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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342화 (342/352)

제342화

#87 그 엑스트라의 사정 (3)

금찬명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건, 금찬명과 백도산의 이상한 우정이 유지된 지 일 년째가 되었을 즈음이었다.

“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거냐?”

“너는 어떻게 알아, 내 아버지에 대해서?”

그 말에 백도산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한 달에 한 번, 너를 만나는 사람이 네 아버지잖아.”

“뭐?”

“그 좋은 머리로 뭐 했어?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은 거야?”

“그야, 내가 아는 ‘아버지’라는 존재는…….”

금찬명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이었다.

“조금 더 정이 넘치고, 막 응원해 주고, 그런 거니까.”

“안 됐네, 현실은 이따위라서. 그런 아버지는 네가 보는 만화에서나 나오는 거거든.”

그 말에 금찬명은 곧 울 것 같은 얼굴이 돼 버렸다. 백도산은 곧 후회했다. 또 찡찡거리면서 울 금찬명을 생각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을 때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래, 내가 아는 세상은 만화 속 세상밖엔 없어. 몰라, 나는 바깥세상이 어떤지. 네가 보는 ‘현실’이라는 게 어떤 건지! 그래도 난 바보는 아니야!”

“널 바보 취급하려던 건 아니야.”

백도산의 사과에도 금찬명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평소에는 잘만 방긋방긋 웃던 녀석이 지금은 미간을 좁힌 채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내 아버지라면, 어째서 그걸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아니, 애초에 왜 여기에 나를 가둔 거야?”

금찬명은 이유도 모르는 채로 이곳에 갇혀서 평생을 살았다. 그 누구도 금찬명에게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다. 오늘이 오기 전까지는.

“그 사람, 네 아버지. 안타깝게도 네 어머니는 그 사람의 부인이 아니지.”

“한 마디로 나는 사생아라는 거야?”

“기껏 생각해서 돌려 말해 줬더니. 쯧, 그래. 넌 사생아야. 사생아를 좋아할 사람은 없지. 특히 따로 결혼한 부인까지 있다면. 하지만 네 경우에는 조금 더 심각해. 네 아버지인 김석훈이 이미지 관리가 생명인 국회의원이거든.”

“국회의원?”

“그래, 게다가 엄청난 애처가로 소문이 났다고. 부인 쪽이 몸이 약해서 40대 초반인 지금까지 애가 없지만, 오직 부인만을 사랑했기에 한눈을 팔지 않은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시스트. 하, 어떻게 자기 자신을 그렇게 포장할 수 있는지 몰라? 문제는 이 포장이 무척이나 잘 먹혔다는 거지.”

그 포장 덕분에 김석훈은 여심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실제로 불임, 난임 관련 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초청을 받을 정도로 이쪽에서의 이미지는 호감 그 자체였으니까.

깔끔한 외모에 로맨스 소설이 따로 없는 사생활, 거기에 젠틀한 태도와 사람들을 홀려 놓는 말솜씨까지.

선거 유세 현장은 그가 국회의원인지, 연예인인지를 의심하게 할 정도로 그를 지지하는 여성 유권자들로 가득했다.

보통 이렇게 여성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는다면, 반대로 남성들의 미움을 받기 십상이지만 김석훈은 남성들에게서도 폭발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의 선거구가 강남인 데다가, 그들의 마음에 쏙 들 만한 정책을 자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특히 게이트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요동치는 부동산값을 잡기 위해 그가 내놓은 정책들은 부동산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네 아버지 김석훈 의원은 차기 대통령감이야. 그런 상황에서 너 같은 스캔들을 반기지 않겠지.”

이런 상황에 사생아가 툭 튀어나온다면, 김석훈 의원이 여태까지 쌓아 올린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릴 거다. 당연히 금찬명의 존재 자체를 비밀로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는 왜 살려 둔 건데? 나를 살려 두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없애는 게 그 사람한테는 좋을 텐데.”

겨우 열세 살짜리 애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었지만, 금찬명은 자신이 말한 대로 바보가 아니었다. 알 건 다 아는 나이다, 이거다. 금찬명의 말에 백도산은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부인의 건강이 안 좋다는 건 정치적 쇼가 아니라 진짜니까. 아마 그쪽에서 애를 보는 건 힘들 거야. 김석훈 의원도 사람인지라, 제 씨를 남기고 싶은 욕망은 있나 보지.”

