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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20화 (20/1,590)

# 20

회귀자 사용설명서 020화

사고

“혜영 씨?”

“네, 지혜 씨. 이야기 듣고 있어요.”

“기영 씨한테 가보세요.”

“네?”

“아무래도 기영 씨 같은 분들에게 여러 가지로 편의를 봐드리는 게 좋을 것 같거든요. 오늘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말이에요.”

“무슨 뜻인지 저는 잘….”

“그건 혜영 씨가 받아들이기 나름이에요.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시면 됩니다. 단순히 말 상대가 되어도 상관없고… 아! 몸종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

“마지막 말은 농담이에요. 그렇지만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수도…. 지금 이쪽 상황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거든요. 먹을 수 있는 자원이 없다는 것도 그렇고 사냥을 나갈 수 있는 인원이 한정되어 있다는 게 그렇죠. 주변 괴물들을 현성 씨가 주기적으로 정리해 준다고는 하나 언제 다시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게 현실이죠. 사냥을 나갔던 인원들이 죽어서 돌아오지 못할 확률도 생각해야 하고 앞으로 일어날 여러 가지 일에 대처해야 하지 않겠어요?”

“…….”

“능력 있는 남자와 접점을 만들어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예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하나쯤 보험을 만들어 놓는 게 좋잖아요? 일이 잘 풀리면 혹시 모르죠. 당신도 정하얀 씨처럼 특별 취급을 받을 수도….”

“무슨 뜻인지 알겠네요.”

“아! 그리고 다음 사냥에는 하얀 씨를 데리고 나간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혜영 씨가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여러 가지로 말해주신 건 고맙지만… 저한테 이렇게까지 호의를 보여주시는 이유가 따로 있나요?”

“글쎄요. 단순한 호의예요. 다만 일이 잘 풀리면 이쪽도 한번 신경 써 주셨으면 하고 말씀드린 거랍니다. 저는 도박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거든요.”

* * *

‘나쁜 년.’

이지혜 망할 년.

속으로는 계속해서 이지혜에게 욕을 내뱉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실수는 어차피 이쪽이 저지른 상황이었으니까. 아니, 애초에 모든 것이 이쪽의 선택이었다.

이지혜의 말에 동의한 것도, 이기영을 따라 나선 것도 모두 모르모트 생쥐가 될 걸 예상하고 저지른 일들이었다.

처음에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고 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걸 어필하기 위해 무리하게 창을 휘두른 게 큰 실수였다.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터져 나온 비명은 그것보다 더한 실수다.

계속해서 앞으로 들리고 있는 이기영과 박덕구가 보였다.

이기영은 끊임없이 입으로 주문을 외우고 있었고 박덕구는 커다란 방패로 달려 들어오고 있는 괴물들을 밀어낸다.

아까의 공포 때문인지 다리가 후들 후들 떨려왔지만 주저앉을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

‘죽을 거야.’

다리를 멈추지 않으면 죽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옆을 살짝 바라보니 정하얀 역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게 보였다.

‘병신….’

어쩌다 운이 좋아 이기영의 눈에 띄었고 어쩌다 운이 좋아 이 자리에 합류하게 됐다.

저 여자처럼 운이 좋은 여자도 여기에 없을 것이다.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 자신은 살아 돌아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 뻔할 뻔자.

자신이 정하얀을 위한 교보재가 되어준 것이라고 생각하자 입 안에서 쓴 맛이 느껴졌다.

애초에….

어떻게 저렇게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괴물 앞에서도 묵묵히 칼과 창을 내지르는 김현성, 이기영, 박덕구도 물론 대단하다.

자신 같은 경우에는 손의 감촉이나 죽을지도 모르는 공포심을 이기지 못했으니까.

조금 쉬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우스워질 정도다.

그렇지만 정하얀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저 여자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곳에 나와 있는 게 처음이었고 괴물들을 직접 마주한 것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저 눈에 틀림없이 공포심 따위는 들어가 있지 않았다.

계속해서 혼잣말을 하는 모습에 혹시 미친 것은 아닌지 생각했지만 동요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어.’

이 튜토리얼이라고 불리는 현실 속에서는 생존을 위해 힘을 키워야만 한다. 혼자 힘으로는 당연히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기영과 김현성을 이용했다.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낙인이 찍힌다면 저들과 같은 힘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물론, 찬밥신세가 될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남은 방법은 하나.

‘어떻게든 비벼야 돼.’

살아 돌아간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영과 끈을 만들어 놔야 한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써서라도 달라붙어 있어야 했다.

물론, 옆에 있는 정하얀의 존재가 거슬리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주리라.

누가 봐도 이 멍청한 여자보다는 이쪽이 조금 더 나으니까.

입술을 깨물고 계속해서 달리던 와중, 왼쪽으로 향하던 박덕구와 이기영.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언제부터?’

분명히 그들의 뒷모습만 쫒으며 달리고 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언제부터, 어째서,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건지 기억을 더듬어 봐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정하얀 역시 가로 막혀 있는 벽면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기영 씨랑 덕구 씨가 어디로 간 건지 알고 있어?”

조심스레 말을 걸어봤지만 묵묵부답.

애초에 물어본 게 실수였다.

‘머저리 같아가지고….’

자신조차 그들을 순식간에 놓쳐 버렸다.

하물며 옆에 있는 맹한 년이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마 이 여자 역시 자신만 따라오고 있었으리라.

“게에에엑.”

조금 멀리서 들려온 괴물의 목소리.

순간적으로 몸이 덜덜 떨려온 것은 당연했다.

