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3화
#88 젠트리 제약 회사 (1)
햇빛이 아름답게 쏟아지는 다도실에는 흰머리가 희끗희끗 난 남자가 앉아 섬세한 손길로 차를 우려내고 있었다. 잿빛 생활 한복을 입은 남자의 이름은 김석훈. 전에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내고 현재는 은퇴, 늦둥이 아들을 기르며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은퇴했다고 빛나던 별이 한순간에 지랴.
다도실의 미닫이문이 옆으로 열리고 양복을 입은 훤칠한 남자가 그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의 등장에 차를 내리던 김석훈은 슬쩍 눈을 위쪽으로 올렸다.
“늦었군.”
“죄송합니다, 차가 좀 밀려서요.”
설록진의 말에 김석훈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옛날 같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늦지 않았을 게야, 자네. 머리가 굵어졌다 이거지.”
그 말에 설록진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김석훈의 말이 완전히 과장은 아니었다. 예전이었다면, 약속 몇 시간 전에는 출발해 이곳에서 대기했을 테니까. 김석훈을 기다리게 하는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하긴, 이제 뒷방 늙은이가 된 내가 감히 그 설록진 의원에게 나를 기다리라 할 수는 없겠지.”
“뒷방늙은이라니, 과장이 심하시네요. 아직도 대한민국의 정계는 선생님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걸요.”
“흐음.”
설록진의 아부에 김석훈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차나 들지.”
김석훈은 잘 우린 차를 홀짝였다. 무릎을 꿇고 앉아 찻잔을 손에 든 설록진 또한 차를 들이켰다.
향긋한 차향이 코를 스쳤다.
“그동안 별일은 없으셨고요?”
“나야, 늘 무탈하지. 은퇴하고 늦둥이 키우는 재미에 사는 사람이 무슨 힘든 일이 있겠나.”
그렇게 말문을 연 김석훈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쪽은 꽤나 곤란한 일이 생긴 모양이던데.”
이 시골구석에 처박혀 있었지만, 김석훈은 대한민국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김석훈이니까. 김석훈의 말에 설록진은 여전히 말을 잇지 않은 채 부드러운 얼굴로 차를 홀짝거렸다.
“하아, 네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그랬지. 툭하면 입을 닫고 다른 사람들이 무어라 말을 꺼내는지 구경만 하고는 했어.”
“가장 효과적인 움직임은 가장 마지막에 하는 거라고 말씀하셨잖습니까?”
“뭐, 그야 그렇다만. 설마 내게 배운 걸 내게 써먹을 줄이야.”
짧게 혀를 찬 김석훈이 입을 열었다.
“성득이를 그렇게 만든 놈들부터 처리하는 게 먼저겠지. 그것 때문에 중국 애들이 난리라며? 정상회담이 코앞인데 중요한 일 앞두고 그쪽에 책잡힐 일을 만들면 어떡하나.”
“그 점은 정말로 면목이 없습니다.”
“각범부를 너무 망쳐 놔도 문제인 건가.”
“설마하니 그놈들이 중국에서 그 난리를 칠 줄은 몰랐지요. 확실히 곤란해졌습니다.”
“그쪽에서 바라는 건?”
“이쪽으로 이른바 ‘벨츠머츠 체포조’를 보내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만약 벨츠머츠를 체포한다면, 그쪽으로 양도, 재판부터 처벌까지 자기네들이 한다는 거지요.”
“확실히. 이번 참사로 인한 사망자만 오만 명이 넘어간다고 했으니.”
“예, 그야말로 참사라는 말이 어울리지요. 어찌 되었든 이 제안은 받아들이는 수밖엔 없겠습니다. 거절하기엔 타이밍이 나빠서 말이죠.”
“그래도 되겠나? 내가 듣기로는 저번에 우리 당을 공격한 것도 그 녀석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일단 ‘대외적으로는’ 받아들이겠다는 뜻입니다.”
방긋, 설록진의 미소에 김석훈 또한 마주 미소를 지었다.
“이 일은 형웅이한테 맡기자.”
“최형웅 의원 말입니까?”
