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5화
#88 젠트리 제약 회사 (3)
최선용의 아침은 늘 정신이 없었다. 회사에 가면 카리스마 넘치는 사장님이었지만, 집안에서는 영 서툴기만 한 엄마였으니. 우당탕퉁탕 요란하게 움직이는 건 그녀의 딸인 장지현도 마찬가지였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장지현을 본 최선용이 목소리를 높였다.
“지현아! 너 체육복은 챙겼어? 오늘 체육 수업 있다면서.”
“아, 맞다!”
“하여간. 내가 어제 건조기에서 꺼내 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으, 미안! 까먹었어!”
“까먹을 게 따로 있지. 오늘 저녁에 과외니까 까먹지 말고 일찍 와. 오늘은 선생님 한 시간 일찍 오신댔다?”
“으응, 그거는…….”
“일부러 까먹은 척하려면 꿈 깨.”
최선용의 말에 장지현은 배시시 웃었다.
“아니, 일부러 까먹은 척한 게 아니구…….”
“애교로 또 넘어가려고 하네, 너. 이런 거는 초등학생 때까지만 통한다고 했지?”
“으응? 안 되나? 안 통하나? 이제는 징그러워졌나?”
제 팔을 흔들며 두 눈을 깜찍하게 깜빡이는 딸에게 결국 최선용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하여간, 너 이거 딱 오늘까지만 참아 준다. 진짜, 너 이제 다 커서 징그럽고! 하나도 안 귀여우니까!”
최선용은 그렇게 말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눈에 장지현은 귀엽기 그지없는 딸이었다.
“늦겠다, 어서 가.”
“응!”
장지현은 후다닥 바깥으로 나갔다. 그제야 최선용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늦겠네.”
땀을 훔친 그녀는 재빨리 핸드백에 휴대폰과 차 키를 쑤셔 넣고 바깥으로 나왔다. 오늘따라 막히는 도로를 타고 겨우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박 실장이 그녀에게 달려왔다.
“사장님, 오셨어요?”
“응, 왜 그래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별일은 아니고요.”
“별일이 아닌데 그렇게 사색이 됐어요?”
최선용의 말에 박 실장은 회의실 쪽을 눈으로 가리켰다. 그녀의 눈치에 고개를 끄덕인 최선용은 박 실장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섰다.
회의실에 자리를 잡고 앉은 최선용이 박 실장에게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그래요?”
“현무 제약 김 부사장이 연락을 해 왔더라고요. 제휴 제안을 하고 싶다고…….”
“현무 제약에서요?”
그 말에 최선용의 얼굴이 한순간에 싸늘해졌다.
“그쪽 꼬리에서도 불이 붙은 모양이네. 하긴, 최근에 우리 쪽으로 너무 넘어오긴 했죠. 그쪽 친구들이.”
안 그래도 거슬릴 거라 생각하고는 있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지르다니.
“그래도 차라리 다행이네요. 자리를 마련하자고 해서.”
“만나실 겁니까?”
현무 제약은 김성득 의원 사건이 있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국민의 사랑을 받는 곳이었다. 하지만 같은 업체에 있는 사람들은 현무 제약이 얼마나 깡패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기껏 발굴해서 계약서까지 다 찍어 놓은 신입을 쏙쏙 빼 가는 것은 물론이고, 다 키워 놓은 직원들까지 뒤로 빼돌리곤 했으니까.
정말이지, 산업 스파이나 다름없는 짓을 참으로 많이 저지른 업체가 아닌가.
최선용 또한 그들의 패악에 질려 버릴 대로 질려 버린 상태였다.
“아니요, 안 만나요. 그쪽 제안은 거절해 둔다고 말해 두세요.”
“그래도 될까요?”
박 실장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 일 이후로 이미지가 나빠진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현무인데…….”
“썩어도 준치고, 부잣집이 망해도 삼 년을 간다.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아니, 그래도요. 이렇게 무시했다가 사장님한테 나쁜 일이 생기면 어떡해요.”