어디론가 향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쯤 기영 씨도 자신들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눈치챘을지 모른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버티거나 기다린다면 분명 우리들을 찾으러 올 것이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뭔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는 정하얀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음을 넘어 실소가 나올 지경.

“빼앗으려고 하는, 내 적들에게, 지킬 수 있는, 힘을.”

누군가에게 기도라도 올리는 것 같았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런 여자에게 신경 쓰고 있는 이기영 녀석도 어떻게 생각한다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바람 칼날.”

쉬익-

하는 바람을 찢는 소리가 들려온다.

“입 닥쳐, 이 머저리야. 괴물 목소리 안 들려?”

살짝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던 때였다.

‘어?’

몸의 균형이 갑작스레 무너지기 시작한 것.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땅바닥으로 꼬꾸라진다.

동시에 왼쪽 다리에서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격통이 느껴졌다.

붉은 혈액에 몸이 떨어지며 철퍽 하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고 왼쪽 다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 저 먼 곳에 있는 것이 보인다.

‘무슨… 일이….’

판단을 내리기 전에 입에서는 비명이 터졌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누, 누가! 누가 나 좀… 살, 살려주세요. 살, 살려줘!”

“소, 소, 소용없을 거예요. 혜, 혜영 씨.”

“내, 내 다리… 내 다리….”

“마, 마력으로 음, 음성을 차단했거든요. 아마도 들리지 않을 거예요. 괴, 괴물들도 이곳에 올 염려도 없으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제발 도, 도와줘 제발….”

“생, 생각보다 멍, 멍청하시네요. 혜영 씨는…. 오, 오빠한테 폐를 끼치고… 나들이도 엉, 엉망으로 만들었어요.”

“입 닥쳐. 제기랄! 아파… 아프다고! 지금 내 다리 안 보여? 빨리 기영 씨를 데리고 오든 아니면….”

계속해서 화끈거리는 다리를 손으로 부여잡는다.

울컥울컥 피가 나오고 있는 바람에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겉옷을 벗어 황급하게 출혈 부위를 동여매기는 했지만 이게 제대로 된 응급처치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을 지경.

턱이 덜덜 떨렸다.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은 당연지사.

애초에 어째서 다리가 떨어져 나간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은 이해하기도 싫다.

다만 이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파악하는 것 그게 가장 중요했다.

마치 불에 덴 것 같은 고통이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는 상황.

흘러나오는 눈물 때문에 시야가 불명확하다.

살짝 위를 올려다봤을 때 눈에 비친 건 이쪽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

‘어?’

손에는 무언가 이질적인 힘으로 이루어진 것을 들고 있다.

‘바람의 칼날.’

이라는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뇌리에 꽂힌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한쪽 손을 중심으로 녹색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것을 분명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어째서? 왜? 어떻게 저 여자가?’라고 떠올리기도 전에 느껴진 것은 본능적인 공포.

“아… 하, 하얀 씨….”

“네. 혜영 씨.”

“갑자기 왜, 왜 그러는 거야.”

“저, 저도 이, 이러기는 싫었어요. 그, 그래도 어쩔 수 없었는걸요. 당신이 자꾸 우, 우리 오빠를 빼앗으려고 하니까. 어, 어쩔 수 없었던 거예요. 저도 좋아서 이, 이러는 게 아니라고요.”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모르는 척하면 싫은데…. 혜영 씨가 먼, 먼저 우리 오빠한테 꼬, 꼬리쳤잖아요? 빼, 빼, 빼앗아 가려고 했잖아요? 빼앗아 간다고 말했잖아요?”

‘미… 쳤어.’

제정신이 아니다.

어째서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당황스러웠다.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확실히 미쳤다. 조금이지만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모습은 무언가 광기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건… 그냥 한 소리였어.”

“거짓말.”

“정말이야….”

“거짓말이에요. 제, 제가 얼마나 아팠는데요? 당, 당신이 오빠랑 이야기하고 오, 오빠랑 손을 잡고 오, 오빠한테 기댈 때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아마 당, 당신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을 거예요.”

“나, 나도 이해할 수 있어. 으응… 이, 이해할 수 있어. 그러니까 나, 나 좀 도와줘. 다, 다시는 너, 너희 오빠 앞에는 얼씬도 안 할 테니까.”

“미, 미안해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역시 안, 안 되겠어요. 혜영 씨도 나처럼 아파야 해요. 오빠를 빼앗아가려고 한 건 정말로 용서할 수 없어요. 그리고 당신이 살아 있으면 내, 내가 너무 불안하니까….”

“꺄아아아아아아아악!”

뭔가 피슉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한쪽 팔이 잘려져 나간다.

엄청난 격통이 느껴졌다.

발버둥 쳐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단 생각만 들 뿐이었다.

기어서 나가겠다고 발버둥 치기는 했지만 공포심과 고통 때문에 그것 역시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살, 살려 줘. 제발… 제발 내가 다 잘못했어. 살려줘. 제발… 아으아아아.”

“안, 안 된다고요. 그러면 마, 마음 약해지니까….”

“제발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읍! 읍!”

“마, 마법으로는 이런 것도 가능하데요. 시끄러우니까 입을 막아 놓는 게 좋겠어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뭔가 이질적인 힘이 목을 조르는 느낌. 눈에서 계속해서 눈물이 쏟아진다.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계속해서 발버둥 쳐보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읍… 읍! 읍!”

“그, 그러니까 미, 미안해요.”

계속해서 꿈틀거렸던 그때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얀아?”

“오, 오빠.”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 이기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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