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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45화 (44/1,590)

# 45

회귀자 사용설명서 045화

미친년(3)

“내가 죽으면 우리 희라 누나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늙은이가 입을 다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짓말이다.

아마 차희라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실소를 터뜨렸으리라.

차희라와 나는 어제 만난 게 처음이었고 별다른 이야기도 나누어 보지 않았으니까.

어처구니없는 개소리지만 이 개소리는 틀림없이 먹힌다.

아마 늙은이의 기억 속에 남는 장면이 있을 것이다.

‘있어야지. 무조건 있어야지.’

본의든 타의든 간에 나와 차희라는 접점을 만들었다.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보니 생각나는 게 있는 모양.

고개 숙인 영감이 보기에는 자극적인 장면이었을지도 모른다.

“무슨… 개소리를….”

“개소리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그 눈이 옹이구멍은 아닐 거야. 그렇지?”

“…….”

꽤나 얌전해졌다.

대충 질러본 것치고는 꽤나 효과가 좋다.

그만큼 붉은용병 길드의 차희라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가 무거운 모양.

애초에 차희라가 파란 길드와 별로 접점이 없다는 걸 전제로 찔러본 것에 불과했지만 내 생각이 맞았던 모양이다.

근력 97의 괴물을 건드리고 싶은 사람은 없는 것이 당연하다.

단순히 능력치의 문제도 아니다.

신성제국에서 가장 큰 대형 길드 중에 하나, 지금까지 봐왔던 인간 중 가장 높은 능력치와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가 바로 그녀다.

성향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걸 가정한다면 내 말이 정말인지 거짓인지 판별하기 이전에 그녀의 이름이 등장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섣부르게 넘겨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파란 길드의 상태는 바람에 꺼지기만을 기다리는 촛불과 다름없어 보였으니까.

‘본래.’

겁먹은 개가 가장 크게 짖는 법.

그건 저 할배와 나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차희라와는….”

“그건 당신이 알 필요 없잖아. 지구에서부터 인연이 있었든, 우리가 서로 사랑하든 사이든 간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중요한 건 교섭권을 가지고 있는 파란 길드가 이곳에 막 들어온 신입을 무력으로 겁박했다는 점이고 이게 외부로 알려지면 안 된다는 거지. 영광스러운 파란 길드도 희라 누나 이름이 나오면 움찔할 수밖에 없나보네.”

“…….”

“이곳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변에 적이 없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나마 가지고 있는 교섭권도 타 길드로 넘겨주고 싶은 건 아닐 테고, 도대체 당신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네. 나는 이곳에 싸우러 들어온 게 아니라 협상을 위해서 들어온 거야. 아무리 과거의 영광에 취했다고는 해도 상급자의 말을 무시하면서까지 이런 태도를 취하는 건 누가 봐도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 아니면, 이제 그 문제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상황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건가?”

“네놈….”

나도 모르게 자꾸만 버릇처럼 히죽이게 된다.

정확하게 차희라의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이곳을 점령하던 마력의 옅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아무 의미 없는 말싸움의 경우에는 지나치게 흥분한 쪽이 지는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후우…. 만약에 파란 길드가 가족같이 자유롭고 엿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거라면 대성공, 아니… 대성공이라고 말해주고 싶군요.”

“…….”

“한 집단을 망치는 건 당신 같은 사람입니다.”

“뭐?”

“고여 있는 물 말입니다.”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게 있는 법입니다. 이설호 씨. 당신이 저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를 내리든 간에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가치가 있는 쪽이 김현성과 정하얀이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고요. 저를 탐탁지 않아 하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네. 그렇고말고요. 십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

“그렇지만 적당히 하셨어야죠. 아무리 이 대륙이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곳이라고 한들, 당신의 행동은 충분히 무례한 행동입니다. 저는 아직 당신의 하급자가 아닙니다.”

“이놈이 그래도!”

흥분한 늙은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쾅!

하는 소리에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흥분한 것 같은 이설호 역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뻔할 뻔자. 하급자의 개짓거리를 보다 못한 이상희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친 것이다.

“이설호.”

“이, 이상희 님….”

“지금 본인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는 겁니까?”

“그것이….”

“근신입니다.”

“네?”

“근신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 길드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물론 기영 씨에게 사과를 드린 이후입니다.”

이렇게 될 거라고 대충은 예상했다.

과거의 영광에 취한 꼰대의 돌발행동에 길드의 중심에 있는 그녀가 취해야 할 수 있는 행동은 단 하나다.

“저는… 길드를 위해서….”

“사과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 말씀드리지 않을 겁니다. 이설호 씨.”

아마 고개를 숙여올 것이다.

보통 저런 족속들은 강자에 약한 법이니까.

예상대로 표정을 구기는 늙은이의 모습이 보인다.

