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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44화 (43/1,590)

# 44

회귀자 사용설명서 044화

미친년(2)

-이기영 님께서는 준비가 되면 신호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살짝 손을 들어 올리자 곧바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2층에서는 김현성과 박덕구, 정하얀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중.

이곳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되니 조금은 긴장되기는 했지만 솔직히 색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된다는 부담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애초에 길드의 중역들도 내게 크게 기대하고 있진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비됐습니다.”

오히려 신경 쓰이는 것은 정하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묘하게 조용한 모습은 괜스레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옆에서 더 화를 내주는 박덕구의 존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도는 어제 있었던 일을 없던 일로 하고 싶다고 말하는 듯했다.

‘불안해….’

어째서 그 미친 여자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감이 온다.

나를 이성으로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마 자신에게 살기를 풀풀 뿜어대고 있었던 정하얀을 놀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물론 경고의 의미도 있기는 했었겠지만 대형 길드의 수장에게 살기를 보낸 것에 대한 벌을 내 입술로 퉁 친 거라면 나름대로 싸게 먹힌 셈이다.

방식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솔직히 그 미친 여자에게는 감사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당장 검을 뽑아 목을 날리지 않은 걸 고마워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조금 복잡해지는 머리를 환기시키고 천천히 바닥에 연성진을 그리기 시작.

다소 복잡한 과정이었지만 이미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마법진이다.

‘비효율적이야.’

마력이 적게 들다 뿐이지 확실히 비효율적이다.

그렇지만 연성진이 완성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꽤나 익숙한 모습으로 보이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몇몇이 보였다.

“주여, 나, 바라노니, 내 목소리에, 답하라.”

마력의 탑을 쌓는 것은 연성진 쪽.

영창을 외우자 마력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불기둥.”

주문과 함께 연성진 쪽에서 솟아 오른 불기둥이 표적을 태운다.

내 마력으로 낼 수 있는 화력은 아니다.

꽤나 화려한 이펙트, 연성진의 도움을 받으니 확실히 가지고 있는 마력 이상의 효율을 낼 수 있다.

“후우….”

앞전에 있었던 박덕구, 어제 있었던 김현성과 정하얀 정도의 환호성은 들리지 않는다.

다만.

짝짝짝.

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보내고 있다.

나쁘지 않은 시연이었지만 당연히 박수를 받을 정도는 아니다.

저들이 원하는 건 하나.

아마 우리 파티의 비선실세로 보이는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함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이기영 님의 시연이 마무리되었습니다. 귀빈들께서는 모두 절차에 맞게 움직여 주시기 바랍니다.

어제와 마찬가지.

절차 따위는 개나 주라는 듯한 느낌으로 이쪽에 몰려들고 있는 귀빈들과 스카우터들이 보인다.

“사성 길드를 운영하고 있는 이연희라고 합니다. 잠깐 이야기를… 아니, 일단 명함부터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클랜의 클랜 마스터 정종철이라고 합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고영수입니다. 저희 클랜은 이번에 생겨난 신생 클랜으로 조건은 다소 부족하겠지만 성장 가능성은 그 어떤 클랜이나 길드보다….”

“마도 길드의 대표 박혜수예요. 잠깐 이야기 좀 나누고 싶은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도 일이다.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잠재 고객.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클랜이든 아니면 몰락한 길드든 간에 모두가 전부 중요하다.

명함을 받고 형식적인 이야기를 나눈다.

“만약에 파란 길드와의 계약하지 않으실 거라면….”

“네. 이후에라도 모두 함께 꼭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길드도.”

“예. 언제 한번 시간이 되시면 식사라도 함께하도록 하시죠.”

“앞으로 어느 길드로 가시던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합니다.”

“네. 먼저 연락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형식적인 인사기는 하지만 그것이 나쁘지만은 않다.

한두 마디 나눈 게 뭐가 대수냐고 물어본다면 굳이 할 말은 없지만 인간관계라는 건 이런 게 중요하다.

“재미있는 방식의 시연이었어요.”

‘재미는 개뿔….’

“연금술사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하하하.”

‘거짓말.’

“모두 감사드립니다. 다른 파티원에 비해서 보여준 것이 없어 조금 민망하군요.”

그래도.

이런 게 사회생활이라는 거다.

인파를 뚫고 나오자 이쪽을 바라보는 이상희와 파란의 중역들을 볼 수 있었다.

당연히 일그러진 얼굴이다.

처음 협상부터 꼬였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김현성도 이쪽의 말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 당연하다.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얼굴을 볼 기회가 많았다.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고, 대륙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듣는 시간들도 가졌다.

우리 파티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봤다면 당연히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김현성 파티 내에서 이기영의 위치가 생각보다 높다는 것.’

“잠깐 이야기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협상 조건에 대해서 다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물론입니다, 이상희 님. 환영하고말고요.”

“안쪽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예.”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은 심정이다.

정하얀, 박덕구, 김현성은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다.

저번에 협상을 나눴던 방으로 들어가자 솔직히 저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다소 건방졌던 할배들 역시 이쪽의 눈치를 보는 느낌.

‘좋네.’

이런 게 권력인가 싶기도 하다.

“일단은 첫 번째 협상의 조건을 급하게 조정하는 데에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일반 신입들에게는 계약 조건이 후할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시연회에서 보여주신 모습들을 보니, 저희가 이기영 님을 비롯한 분들을 과소평가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아. 괜찮습니다. 당연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검증되지 않는 이들에게 투자하는 건 한 집단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지양하는 게 당연하니까요.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아. 이해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

“알게 모르게 여러 곳에서 제안을 받으셨을 겁니다.”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저들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네. 그렇습니다.”

