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9화
#88 젠트리 제약 회사 (7)
“일상생활에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깔끔한 디자인이었으면 좋겠는데……. .- ”
“응, 가능해.”
역시 준은 준이었다. 내가 한 부탁에 준은 별거 아니라는 듯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며칠은 걸리겠어. 최소 일주일.”
“더 빠르게는 안 돼?”
“응. 시간이 필요해.”
끄응, 이걸 빨리 줘야 장지현을 가정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 텐데. 어쩔 수 없이 이 아티팩트가 완성될 동안은 숲속 오두막에 둘 수밖에 없겠군.
아티팩트를 맡기고 돌아가려는 내게, 준이 무언가를 적은 종이를 내밀었다.
“이건 뭔데?”
“뭐긴 뭐야, 집을 짓는 데 필요한 재료지.”
목록을 본 나는 눈을 의심했다.
“이걸 전부 다?”
마력이 통하는 금속, 거기에 각종 값비싼 몬스터 부산물까지. 준이 필요하다고 적은 목록에는 끝이 없었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홍염의 마정석’ 급의 마정석이 더 필요하다니. 그 정도의 마정석은 내가 원한다고 마음대로 구할 수도 없단 말이다.
그러니까 기존 혼티드 하우스의 동력원이 되었던 홍염의 마정석은 옥션에서 메인 경매품에 오를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다. 예브리카의 마정석 급은 아니지만, A급 게이트, S급 게이트를 공략해서 겨우 하나 정도가 나오는 물건이었다.
“하나로는 부족해. 두 개, 아니면, 세 개…….”
그런 걸 하나도 아니고 몇 개나 갖다 달라니. 할 말을 잃은 내게 준이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금속도 많이 필요해. 마나가 흐르는 재질로, 중국에서 내가 다루던 정도면 좋겠는데.”
“최고급 아티팩트를 만드는 재료로 집을 짓겠다는 소리야?”
나는 주변에서 퍼온 진흙을 구워서 집을 지었는데 말이다. 이대로라면 집을 짓는 데, 정말로 몇억, 몇십억이 들어갈 거다.
“평범한 집을 짓는 거라면 나도 이렇게까지는 안 해. 하지만 네가 원하는 건 그 누구도 쉽게 발을 디딜 수 없는 요새 같은 곳이잖아? 만들어 줄게,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최고의 요새를.”
“으으윽!”
젠장! 이런 말을 듣고도 안 된다고 말할 수 있겠냐고. 나는 결국 피를 삼키는 심정으로 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그동안 꿍쳐 놓았던 비상금이 다 털리게 생겼다. 아니, 비상금을 다 털어도 모자랄지도. 아니, 모자란다.
가뜩이나 우리 팀의 수익 모델은 형편없는데 말이다.
‘음, 제대로 돈을 번 건 저번 카지노 때가 마지막인 것 같은데…….’
그나마 정기적으로 돈을 벌었던 건 은월회의 마약 사업뿐이었는데, 그것도 이제는 접을 생각이었고, 젠트리 제약 회사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건 몇 달은 있어야 할 테니…….
크윽…….
이제야 돈 걱정 없이 사나 했더니. 다시 거지가 되고 말았다.
* * *
장지현을 위한 아티팩트가 마련되기 전까지, 장지현은 오두막에 머물기로 했고 최선용은 젠트리 제약 회사의 본격적인 이주를 준비하기로 했다.
내가 혹시 도울 일이 없는지 물었지만, 최선용은 고개를 저었다. 하긴, 제약 회사가 하는 일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내가 나서 봤자 별로 도움이 되진 않겠지.
“회사 일은 제 쪽에서 알아서 처리할 테니, 미국에 넘어갔을 때의 계획이나 잘 짜와 줘요. 난 미국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잘 준비해 둘 테니.”
최선용에게 의기양양하게 말을 던져둔 나는, 곧바로 ‘믿는 구석’에 연락했다.
“미국에 회사를 하나 세울 생각인데, 혹시 이런 일을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글쎄요? 나도 한 번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나도 사업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든요.]
