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1화
#89 이이제이(以夷制夷) (2)
내 말에 김석훈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 녀석이 우리 뒤를 캐고 있다고?”
“네.”
“일단 앉아, 앉아서 얘기하지.”
나는 김석훈의 말에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늙은이 취향이, 참. 도가니도 아슬아슬할 나이인데 꼭 불편하게 앉아야 하는 다도실을 좋아하다니. 속으로 그렇게 욕을 내뱉은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설록진 의원이 저희와 척을 지려는 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약점을 하나 들고 있어서 나쁠 것은 없다는 판단이겠지요. 의원님께서 자기를 밀어주는 걸 알고는 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하아.”
내 말에 김석훈은 짧게 혀를 찼다. 나는 김석훈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설록진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설록진은 신의를 모르는 인간이다. 인간이라면 으레 느낄 감정 또한, 그는 느끼지 못했다. 설록진이 느끼는 것은 오로지 파괴적인 행동에서는 자극적인 쾌락뿐.
그와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설록진의 미숙한 시절을 아는 김석훈이라면 내 말이 아주 허황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거다. 그러니 내게 진지한 표정으로 이리 묻는 거겠지.
“그래서 그 녀석이 뭘 캐냈나? 별 게 아니었다면 내게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테니, 제법 대단한 걸 캐낸 모양이야?”
그 말에 나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말을 이었다.
“양양시 저택이요. 설록진이 그곳에 있던 사람에 대한 정보를 알아낸 모양입니다.”
금찬명을 ‘도련님’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왜냐, 김석훈은 레이의 말대로 그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으니. 그러니 대신 선택한 단어가 ‘양양시 저택’이다. 내가 뱉은 말에 김석훈은 바로 내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어떻게?”
“죄송합니다만, 저도 어디에서 정보가 샜는지는 아직까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확실한 건, 설록진 의원이 양양시 저택에 대해서 알아냈고…….”
“거기에 있었던 녀석에 대해서도 알았다?”
“예.”
내 말에 김석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야, 이 일은 절대로 퍼져서는 안 되는 그의 치부였기 때문이다. 나는 침착히 말을 이었다.
“최대한 어디에서 정보가 샜는지 파악하고 다른 곳까지 퍼지지 않게 특별히 지시해서…….”
내 이어지는 말에 김석훈이 손을 들어 올렸다.
“설록진 의원, 그 친구만 아는 게 확실한가?”
그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석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웃어? 지금 이 상황에? 내 어리둥절한 표정에 김석훈이 말을 이었다.
“맞아. 자네 말대로 이건 심각한 일이지. 절대로 퍼져서는 안 되는 일이고. 하지만 말이야. 아는 게 설록진, 그놈뿐이라면 아직까지는 괜찮아. 왜냐, 그 녀석은 절대로 이 정보를 풀지 못하거든. 내가 망하면, 자기도 망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말이지.”
‘그’ 김석훈 전 대통령에게 사생아가 있었고, 그 사생아의 살해를 직접 지시했다는 건 단순히 김석훈에게만 치명적인 정보가 아니었다. 미리내당이 현재 여당을 계속해서 할 수 있는 데에는 분명 김석훈의 후광이 존재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김성득 의원 때에는 직접 나서서 김성득 의원을 성토하지 않았습니까?”
“쇼지, 쇼. 성득이는 다른 곳에서 고발을 당했으니 말이야. 적당히 선을 긋고 자기 자리를 보전했어야지. 하지만 난 달라. 누군가 나를 고발하면 모르되, 제 손으로 나를 꺾을 순 없을 게야.”
그렇게 말한 김석훈은 손가락으로 툭툭 제 무릎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오히려 그놈은 필사적으로 이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게 막아야 하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는 거지. 지금 이 상황에 설록진은 적이 아니야. 우방이면 우방이지.”
설록진은, 김석훈이 직접 키운 인물이었다. 김석훈이 흔들리면, 본인도 흔들린다.
그걸 알기에 김석훈은 자신했다.