새삼 복잡한 표정, 배신당했다는 표정이기도 했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설호가 이 상황을 이해하고 말고는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예상했던 대로, 천천히 이쪽을 바라보는 이설호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물론, 고개를 숙여오는 것도 보인다.

“무례한 언사에… 사… 과드립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저 역시 다소 흥분했었습니다. 사과드리도록 하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과를 한 사람의 표정이 아니다.

다급하게 밖으로 나가는 꼴이 꽤나 가관이다.

조금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 어딘가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

싱긋 웃으며 이상희를 바라보자 그녀 역시 허리를 숙여오는 것이 보였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길드원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제 부주의였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

‘된 사람.’

이상희 그녀는 된 사람이다.

단순히 보여주는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민망할 정도로 고개를 숙여오고 있다. 당연하지만 파란 길드와 척을 질 이유는 없다.

더 이상 압박한다고 해도 무언가가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리라.

“아뇨. 오히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어떻게 저희를 비난하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부디….”

“계약에 관련된 문제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제가 무례했었습니다.”

“아….”

“파란의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프라이드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이야기를 꺼낸 것 같습니다. 협상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길드의 상처를 들쑤시는 발언은 해서는 안 됐습니다. 이설호 씨의 행동은 어떻게 생각해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저 역시 잘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아… 혹시 차희라 님과는….”

“운 좋게 작은 인연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제가 누나와 잘 알고 지내는 것도 아마 파란에게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 말은 혹시… 계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는지요.”

“물론입니다. 계약 조건 역시 15,000골드가 아닌 10,000골드로 합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네.”

“파란 길드의 주요 간부직을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

“제가 어째서 이런 제안을 드리는 지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아까와 같은 개 같은 상황이 한 번 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저런 늙은이들이 한 명만 있으리라는 보장 역시 없다.

어쩌면 조직적으로 단합하고 이쪽을 엿 먹이려고 할지도 모른다.

보통 기득권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법이니까.

납작 엎드릴 생각은 없다.

정치 싸움이라면 오히려 환영해 주고 싶을 정도다.

그 기반을 위해 필요한 권력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말뿐인 지위라고 해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아마도 받아들인다.

내 가치가 아까보다 더 올라갔다고 판단하고 있을 테니까.

일단 이쪽이 그 용병여왕 차희라와 접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우리 파티를 영입하면 파란은 붉은용병에게 비벼볼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게 된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말이다.

혹시나 내가 붉은용병의 간자일 확률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는 것 같지만 붉은용병이 굳이 파란을 건드릴 이유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손을 잡는 것은 굳이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이득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고인 물….’

길드를 갉아 먹는 고여 있는 물들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도 우리가 적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녀로서는 통제 불능의 꼰대들이 꽤나 골칫거리일 터.

방금 전의 돌발행동을 생각해 본다면 이 길드는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무력과는 조금 다른 문제.

주요 간부직을 내놓으라고 제안한 것은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녀와 길드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내가 해결해 줄게.’

라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그녀가 원하는 결과물과 내가 원하는 결과물의 차이야 존재하겠지만 썩은 물을 정화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네.”

“계약금 같은 경우에는 저희가 최대한 맞춰 드릴 수는 있습니다. 주요 간부직 역시 아예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마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큰 직급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보여 조심스럽습니다. 제 말이 맞는지….”

구태여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웅 등급의 아이템 같은 경우에는 당장은 힘들 수도 있다는 걸 미리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을 마련해 주신다면 가능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

‘생각보다 귀하구나.’

영웅 등급의 아이템이 내 생각보다 값어치가 조금 더 나가는 모양이다.

김현성의 마법 가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온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위 등급의 아이템을 조금 우습게 봤었다.

“아이템은 곧바로 지급해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당장 쓸 수 있는 장비가 아니라면….”

“아! 그렇다면 내부 회의를 거친 이후에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물론입니다. 쉽지 않은 결정인 만큼 천천히 생각해 주셔도 됩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이쪽을 받아들이냐에 대한 회의는 아닐 것이다.

이미 그건 어느 정도 확정된 이야기.

어떤 아이템을 지급하느냐에 대한 것과 어느 정도의 지위를 보장해 줘야 하는지가 쟁점이 될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회의 내용을 들어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 있는 시간도 여유도 없다.

“그럼 저는 이만.”

“네. 감사합니다, 기영 씨. 그리고 다시 한번 아까의 무례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오늘 친 말도 안 되는 구라를 진실로 탈바꿈시켜야 되기 때문이다.

‘차희라….’

영감탱이에 말 그대로.

내가 너무 물렁하게 생각했었다. 이 대륙에서는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잘나가던 김현성이 갑자기 뒈질 수도 있고, 정신 나간 늙은이가 나를 노리는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파티만 믿고 가기에는 위협이 많아 보이는 것이 현실.

‘뒷배는 있어야 돼.’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줄 수 있는 빽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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