“그래, 어차피 그 녀석이 정상회담에 나설 것 아니냐. 너에게는 따로 할 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 그렇죠.”
조금은 더 이야기해 줘도 좋을 텐데. 참으로 사람을 안달 나게 하는 놈이었다.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린 김석훈은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현무 제약 일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야? 성득이 아들놈은 성득이 수완을 절대로 못 따라올 터인데.”
“안 그래도 인재들을 다 빼앗기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손상된 이미지야 시간이 흐르면 해결될 문제지만, 유출된 인재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쯧. 다들 살길을 찾아 떠났다는 건가?”
“당장 월급이야 좀 줄어든대도, 아무래도 현무 제약의 이미지는 최악이니까요. 너 또한 그런 실험에 동조한 게 아닌가, 하는 시선을 참을 수 없다는 모양이에요.”
“어리석긴.”
찻잔을 매만진 김석훈이 눈을 찌푸렸다.
“그래서 어쩔 건가? 마음에 드는 인간들을 억지로 데리고 온대도 제대로 일할 리가 없을 텐데.”
“그야, 자신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다고 믿는다면 그렇겠지요.”
“으흠?”
“답은 간단한 것 아니겠습니까. 현무 제약밖에는 갈 곳이 없게 만들면 되는 것이지요.”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쓰겠다고?”
“고민 중이긴 합니다. 부숴 보려고 알아보니, 제법 빛나는 원석을 찾은 것 같기는 해서요.”
설록진의 말에 김석훈의 눈이 반짝였다. 설록진의 입에서 빛난다는 말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거기가 어딘데?”
“젠트리 제약이라고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생소한 이름에 김석훈은 고개를 저었다.
“작은 업체인데, 내실이 꽤 탄탄해요. 허나 그것보다 더 놀라운 건, 그쪽에서 각성자 제어 약물을 개발하고 있다는 겁니다.”
“각성자 제어 약물이라고?”
“예. 아직까지는 청사진을 겨우 그려 놓은 수준이지만, 확실히 퍼텐셜이 있더군요. 만약 그런 약물이 상용화된다면, 저희 쪽에도 좋을 것 같고 말입니다.”
“흐음.”
김석훈은 턱을 쓰다듬었다.
국회의원으로서 그는 이미지 메이킹의 중요성을 알았다. 자신이 세기의 로맨티시스트로 자신을 포장한 것처럼, 설록진의 포장이 무엇인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포장지를 만드는 데 일조한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니까.
“잘만 하면 네게는 완벽한 ‘수’가 될 것 같구나.”
“예.”
그 후로도 몇몇 중요한 이야기들이 입에 올랐다. 시골 김석훈의 이 자그마한 다실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을 안다면, 이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히겠지. 짧지 않은 이야기를 나눈 뒤 일어나는 설록진에게 김석훈이 말했다.
“나가는 길에 우리 영호한테 좀 들렀다 가라.”
“영호 군 말입니까?”
그 제안에 설록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김영호, 올해 열일곱이 된 김석훈의 늦둥이 외아들은 설록진의 지독한 팬이었다.
“올해 고등학생이 되지 않았습니까?”
“고등학생쯤 되었으면, 네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걸 그만두었으면 했지?”
설록진의 속을 읽었다는 듯 김석훈이 낄낄 웃으며 말했다.
“조금만 어울려 다오. 원래라면 이런 소리를 죽어도 하지 않는 나지만, 느지막이 본 아들이라 그런지 이길 수가 없단 말이야.”
김석훈의 약한 소리에 설록진의 눈에 서늘한 빛이 맴돌았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든 김석훈이 그를 바라보았을 때는, 그런 기색이 사라진 뒤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볼 때까지 안녕히.”
“그래.”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설록진은 미닫이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왔다. 복도를 따라 걷자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의, 의원님!”
김석훈을 빼닮은 앳된 얼굴. 김영호였다. 설록진을 보자마자 활짝 미소를 지은 김영호는 복도를 뛰듯이 날아왔다. 설록진은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 때처럼 형이라고 부르지, 왜?”
“그,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불러요! 이제는 대단하신 의원님이 되었는데.”