“나를 공격하기 위해 내 뒤를 캔 게 아니야. 기껏해야 네 말대로 내 약점을 하나 들고 있어서 나쁠 건 없다는 판단이었겠지. 적당한 비밀이었더라면 딱 좋았을 테지만, 이 정도의 비밀은 오히려 부담스럽지. 나를 쥐고 흔드는 정도가 아니라 나를 몰락시킬 테니. 그러니 내가 말한 대로 절대로 녀석은 이걸로는 나를 건드릴 수 없을 거야.”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젠장, 내가 이 정치인 놈들을 너무나도 과소평가해 버렸다. 당연히 내 말에 바로 넘어와 설록진을 가만히 안 두겠다고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내 표정을 살핀 듯, 김석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배신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하지만? 어깨를 으쓱인 김석훈 의원이 말을 이었다.
“내가 가르친 게 이런 것인데, 그놈을 탓하기는 조금 그렇지. 자네도 알잖은가. 그 녀석이 처음에 얼마나 볼품없었는지. 그놈을 지금 여기까지 끌어올린 건 나야. 이 세상을 살아갈 방법을 알려 준 것도 나고. 내가 가르쳐 준 대로 아주 잘살고 있는데, 이걸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
‘설록진의 볼품없는 과거’ 따위 나는 몰랐다. 이상할 정도로 언론에는 설록진의 과거가 알려져 있지 않았으니까.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설록진의 인생은 정계에 입문한 20대 초반 이후의 것뿐. 그 전의 과거는 오리무중이었다.
‘내가 가르친 대로’라고? 도대체 인간을 어떻게 키웠길래 설록진이 이 꼴이 된 건데! 나는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말을 꾹 참았다.
내가 뒤집어쓰고 있는 ‘정태석’은 설록진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 생각을 머릿속에 새기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예, 의원님께서 자기를 거둬 준 은혜를 안다면 감히 의원님을 배신할 생각을 하지 않겠죠.”
“그래, 부모도 없이 버려진 그놈을, 길바닥에서 죽어갈 운명이었던 그놈에게 손을 내민 건, 그놈의 진가를 알아본 건 나뿐이니 말이야. 아무것도 없는 놈을 먹이고 입혀 사람 꼴로 만들어주고, 차후 이 대한민국의 대통령까지 넘볼 수 있는 위치로 키워 낸 게 나인데. 감히 나를 배신한다?”
김석훈은 고개를 저었다.
“내 뒤를 캔 게 괘씸하기는 하지만, 나를 친다는 건 곧 자신의 미래를 잘라 내는 짓이라는 걸 모를 만큼 아둔한 녀석은 아니야. 그런 짓은 하지 않겠지.”
김석훈의 대답에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이 사실을 알려 주면, 김석훈과 설록진의 사이가 벌어질 줄 알았는데.
그냥 이대로 끝이라니.
“이 일을 이대로 묻어 두실 생각입니까?”
내 질문에 김석훈이 말했다.
“괜히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내면, 긁어 부스럼이 될 게 뻔하지 않은가.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정치인이라면 상대가 누구든, 한 방을 가지고 있어야 하긴 하잖나. 상대가 나라고 해도 말이야.”
김석훈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정치인이었다. 차라리 내가 설록진이 ‘금찬명’을 데리고 있다고 말했다면 상황은 지금과 달라졌을 거다. 금찬명의 존재 자체는 문자 그대로 살아 있는 위협이고, 김석훈은 어떻게든 그를 처리하려고 들었을 테지.
하지만 금찬명의 생존을 밝힌다는 건 금찬명, 나아가 백도산까지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 패를 깔 수는 없었지.
이 모든 건 내 오판이다.
저 더러운 녀석들이 겨우 이 정도로 갈라질 거라고 생각하다니.
그러니 나도 더러운 수로 너희 둘을 갈라놓을 수밖에.
나는 마력을 끌어올리고 김석훈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설록진 의원이 노리는 게 의원님이 아니라, 도련님이라면요?”
김석훈의 약점은, 바로 그의 늦둥이 아들이다.