뭐, 사실 테이카도 사업에 대해서는 전혀 모를 거다. 하지만 말이지. 테이카에게 이런 말을 던져두면, 그 인간이 움직일 테니까.
━그 인간이라니?
‘오승우요.’
세계 최고의 헌터 뒤에는 세계 최고의 에이전시가 있기 마련이지. 자, 세계 최고의 에이전시로 불리는 그 능력을 조금만 빌려 보자고.
━그 인간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레이의 혀 차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나는 테이카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게이트 공략은 언제쯤 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오! 게이트 공략이요? 정말로 나랑 같이 게이트를 공략해 줄 생각이에요?]
“예. 최대한 빨랐으면 좋겠는데요.”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다. 이제는 정말 돈이 급해졌거든. 게이트는 여러모로 돈이 된다. 목숨을 좀 걸어야 하지만, 테이카 쿠퍼와 함께라면 실패할 걱정이 없지.
내 제안에 테이카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가고 싶은데, 그쪽에서 보낸 사람들 적응을 좀 도와주느라 좀 바빠서 말이죠. 일단 이쪽 일을 쳐 내고 나면 연락드릴게요.]
“아, 맞다. 에드워드는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그 친구 전에는 몰랐는데 제법이더라고요. 음, 확실히 최강의 방패라고 불릴 소질이 있달까. 크흠, 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저기서 러브 콜을 받는 중이니까요. 아직은 우리 소속이라고 결론지어 놓은 게 아니다 보니, 온갖 데에서 연락이 다 온다니까요.]
에드워드는 완벽한 탱커가 될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든든한 탱커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엄청나다. 막말로 딜러가 부족해도 게이트 공략에는 문제가 없지만, 탱커가 없는 파티는 아예 공략에 나서지 않기도 하니까 말이다.
테이카는 유선제처럼 유리 대포가 아니라서 탱커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편이었지만, 보통의 딜러라면 자신의 앞을 지켜 줄 탱커의 존재를 간절히 바라기 마련이다.
딜러로서는 어설픈 2군 취급을 받았던 에드워드였지만, 탱커로 전향한 뒤로는 세계 최고의 팀에서도 노릴 만한 루키가 되었다.
음, 왠지 뿌듯한데.
[어쨌거나 당분간은 그 일로 바쁘네요. 바쁜 일만 끝내면 연락할 테니까 곡 나랑 같이 가 주기예요?]
“알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테이카와의 전화를 끝냈다.
좋아, 오승우에게 일 떠넘기기에, 게이트 공략 약속까지. 완벽해.
이제 내가 할 일은 기다리는 거다. 준이 아티팩트를 완성하기를, 최선용이 이주 준비를 끝내기를, 그리고 오승우가 우리에게 사업 전문가를 소개해 주기를 말이지.
하지만 그냥 기다리기엔 시간이 아깝지. 이 시간 동안, 나는 김석훈에게 접근하기로 했다.
금찬명의 비밀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떠올랐던 계획을 실행시킬 때가 됐다.
김석훈에게 접근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대통령 시절만큼 엄중한 경호를 받고 있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그는 자신의 안전에 무척이나 신경을 썼으니까. 그야 여기저기에 원한을 잔뜩 샀을 테니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리가.
김석훈이 머물고 있는 집의 담벼락은 엄청나게 높았고,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몇 중의 보안을 거쳐야만 했다. 마치 금찬명의 저택을 생각나게 하는 구조에 나는 혀를 찼다.
‘하나도 안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점은 좀 닮았네요.’
물론 이런 식의 보안은 내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내 목표가 김석훈을 잡아 죽이는 거였더라면 말이지.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런 식의 복수가 아니다. 김석훈을 지금 죽여 줘 봤자, 전혀 좋을 게 없지.
내가 원하는 건, 설록진과 김석훈의 사이를 갈라놓는 것이다.
김석훈에게는 지난 이십 년간 그와 함께한 비서 정태석이 있었다. 나와 한서현, 김재호는 정태석의 퇴근길을 덮쳐 그대로 정태석을 납치했다.