“그래서 나를 살려 뒀다고?”

“그래. 너는 이른바 그 사람의 백업인 셈이지.”

앞으로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은 살려 둔.

그 말에 금찬명은 우울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백도산은 그런 금찬명을 보며 속삭였다.

“오늘 나한테 들은 말, 전부 비밀이다. 그 사람한테 아는 척은 절대로 하지 마.”

* * *

그 후 몇 주간 금찬명은 우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 자신이 우울해했나 싶게 다시 기운을 차렸다. 평상시처럼 만화나 같이 보자며 자신을 잡아끄는 금찬명을 보며 백도산은 안심했다.

하지만 금찬명도 백도산도 알고 있었다.

그날 들은 진실을 잊을 수는 없을 거라는 걸.

그렇지만 그 두 사람은 그날의 대화가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그렇게 또 몇 년이 흘렀다.

나이를 먹으며 백도산은 전처럼 금찬명을 자주 찾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에게도 많은 일이 주어졌기 때문에…….

하지만 가끔 찾아오는 그를 금찬명은 마치 어린 시절처럼 반갑게 맞았다. 그의 몸 여기저기서 본 상처나, 아무리 지워 내도 남아 있는 피 냄새를 모르는 척하며 어린 시절처럼 만화나 보자며 그를 이끌었다.

평생을 이렇게 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백도산은 치익,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아들이라더라.”

김석훈 부인의 기적적인 임신 소식이 들려온 지 열 달째. 이번에는 득남 소식이었다.

“경사지, 경사야. 곧 그 사람이 청와대에 들어간다는 소리도 있으니 말이야.”

백도산이 전해 주는 말에 금찬명이 말했다.

“……이제 내 쓸모는 없어졌네. 들켰을 때의 위험은 더 커졌고.”

“뭐어.”

백도산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금찬명은 방긋 웃었다.

“기다리던 때가 왔네.”

“기다리던 때?”

“말했잖아, 나는 바보가 아니라고.”

금찬명이 담배 연기를 뱉어 내는 백도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때 네가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 말해 준 날, 나는 생각했어. 나를 아들이 아니라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한 스페어로 키우는 사람이라면 내게 친구로 어떤 사람을 붙여 줄까. 네 말대로 나는 머리가 좋으니까 열심히 생각해 봤지.”

힌트는 많았다. 백도산의 험악한 인상과 가끔 풍기던 피 냄새. 어딘가에서 두들겨 맞고서 왔던 적이 많다는 것과 이상할 정도로 딱딱한 백도산의 태도나, 움직임까지.

“내가 아는 악당이라면 말이지, 유사시에 그 스페어를 처리할 만한 사람을 옆에 붙여 둘 것 같아. 자기 말을 아주 잘 들을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말이야.”

“야.”

“그 사람이 나를 죽이라고 했지?”

그 남자의 부인이 아이를 낳았으니, 자신은 필요가 없어졌을 거다. 곧 청와대에 들어갈 정도로 인기도 굉장하신데, 사생아가 튀어나오면 모든 일이 그르쳐진다.

아까 말한 대로 자신의 쓸모는 없어지고, 들켰을 때의 위험은 더 커졌다.

평상시와 달리 두꺼운 재킷을 걸친 채 제 눈치를 보는 백도산의 이상한 태도도 힌트였다. 백도산은 아까부터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있었으니.

담배를 소파에 비벼 끈 백도산이 말했다.

“그래.”

“나를 죽이는 대가로 뭘 주겠대?”

“……그 사람한테서 독립하게 해 달라고 말했어. 어차피 그 사람도 청와대에 들어가면 우리 같은 조직은 필요하지 않게 될 테니까. 우리보다 훨씬 괜찮은 놈들이 그 사람의 밑에 줄을 설 거거든.”

“서로 윈-윈인 사이인 줄 알았는데?”

“윈-윈은 무슨. 그 사람은 우리를 개처럼 부렸지. 누군가의 개로 사는 건, 특히 그렇게 더러운 국회의원 밑을 닦는 건 절대 하기 싫은 일이야.”

“아하. 꽤 괜찮은 거래네.”