박 실장이 괜히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최선용은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근속한 만큼, 둘 사이에는 끈끈한 정이 있었다. 그러니 걱정이 되는 거겠지만…….
최선용은 박 실장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현이 아버지요. 원래 현무 제약 다니던 사람이었어요.”
“그랬어요?”
박 실장의 말에 최선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랑 사귈 때까지만 하더라도 거기 사원이었어요.”
“그럴 리가요.”
“하하, 나랑 사귀고 우리 집에 들어오게 되면서 아예 이쪽으로 오게 된 거죠.”
과거를 떠올린 최선용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래서 현무가 얼마나 더러운 일을 했는지 나는 다 알아요. 바뀌겠다고 말했지만, 거기는 못 바뀔 거예요. 애초에 옳은 게 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대가리에 있으니까.”
“부사장이 바뀌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으음, 뭐. 연좌제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좀 나쁜가?”
“나쁘다 뭐다 제가 말은 못 하죠. 사장님이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도 모르는데.”
“아주 거지 같은 일, 아주 나쁜 일. 그냥 그렇게만 알아 둬요. 어쨌거나 그래서 현무 쪽으로는 아주 발을 뻗기도 싫으네.”
웃으며 말했지만 대답은 강경했다. 이런 결정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최선용을 알기에 박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쪽 제휴 건은 거절해 둘게요.”
“응, 애초에 우리랑 제휴할 게 뭐가 있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말이 제휴지, 그냥 우리 사정을 파악하고 싶어서 찔러본 걸 거예요.”
여태까지 젠트리 제약 회사는 업계 1위인 현무는 물론이고, 다른 회사에서도 전혀 관심을 줄 이유가 없는 소규모의 제약 회사였다.
특허가 풀린 약들의 카피작이나 만들어 근근이 살아남은 회사니까.
하지만 최선용이 사장을 맡은 다음부터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최선용은 언제까지 남의 약이나 카피 뜨는 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이트가 열리고 그 어느 때보다 새로운 물질이 많이 발견되는 세상이었다. 연구할 것도, 개발할 것도 많은 이 세상에서 현실에 안주해 뒤처지기는 죽어도 싫었다.
최근 최선용에게는 꿈이 하나 있었다.
“사무실에 별일 없으면, 연구실 가 봐야겠어요.”
“아! 가셔도 돼요. 사장님 확인이 필요한 건 그 건밖에 없었어요.”
“응, 그러면 우리 박 실장 믿고 연구실 가 볼게요.”
“네.”
회의실에서 나온 최선용은 제 자리에 짐을 두고, 곧바로 연구실 가운부터 찾아 입었다.
연구실은 사무실과 바로 연결된 곳 지하에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조명이 불길하게 깜빡였다.
‘등을 갈든가 해야지.’
속으로 그렇게 짧게 혀를 찬 최선용은 연구실로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이곳이야말로 그녀가 꾸고 있는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캔버스, 그녀의 그림을 같이 그려 주고 있는 연구원들이 그녀를 보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사장님 오셨어요?”
“응!”
여기에서라면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최선용은 꿈을 꾸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연구 결과는 어때요?”
“상당히 좋아요.”
그녀에게 고용된 각성자이자, 연구원 김미래는 히죽 미소를 지었다.
“아직 약효가 영 별로지만요. 체감상 지속되는 시간이 10초 남짓인 것 같아요.”
“그래도 확실히 능력이 차단되었다?”
“예. 확실히요.”
정글형 게이트에서 흔히 발견되는 붉은빛의 꽃에서 추출한 성분에는 각성자의 능력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었다. 정제법이 극히 까다롭고, 정제에 성공해 낸다고 하더라도 다른 성분 다섯 가지와 결합해야만 이 효과를 내는 만큼, 현재까지 이 사실을 알아낸 건 젠트리 제약이 유일했다.
때문일까. 연구원들의 표정은 밝았다.
“이걸 어떻게 쓰실 생각이에요?”
누군가의 말에 최선용이 눈을 빛냈다.
