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347화 (347/352)

제347화

#88 젠트리 제약 회사 (5)

나는 눈앞의 최선용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나도 진심으로 장지현을 이곳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

왜냐? 이런 상황에 ‘댁의 따님은 제가 잘 모시고 있습니다’라고 하면 잔뜩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잖냐!

‘오해가 잔뜩 쌓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습니까.’

대화를 하기도 전에 미움 스택을 엄청나게 쌓고 시작하고 싶진 않았다고, 나도.

아니나 다를까 나를 바라보는 최선용의 눈빛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원래는 상황을 정리하고 대책이 생긴 다음에 최선용에게 연락하려고 했지만, 애가 사라졌다고 바로 경찰서로 달려가는 사람을 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말이다.

나는 간단하게 최선용에게 다시 한번 상황을 설명했다. 차근차근 말이 이어지자, 최선용 또한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재능을 제대로 컨트롤 할 수 없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입니까?”

“문자 그대로 지현 양은 지금 자신의 능력을 조절할 수가 없어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주변의 생각을 읽어 버리거든요.”

그나마 정신계 재능이라 다행이었다. 자연계 재능을 가졌다면 이런 식으로 장지현을 숨겨 두는 것도 불가능했을 테니까.

“주변의 생각을 읽어요?”

“예, 자신의 의지로 컨트롤 할 수만 있었다면 참 써먹을 곳이 많은 능력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지현 양은 그 능력을 스스로 조절할 수가 없는 상태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과부하가 와 버려 기절하고 만다. 내 설명에 최선용이 말했다.

“원래 각성자들이 막 각성을 한 상태에는 그럴 수도 있다고 들었어요.”

“지현 양의 경우에는 다릅니다. 저도 사실 이런 경우는 처음 보지만요, 몸 안에 있는 마나 회로 자체가 어긋나서 마나를 제대로 제어할 수 없는 거라…….”

“각성자의 재능을 완벽하게 억누를 수 있는 약물이라도 나오지 않는 한 말이죠.”

최선용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조금 전까지는 딸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는 젠트리 제약 회사를 맡은 사장의 입장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래, 확실히 의심쩍겠지.

타이밍 좋게 자신의 딸이 각성한 것도, 그 각성이 불완전해 자신의 신약이 꼭 필요한 상태라는 것도.

“원한다면 얼마든지 장지현 양과 통화를 시켜드리겠습니다.”

“미리 지현이를 협박해 말을 맞춰 놨을 수도 있죠. 그럴 만한 시간은 충분했잖아요?”

“보통은 그런 생각은 속으로 하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의심이 들어도 그걸 대놓고 말할 줄이야. 내 말에 최선용이 말했다.

“믿고 싶으니까요, 당신을요.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 줘요. 정말로 우리 지현이 잘 있는 거 맞죠?”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최선용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면 바로 지현 양과 통화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최선용은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조금 전까지 내게 장지현을 협박해 미리 말을 맞춰 놓은 건 아니냐는 둥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던 최선용이지만, 모정은 이성을 무시하고 튀어나왔다.

“지, 지현아! 괜찮아? 응, 엄마는 여기에 있어.”

전화기 너머로 흘러나온 장지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최선용의 눈가는 순식간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응, 괜찮아. 아니, 네가 괜찮아야지. 응, 그렇구나. 알겠어.”

그렇게 이야기를 하던 중, 최선용은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아니, 응, 응.”

일부러 대답을 저렇게 해서 오가는 이야기를 전혀 못 듣게 하는 것인지. 도대체 무슨 얘기들을 하길래 저런 표정인지 모르겠다.

━엿들으려면 엿들을 수 있으면서?

‘그건 왠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언제 예의를 차렸다고.

흠, 그건 그런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중, 최선용이 나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그쪽 받으래요.”

“예? 저 말입니까?”

“네.”

나는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응, 전화 바꿨는데…….”

[우리 엄마한테 뭐라고 했어요?]