“다른 길드에게 어떤 제안을 받으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희 파란 길드는….”

뭐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지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지만 굳이 듣지 않아도 뻔할 것이다.

대줄 수 있는 금액은 부족할 수도 있지만 성장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

파란 길드만의 차별점이나 지원해 줄 수 있는 특별한 조건, 어떻게 우리를 성장시킬 건지에 대한 계획과 어떤 식으로 지원해 줄지에 대한 것.

안 들어도 뻔하다.

“타 길드에 비해 금액은 부족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파란 길드는 여전히 신성제국에 있는 네임드 길드 중에 하나입니다. 만약에 파란 길드 소속이 되신다면 파티에게 따로 예산을 책정해 드릴 수 있도록… 아, 그것만이 아닙니다. 파란 길드의 간부직도….”

“구체적으로는….”

“아직 구체적으로는 대답해 드리기는 힘들겠지만 최선을 다해….”

“그렇군요. 조금 더 자세한 계약 내용을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조금 기뻐 보이는 표정이다.

“계약금 만 골드 그리고 연봉 삼천 골드가 저희가 맞춰드릴 수 있는 조건입니다. 계약 기간은 10년으로… 연봉 협상은 매 년마다 새롭게 갱신할 수 있도록 하는….”

“한화로는 10억이로군요.”

“네.”

붉은용병에 비해서는 반절이 떨어졌다.

물론, 붉은용병 길드 같은 경우에는 김현성과 박덕구를 포함하지 않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연금술사가 돈이 많이 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계약 기간이 3년이나 늘어났다는 것.

아무래도 우리가 성장한 상태를 보고 싶은 모양이다.

처음 부른 금액이 저 정도라면 어쩌면 조금 더 올릴 여력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차희라 같은 경우에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었으니까.

원래 계약이라는 건 아쉬운 놈이 비비게 되어 있는 법이다.

나는 살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계약금 15,000골드. 한화로는 15억. 이게 저희가 바라는 계약 조건입니다.”

“아….”

“추가로 최소 영웅 등급의 연금도구 지원과 사냥했을 때 나오는 부산물의 조정, 정하얀에게는 영웅 등급의 마법서와 박덕구, 김현성에게도 마찬가지로 영웅 등급의 기본 장비를 지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그게….”

“투자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저희 파티는 더욱 성장할 겁니다. 굳이 연봉에 집착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저희의 성장이 가속화될수록 파란 길드 역시 성장하게 되겠지요. 어쩌면 여러 길드에서 투자를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저희의 사정상….”

“골드가 필요하시면 1차 교섭권을 타 길드에게 판매하시면 됩니다. 파란 길드는 지금 골드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곡을 찔렸다는 표정이다.

“길드 마스터.”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길드 마스터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당연히 눈치챌 수 있다.

튜토리얼 던전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지각 변동 덕분에 중소 길드는 물론, 대형 길드의 마스터들도 출두 하셨다.

당장 차희라만 봐도 이쪽에 집적 제의를 하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란의 길드 마스터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현재 길드 내부적으로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된다.

“알고… 계셨군요. 혹시 누군가에게….”

“단순한 추론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당연히 할 수 있는 생각이지요.”

뭔가 척척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파란은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

길드 마스터를 포함한 길드의 주요 전력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아마 간부급 이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우리의 등장은 무척이나 반가울 것이다.

조금 실수했다는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은 바로 그때.

“건방진….”

이상희가 아니다.

옆에 있는 늙은이 한 놈이 지나치게 흥분한 것 같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

“우리는 네놈에게 투자하는 것이 아니다, 연금술사.”

“설호 씨. 지금! 무슨 짓을!”

“저희 파란 길드가 저런 놈한테 농락당할 정도로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이상희 님.”

‘저….’

“아직까지 이곳에 들어온 지 1년도 안 된 애송이 아닙니까. 아무리 굽히고 들어갑니다만 저런 놈에게까지 굽힌다니요!”

“마력을 거두세요!”

‘제기랄….’

살기나 마력이라는 게 어떤 건지 이해가 간다.

방 안을 가득 점령한 늙은이의 마력 때문인지 몸이 떨리기 시작, 숨을 쉬는 것마저 쉽지 않다.

‘죽는다’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마력을 거두라고 말했습니다! 이설호!”

“이 쓰레기 같은 놈이… 네놈 같은 놈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주제에 날뛰는 놈들 말이다. 이곳에는 아주 다양한 사람이 들어오지. 그동안 내가 이 대륙에서 살아오면서 너 같이 쥐새끼 같은 놈을 못 봤을 것 같아?”

“으….”

“너희 같은 놈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건 일도 아니야. 이 대륙에는 항상 위협이 넘치고 흐르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 누구도 모른단 말이다. 지구와는 다르다. 멍청한 애송이 놈이… 감히 하늘 높은지 모르고 날뛰어? 감히 파란에게… 감히!”

‘죽어.’

정말로 죽는다.

숨을 쉬기가 힘들어질 지경이다.

도대체 이게 뭔 상황인지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거지같은… 늙은이가….’

당장에라도 방문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뭐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시점에 놓여 있을 때 여러 가지 선택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해봐, 이 미친 늙은이야.”

“뭐?”

“해보라고 이 미친 늙은이야. 죽일 수 있으면 죽여보라고.”

“네놈이 감히!”

“이설호! 제 말이 말 같지 않습니까?!”

어떻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난장판이 된 장내의 한가운데, 나는 한 글자씩 또박 또박 내뱉었다.

“미친 늙은이가….”

“네놈!”

“내가 죽으면 우리 희라 누나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늙은이가 입을 다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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