“글쎄요, 일단은 정부에 납품할까 생각 중이에요. 범죄자들을 제압하는 데에 쓰면 좋을 것 같지 않아요?”
“오, 확실히요.”
아직까지 그녀의 생각은 그랬다.
* * *
선용 : 과외 빼먹지 않았지? 한 시간 일찍 시작한다는 거 잊지 마라! (오후 1:59)
짱지 : 절대 안 까먹겠습니다. (오후 1:59)
선용 : 그래야지. 너 이번 성적 아슬아슬이야. (오후 2:01)
선용 : 저녁은 어쩔 거야? (오후 2:31)
선용 : 엄마는 오늘도 늦을 것 같은데. (오후 2:31)
짱지 : 과외 끝나고 나가서 사 먹을게. (오후 2:33)
선용 : 패스트푸드 같은 거 먹지 말고 한식 먹어 한식. (오후 2:34)
짱지 : 아 맨날 한식 먹는데 이런 날에라도 다른 거 먹자! (오후 2:34)
선용 : 후 알겠어 끼니는 거르지 말고. (오후 2:34)
선용 : 과외 시간 늦지 마라! 오늘 5시 30분 시작이야! (오후 5:11)
선용 : 과외 선생님한테 연락 왔어. 너 어디야? (오후 5:41)
선용 : 아침부터 그렇게 안 까먹는다더니. (오후 5:41)
선용 : 진짜 어디로 샜길래 아직까지 집에 안 갔어? (오후 5:41)
선용 : 설마 일부러인 건 아니지? (오후 5:42)
선용 : 진짜 지현아 대답 좀 해.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오후 5:42)
.
.
선용 : 지현아, 너 어딨어? (오후 6:21)
선용 : 엄마 걱정된다 제발 전화 좀 받아 (오후 6:21)
* * *
“우, 우욱.”
장지현은 머리를 붙잡았다. 우욱,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을 참지 못한 장지현은 구석에 고개를 처박고 속에 든 모든 걸 쏟아 냈다.
아까부터 왜 이러지? 머리는 왜 이렇게 아프고, 몸은 왜 이렇게 으슬으슬 떨리는 거지. 아까부터 눈앞을 어지럽히는 무언가는, 그녀의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름] : 장지현 (長知賢)
[이름] : 장지현 (長知賢)
[이름] : 장지현 (長知賢)
[이름] : 장지현 (長知賢)
여러 개로 겹쳐진 창이 눈을 어지럽히는 것만 해도 토할 것 같은데, 귓속에는 온갖 소리가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난 걔가 별로…….’
‘좀 닥쳤으면…….’
‘아……, 죽어 버리지…….’
‘진짜 너무 싫…….’
‘꺄, 오늘 집에 가면 치킨…….’
“조용, 조용히…….”
다들 닥쳐, 닥쳐 줬으면 좋겠다. 장지현은 두 귀를 틀어막은 채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막아도 머릿속을 가득 메운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눈 앞을 가린 창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그때, 누군가 제 앞에 섰다.
“너 괜찮아?”
다른 흐릿한 목소리들과 달리 또렷하고 맑은 목소리. 그 목소리에 장지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남자의 얼굴, 흐릿한 인상의 남자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아, 아아…….”
장지현은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에게서는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조용하고 고요했다.
“이런.”
장지현을 바라보며 남자가 짧게 혀를 찼다.
“일단 좀 자라.”
“아, 아니…….”
자고 싶지 않아. 나 과외 가야 하는데, 오늘 1시간 일찍 시작하는 거, 늦으면 엄마가 화낼 텐데…….
장지현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남자의 손길에 눈이 감겼다. 남자의 품에 안기며 장지현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장지현을 끌어안은 남자, 강이신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필이면 능력을 각성하는 타이밍이 얄궂네요.”
━그래도 다행이지. 네가 발견했으니 말이다.
강이신은 제 품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장지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아, 이거 어쩌나.”
생각보다 그쪽과 일찍 접촉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강이신은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