“그냥 사실대로 말했는데.”

[그러니까 그 사실이 뭔데요.]

“네가 재능을 각성했는데, 영 컨트롤을 못해서 일단은 내가 보호하고 있다?”

[그리고요?]

“‘그리고요’라니?”

[우리한테 원하는 게 뭔데요.]

“그건 네 엄마랑 내가 얘기해야 할 내용인 것 같다만.”

[나 때문에 우리 엄마 힘들게 하면 가만히 안 둘 거예요!]

“허허.”

그래도 아까는 나를 무서워하더니, 이제는 전혀 나를 무서워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내게 따지는 장지현의 목소리를 듣다 보니, 마치 주인의 품에 안겨서 앙앙 짖는 치와와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우리한테 원하는 게 뭐냐고요! 예?]

“지현 양, 너무 늦기 전에 빨리 자요. 아직 한참 성장기인데 잠 안 자면 나중에 후회한다?”

[아저씨!]

나는 그대로 전화를 최선용에게 돌려주었다. 장지현이 어찌나 크게 소리를 쳤는지 고막이 다 나갈 것 같았다.

내게 전화기를 넘겨받은 최선용이 장지현에게 말했다.

“그래, 엄마 걱정은 하지 말고 빨리 잠이나 자.”

무어라 소리를 치는 장지현을 뒤로 하고 단호하게 통화를 끊은 최선용이 내게 말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건 영 예의가 아니지만, 이 모녀의 미래를 위해서는 꼭 해야 할 질문이 있었다.

“미국이 좋아요, 중국이 좋아요?”

* * *

당장 한국에서 계속 머무는 건 자살 행위다. 설록진의 입에 젠트리 제약 회사가 오른 이상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다. 설록진이 나선다면, 그땐 내가 아무리 용을 써도 사람들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 될 테니까 말이지.

그러니 최대한 이번 주 안에 승부를 봐야 했다.

“젠트리 제약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연구원은 다섯 명 정도…….”

“연구원이 아닌 사람 중에서는요?”

“아, 선정이! 선정이 없으면 안 돼요.”

내 말에 최선용은 젠트리 제약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들의 이름을 줄줄 말하기 시작했다.

최선용은 본래 사업가보다는 연구원이 더 잘 맞는 사람이었다. 본래 젠트리 제약 회사의 사장을 맡았던 장호진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뒤 회사를 맡게 되었지만, 그녀의 주 업무는 아직도 연구였다.

그런 그녀가 문제없이 젠트리 제약 회사를 운영할 수 있었던 데에는 회사를 지키고 있던 직원들의 도움이 컸다.

“그 사람들 전부를 미국으로 데리고 가는 건 무리일 텐데요.”

문제는 그 사람들을 전부 미국으로 이주시키는 게 무리라는 거지.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당장 사는 곳을 바꾼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내 말에 최선용이 입을 열었다.

“한국을 떠야만 하나요?”

“말씀드렸잖습니까. 그쪽 회사를 노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그리고 그 사람한테 걸리면 모든 게 끝장이라고요.”

“하지만…….”

“당장은 저를 믿을 수 없다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믿어 주세요. 최 사장님이, 그리고 지현 양이 살려면, 그리고 젠트리 제약 회사가 살려면 지금 당장 한국을 뜨는 것밖엔 방법이 없습니다.”

“회사를 당장 옮기자고 해도…….”

“일단 명단만 제게 넘기시죠.”

최선용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를 믿기로 결정했지만, 여전히 나를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몇 년을, 길게는 이십 년을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의 명단을 쉽게 넘길 순 없겠지. 하지만 그녀에게는 결단이 필요했다.

“하아…….”

딸이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그녀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은 하나뿐이었다.

내게 명단을 적어 넘긴 최선용이 말했다.

“당신을 믿은 제 결정을 후회하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네요.”

“걱정하지 마시죠.”

* * *

나는 차근차근 명단을 확인했다.

젠트리 제약 회사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사람들의 수는 열 명.