으슥한 교외의 버려진 폐가에 도착한 우리는 정태석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도, 도대체!”
벌레처럼 꿈틀거린 정태석이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나, 나를 아무리 고문한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난, 내가 모시는 분을 배신하지 않, 않을, 거다!”
그렇게 말한 정태석이 모든 걸 털어놓는 데에는 채 십 분이 걸리지 않았다.
“마, 말할게! 말할 테니까 그마, 그만둬!”
배를 까뒤집고 항복을 외친 정태석을 바라보며 한서현이 중얼거렸다.
“시시하네. 입이 너무 싼 거 아니에요?”
“우리 쪽의 협박이 너무 무서웠다는 생각은 안 하는 거냐?”
“별로?”
정태석의 눈앞에 스켈레톤을 소환한 다음에 당신 몸에 있는 뼈로 새로운 스켈레톤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말했잖아……. 살아 있는 채로 빼낸 뼈도 스켈레톤으로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 말하면서…….
나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고, 그 협박.
한서현이 공포로 정태석을 질리게 했다면, 나는 겁에 질린 정태석에게 달콤한 유혹의 손길을 내밀었다.
중국에서 새 인생을 살게 해 주겠다는 내 말에 정태석은 적극적으로 자신이 아는 것을 모두 털어놓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정태석이 말해 준 모든 내용을 머릿속에 담았다.
“저, 정말로 살려 주시는 거죠?”
“예, 중국에 가서 행복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부인분과는 헤어지게 돼서 아쉽겠지만 말입니다.”
“어차피 질렸어요.”
참고로 정태석에게는 아이가 없다. 오직 그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린, 그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아름다운 부인만이 있을 뿐. 정태석은 내 제안에 곧바로 그 부인을 버려 버렸다. 말로는 김석훈이 자신의 배신을 알면 자신을 살려 두지 않을 테니 당연한 선택이라고 했지만, 그의 태도를 보니 알 수 있다.
그 둘 사이에 사랑은 조금도 없었다는걸.
나는 정태석을 직접 밀항시켰다. 배에 타고 떠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손을 휘저었다. 머릿속에서 레이가 물었다.
━정말로 저놈을 중국으로 보낼 셈이냐? 김석훈이 그렇게 뒤가 구린 놈이라면, 그의 밑에서 일을 해 온 저 녀석도 더럽긴 매한가지일 텐데.
‘그렇죠. 시키는 대로 했다는 말은 절대로 변명이 못 되니까요.’
나도 저런 놈이 행복하게 사는 꼴은 못 보겠다.
‘그래서 중국에 보내는 겁니다.’
저놈은 은월회에서 예쁘게 회를 떠 줄 거다. 명색이 ‘은인’인 사람의 부탁이니, 아주 정성껏 처리해 주겠지.
뭐, 단순히 잔인한 죽음을 선사하기 위해 정태석을 중국으로 보낸 건 아니었다.
‘제가 정태석으로 사는 동안에는, 정태석의 죽음은 알려져서는 안 되니까요.’
다행히 정태석의 체격은 나와 거의 비슷했다. 정태석의 얼굴을 본뜬 가면을 쓰고 정태석의 양복을 걸치니, 얼핏 봐서는 정태석과 거의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아, 아.”
게다가 금 박사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이 가면에는 무려 음성 변조 기능도 있단 말씀.
“어때? 그 사람 같아?”
“음, 기분 나쁠 정도로 완벽한데요?”
가족이라든가, 그를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라면 어색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내게는 ‘거짓말’이라는 능력이 있단 말이지. 대충 정태석의 모습을 흉내 낸 뒤, 주변이 나를 정태석이라고 믿게 한다면, 그 누구도 나를 의심하지 못할 거다.
정태석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변장한 나는, 정태석의 출근 시간에 맞춰 김석훈의 집으로 향했다.
“비서관님 오셨습니까?”
내게 인사를 건네는 경비원을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설록진을 만들어 내고 키워 낸, 그 인간을 한 번 만나러 가 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