“영호? 영호를 말하는 건가?”
“예.”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의원님께서는 설록진 의원에게 방해가 되지 않겠죠. 의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미 은퇴하신 지 오래고, 정계에서 물러나신 상황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도련님께서는 다르지 않습니까.”
김영호의 꿈은 아버지를 따라 정계에 입문하는 거였다. 정계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셋 중 하나가 되기 마련이다. 적당히 현실에 타협하고 꿈을 꺾든가, 적극적으로 권력에 붙어먹은 썩은 인간이 되든가, 아니면 자신의 꿈을 좇다 산화하든가.
셋 모두, 그리 바람직한 삶의 모습은 아니다. 허나 김석훈은 자신의 아들을 사랑해 마지않았고, 감히 아들 녀석의 꿈을 꺾지 않았다. 오히려 정재계 사람들을 소개해 주며 미래를 닦아 주려고 하면 했지.
그래, 김석훈은 너무나도 김영호를 사랑했고 그게 그의 약점이다.
내 말에도 김석훈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우리 영호는 그놈을 너무 좋아해서 탈인데 무슨 문제가 생기겠나. 나보다도 그 녀석을 너무 좋아하는걸.”
“지금이야 그렇겠죠. 하지만 미래는 어떨지 모르는 거지 않습니까. 과거의 설록진이었다면, 감히 의원님의 뒤를 캘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미래는 바뀔 수 있다고.”
“만약 도련님께서 언젠가 그놈과 반목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 만약 설록진 의원이 지금 알아낸 사실을 터트린다면…….”
“우리 영호의 앞길을 완전히 막아 버릴 수 있지.”
김석훈의 죄는 곧 김영호의 죄가 될 거다. 자랑스러웠던 아버지는 순식간에 존재만으로도 수치스러운 아버지가 되어 버리고 말겠지. 내가 말하는 걸 알아차린 김석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얼굴에 있었던 여유는 전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한 번 얘기해 보긴 해야겠군.”
“얘기만으로 충분할까요?”
내 말에 김석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했듯, 그 녀석은 지금 당장 나를 칠 수 없을 거야. 나를 쳤을 때의 이득보다 손해가 많으니 말이지. 그래도 미래에는, 그래, 미래에는 자네의 말대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지.”
“예, 그러니 확실히 대비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세계는 참으로 신기한 것이 많아. 계약서라는 아티팩트도 그렇고…….”
계약서. 그걸 갖고 있다고? 그 말에 나는 숨을 삼켰다. 상대방을 완전히 구속할 수 있다는 그 물건은, 과거의 설록진도 겨우 두어 장밖에 손에 넣지 못했을 정도로 귀했다.
참고로 그중 한 장을, 내게 썼었다.
하긴, 과거에 대통령까지 지낸 인물이니 가지고 있는 게 이상하지 않긴 하지만…….
내 쪽에서 저걸 빼돌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
“이번 일을 조금 더 확실하게 처리하려고요. 그때 양양시 저택에 있었던 아이는 흑표파 쪽에서 확실히 처리한 걸로 압니다만, 그 아이의 어미가 되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내 말에 김석훈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이상하군, 그 일을 직접 처리한 게 자네였는데 그 일을 내게 묻다니 말이야.”
젠장, 정태석이 맡아서 처리했나. 그야, 그렇겠지. 그의 비서였으니 말이다.
김석훈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며 나는 재빨리 마력을 강화했다. 김영훈의 눈동자가 풀리는 걸 본 내가 재빨리 덧붙였다.
“아무래도 세월이 흐르면서 헷갈렸나 봅니다. 저도 이젠 많이 늙었으니 말이죠.”
“하긴, 그렇지. 나도 요즘에는 옛날만큼 생각이 명료하지 않긴 하지.”
하마터면 다 된 밥에 재를 뿌릴 뻔했다.
완벽하게 풀린 자물쇠를 바라보며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 김석훈과 설록진.
제법 끈끈한 사이였던 모양이지만, 이제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