━그래서 어쩔 생각이냐?

‘뭐, 답은 하나뿐 아니겠습니까?’

직접 찾아가서 한 명 한 명씩 미국으로의 이주를 설득할 수밖에.

━정말로 설득이 맞는 거지?

‘예에, 그럼요. 문명인으로서 당연히 대화로 상대방을 설득해야죠. 누굴 깡패로 압니까?’

나는 밖에서 대기 중이던 검은 새에 가볍게 올라탔다. 나를 태운 새는 곧장 한서현에게로 날아갔다. 검은 새에서 내리는 나를 본 한서현이 재빨리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명단을 받았어.”

“이 사람들 다 잡아 오면 되나?”

김재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잡아 오는 게 아니라, 대화와 설득을 통해 미국으로 가는 데에 찬성하게 해야지.”

한서현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대화’와 ‘설득’이란 말이죠.”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위험하게 들리는데 말이다. 진짜 대화와 설득이라고.”

“네, 알아들었어요. 대화와 설득.”

전혀 알아들은 느낌이 아닌데. 나는 찝찝함을 감추고 첫 번째 목록에 있는 사람의 정보를 살폈다.

“음, 이선정 씨. 일단 이 사람 집부터 가 볼까?”

━새벽 2시인데?

‘낮에는 직장에 있는데 그때 찾아가는 것도 좀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그리고 저희 악당이거든요? 악당이 시간 지켜서 찾아가면 그것도 웃기지 않겠습니까? 아, 저희 영업시간은 오전 9시부터 6시까지입니다, 하는 것도 아니고요.’

악당에게 밤낮이 어디에 있어!

우리는 곧바로 이선정 씨의 집으로 날아갔다. 창문 틈으로 파고 들어간 모래가 열어 준 창문을 통해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음, 일단 모래로 먼저 깨울까?”

“문을 똑똑해서 열고 나오게 하는 건 어때요?”

“내가 가서 깨운다!”

“안 돼! 그래도 여자분이잖아. 침실로 쳐들어가는 건 좀.”

고민 끝에 우리는 한서현의 모래로 먼저 인기척을 내기로 했다. 우리가 거실에 앉아 있는 동안 한서현의 모래가 이선정을 깨웠다. 곧, 파랗게 질린 이선정이 침실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오, 안녕하세요.”

내 인사에 이선정은 비명을 내질렀다.

“끼야아아악!”

* * *

“새벽에 사람을 찾아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요.”

잔뜩 지친 얼굴의 한서현이 그렇게 말을 던졌다.

거울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내 얼굴도 아마 저렇겠지. 한 십 년은 늙은 것 같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새벽에 자는 사람을 깨워서 얘기를 나누자는 계획은 짜지 말아야지.

━애초부터 뭣 같은 계획이었다니까.

‘저도 시간이 충분했으면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내일 설록진이 저 사람들에게 찾아갈 수도 있잖아요!’

━하여간, 설록진이 엮이면 너무 조급해진다니까.

조급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놈이 어떤 사람인지를 다 아는데! 그래도 다음부터는 차라리 출근 시간에 잠깐 시간을 내 달라고 해야겠다. 음, 자는 사람을 깨우는 건 미친 짓이었어.

“그래도 모두 대화와 설득이 잘 통해서 다행이었네요.”

다행히 결과는 한서현의 말대로 꽤나 괜찮았다.

“음, 중국도 아니고 미국으로의 이주니까.”

중국을 욕하자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아메리칸드림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으니까 말이지.

물론 모두가 흔쾌히 미국으로의 이주를 반긴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간절한 ‘대화’로 모두를 ‘설득’시키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달까.

━협박을 한 것 같았다만.

‘여기에 남아 있으면 좋은 꼴을 못 볼 거라는 말은 협박이 아니라 사실이었는데요?’

주어가 내가 아니라 설록진이라서 그렇지, 맞는 말인데?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모두를 위한 결정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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