제 눈을 바라보지도 못하는 버벅거리는 녀석을 보며, 설록진은 생각했다.
이 녀석의 끝이 참으로 기대된다고.
* * *
중국에서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던 것을 만회라도 하듯이, 한서현은 내게 김석훈과 설록진의 대화를 모두 전해 주었다.
“흐음.”
나는 한서현이 전해 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찌푸렸다.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둘이 아니어서다.
일단 첫 번째로 우리를 잡으러 온다는 중국의 헌터들.
“중국에서 온다는 헌터들이 대체 누굴까요?”
중국은 땅덩어리가 넓은 만큼 인재도 많은 나라다. 그 인재를 제대로 키워 줄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해 게이트 사건 전에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던 나라였지만, 각성자에게는 ‘인프라’가 따로 필요 없다.
게다가 각성자 유출에 엄청나게 신경을 쓰는 만큼, 중국 내 각성자 수는 엄청난 수준이다. 그중에서 추리고 추린 인재들이라면…….
꿀꺽. 나는 침을 삼켰다. 한서현이 발끝으로 땅을 차며 투덜거렸다.
“우리가 한 일도 아닌데 왜 또 쫓겨 다녀야 하냐고요!”
“이제 와서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고 말해도 소용없겠지?”
“되겠습니까?”
“끄응.”
“그러게 그렇게까지 쇼를 할 필요는 없었다니까요!”
“아,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그러냐…….”
“보스는 언제나 이런 식이라니까!”
한서현의 말에 할 말이 없어졌다. 그야, 내가 이런 식으로 사고를 치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긴 했으니까.
━솔직히 한서현이 보살이지. 넌 쟤가 해골바가지 성애자니, 뭐니 욕할 자격도 없다. 내가 봤을 땐 넌 사고 성애자다, 사고 성애자. 아니고서야 사고를 이렇게나 칠 수가 없지.
‘말을 뭐 그렇게 합니까…….’
쩝, 그래도 정말 이건 할 말이 없다. 설마하니 중국에서 정부 차원으로 우리를 체포하기 위한 헌터조까지 보내다니. 정말로 이번 일로 단단히 열이 받은 모양이다.
“지금 당장 급한 건부터 처리하자고.”
“당장 급한 건이요? 정상회담 겨우 한 달 뒤거든요?”
“그래, 알지. 그래도 한 달이나 있잖아.”
“그 전에 들어오면 어떡해요! 아니, 애초에. 그 사람들 어떻게 상대할 생각이에요?”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무어라 상대법을 꺼내기는 좀. 게다가 그렇게 사서 걱정할 필요 없어. 한 번 알아보고 무리다 싶으면 도망을 치는 방법도 있으니까.”
“도망이요? 한국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요!”
“한국은 너무 좁잖아. 게다가 인구밀도도 높아서 마음 편히 다닐 수도 없다고. 그런 추적을 따돌리기에는 가히 최악이라고.”
내 말에 한서현은 이마를 짚었다. 왜 그러지? 하나부터 열까지 구구절절 모두 맞는 소리인데.
━맞는 소리긴 하지, 처맞는 소리! 아주 내가 다 골이 띵하구나.
‘상대를 안 하는 방법도 있는데 굳이 상대해야 할까요?’
━그 회피 병이 늘 일을 키운다는 걸 생각하라고.
‘그것도 일리가 있는 소리지만, 나는 싸우지 않을 방법이 있는데도 굳이 싸움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쌈닭이 아니라서요.’
나는 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서현에게 말했다.
“당장은 중국에서 어떤 사람이 오는지도 모르는데, 상대법을 생각할 수는 없잖아. 멤버가 확실해지면, 그때부터 고민해 볼게.”
“도망간다면서요…….”
“그 방법도 있다는 거지.”
어쨌든 중국에서 오는 헌터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하자. 그보다는 급한 일이 있으니.
“일단은 젠트리 제약 일에 집중하자고.”
내 말에 한서현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 회사에 대해 뭐 아는 거라도 있어요?”
그 말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알다마다.
그 회사의 최후가 어땠는지를 코앞에서 본 사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