 조건이 계속해서 날아 들어오니까 네 위치가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당연히 알고 있어. 네 한마디면 이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도 알고 있고, 당장 어디 가다가 아무도 모르게 뒈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
“그래서 네가… 아니, 당신이 필요한 겁니다.”
천천히 말을 내뱉고 그녀를 바라봤을 때였다.
방안을 가득 채운 살기와 마력.
늙은이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압박감이 순식간에 치고 들어왔다.
“재미있네. 알고 행동하고 있어서 더 짜증 날 것 같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알겠어. 잠깐이지만 내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도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아서 흥미롭고…. 솔직히 말하면 정말 취향이야. 내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남자는 얼마 없거든…. 이런 대우를 받아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그것도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입한테….”
“…….”
“그래도 정도가 조금 지나쳤다는 건 인지하고 있는 거지? 있잖아. 본래 연금술이라는 건 등가교환이라고 하잖아. 나를 네 고기방패로 써먹을 거라면 그에 준하는 상품은 준비되어 있는 거겠지? 만약에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너는 네가 한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거야.”
말을 하는 것도 버겁다.
그렇지만 실패라고는 할 수 없다.
일단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지는 만들었다.
“말해.”
“첫 번째는… 앞으로 제가 만들 포션에 대한 지분입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품에 있는 영웅 등급의 서책을 꺼내들어 땅바닥에 집어 던졌다.
잠깐 동안 흥미롭다는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네가 그 정도로 대단해질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영웅 등급의 서책을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전부라면 조금 고달파질걸?”
“일 퍼센트…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겨우?”
“돈 방석에 앉으실 겁니다.”
믿도 끝도 없는 허세와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묘하게 신뢰가 가는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왜?
나는 목숨을 걸고 있으니까.
“두 번째는… 저희 파티와의 우호 관계입니다.”
“아까 말했잖아. 내 것이 아닌 거에는 관심이 없다고.”
“우리는 당신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겁니다.”
“사기꾼 새끼.”
“농담이 아닙니다. 우리는 강해질 거고 이 제국을 대표하는 길드가 될 겁니다. 붉은용병의 혈맹으로써 항상 당신의 곁에 있을 겁니다. 별것 아닌 투자로 당신은 이후의 저희와 좋은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어떤 길드나 세력보다 먼저.”
“지금 네가 하는 말이 혓바닥이 긴 놈들이 하는 개소리라는 건 알고 있는 거지? 투자비용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도 네가 만든 포션이 잘 만들어진다는 보장이나 너희 파티가 성장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
“세 번째.”
“…….”
“필요로 하시는 마법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개소리.”
“이번 튜토리얼에서 끝나고 나온 이들 중 최소 3년, 아니, 2년 안에 제대로 된 효율을 뽑아낼 수 있는 인원을 선발해 차트를 만들고 그 명단을 차희라 님에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용병 길드의 프로젝트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고 한다면 내 제안은 그녀의 구미를 당기고 있을 것이다.
“흥미롭긴 하지만… 가능한 일이야?”
“자신하고 있는 첫 번째 이유는 제가 얼마 지나지 않아 교섭권을 가지고 있는 파란의 간부가 된다는 점이고.”
“흐음….”
“두 번째 이유는….”
“…….”
“비밀입니다.”
“너.”
“연금술이라는 건 본래 등가교환이라고 하셨지요.”
내가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찾을 수 있다는 건 비밀.
그녀의 비호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모든 걸 까발리는 건 역시나 이쪽이 손해다.
조용히 있는 차희라.
내가 가지고 있는 비밀과 자신의 비호가 등가교환이 되지 않는다는 발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제발 만화에서 나오는 호탕한 캐릭터처럼 하하 웃어주며 이 자리가 원만하게 마무리됐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그러지는 않을 모양.
무척이나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해득실을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제기랄.’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는 비밀에 대해 추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 파티가 성장한다는 확신. 그리고 성장할 수 있는 마법사들을 찾아줄 수 있다는 것.
완벽하게는 아니겠지만 어쩌면 어느 정도 결론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너무 많이 풀었나.’
입술을 깨물고 있었던 그때였다.
“네가 만들 포션의 대한 지분은 1퍼센트가 아닌 3퍼센트로. 마법사에 명단은 물론 근접직군에 대한 명단도 함께 받도록 하겠어. 그리고 방식은 내가 정한다.”
“무슨….”
“내 비호가 필요한 거 아니었어? 그 누구도 너를 건드리는 일은 없을 거야. 대신 그 방식은 내가 정한다는 거야.”
“어떻게….”
“그건 오늘내로 알게 될 거야.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당연히 거절할 이유는 없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자고….”
이만 나가보라는 듯이 손을 휙휙 젓는 차희라의 모습이 보였다.
꽤나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이쪽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됐다.’
슬쩍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오자 차희라의 방을 향해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모두 근접직군으로 보이는 이들이다.
마음의 눈으로 한 번 그들을 살펴보자 붉은용병의 간부들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도 방금 있었던 대화에 대한 회의를 하려는 것.
이쪽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이야기부터 이기영 개인을 보호하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문제는 어떻게 보호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기분 좋게 붉은용병의 숙소를 나서는 순간 갑자기 떠오른 상태창에 메시지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칭호를 얻으셨습니다.]
“뭐?”
[칭호-용병여왕의 정부]
“제기랄.”
이 대륙에 넘어와 첫 번째로 얻은 칭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