금찬명의 대답에 백도산은 헛웃음을 지었다. 금찬명의 태도가 영 현실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야, 나 너 진짜 죽일 거야. 너 죽는다고, 여기서.”

“응, 들었어.”

“내가 혹여 그동안의 정으로 너를 살려 둘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알아, 네가 그런 정 같은 거에 흔들릴 사람 아니라는 거. 애초에 너는 나 안 좋아했잖아. 그냥 다 거짓말이었잖아. 알아.”

금찬명의 담담한 태도에 백도산은 오히려 더 놀라 버렸다. 이렇게까지 담담하게 받아칠 줄이야. 솔직히 언젠가 이날이 오게 되면, 백도산은 금찬명이 자신에게 매달려 울고불고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럼 자신은 그렇게 달라붙는 금찬명을 떼어 내느라 고생하게 되겠지, 꽤 지저분한 살인이 될 거야…….

하지만 현실은 예상을 크게 벗어났다.

“좋겠네, 나한테서도 그 사람한테서도 벗어날 수 있어서.”

비꼬는 건가 했지만, 아니었다. 진심으로 저 녀석은 자신의 자유를 축하하고 있었다.

“그게 전부냐? 죽어 주겠다고?”

“어쩔 수 없잖아.”

“살려 달라고 빌지도 않는 거야?”

“빌면 뭐가 달라져? 내가 빌면 네가 날 살려 주나? 아니, 안 되지.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알면 김석훈 의원이 가만히 안 있을 텐데. 그러니까 나를 거둬야지. 그냥 죽이지 않는다가 아니라, 날 거둬서 살려 둬야 하잖아. 김석훈 의원도 모르게. 그런 귀찮은 짓을 네가 할 리가 없지.”

참으로 일리가 있는 말이라, 아니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안 아프게만 해 주라.”

그러고서 눈을 꾹 감는 금찬명을 본 백도산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성큼성큼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금찬명은 바들바들 떨었다. 역시 각오했는데도 죽음은 두렵기 짝이 없다며.

* * *

“하지만 우리 착한 도산이는 나를 죽이는 대신 이렇게 살려 줬다 이거야! 그냥 안 죽인 게 아니에요. 나를 딱 책임졌지. 나 진짜 친구 하나는 잘 두지 않았어? 그날 금찬명은 죽고! 천재 금 박사가 태어났지! 정말이지, 내가 죽었다면 이 세상에 얼마나 큰 손해였을지.”

금 박사의 말에 나는 정신을 쉬이 차리지 못했다.

“그 김석훈 전 대통령이 당신 아버지였단 말입니까?”

“뭐, 일단은? 아들 취급 한 번도 못 받았는데 내가 그 사람 아들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금 박사는 이야기를 전해 주는 내내 실실 웃음을 흘렸지만,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할 내용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 김석훈 전 대통령이 누구냐. 미리내당의 정신적 지주이자, 최초의 셀럽 대통령으로 불릴 정도로 대중적 인기를 끈 사람. 사실상 설록진의 멘토이자, 그가 하는 이미지 메이킹의 토대를 닦아 놓은 사람이었다.

실제로 설록진 또한 은퇴한 그를 일 년에 몇 번이나 찾으며 조언을 구할 정도로 그는 정치계에서 아직까지도 큰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 미치광이 과학자 금 박사가, 그 김석훈의 숨겨진 사생아였다고?

세상에, 눈앞에 두고도 몰랐다니.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아줌마 파마가 연상되는 뽀글머리에 얼굴의 반을 가린 불투명한 안경까지. 이제 보니 외모를 숨기기에는 무척이나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럼 그 코스프레 같은 꼴도 숨어 살기 위해서?”

“아니, 그냥 취향인 건데.”

“미친…….”

설마 저걸 벗겨 내면 제법 괜찮은 얼굴이 나온다든가 하는 건 아니겠지. 안경을 쓴 추녀에서 안경을 벗은 미소녀로 변하는 건 순정만화에서나 볼 법한 클리셰잖아!

절로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출생의 비밀을 듣고 나니 자꾸 생각이 이리저리 튀었다.

“후우.”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이 정보를 써먹을 수는 없을까.

김석훈 전 대통령의 사생아라. 이미 대통령을 해 먹고 은퇴한 양반의 사생활을 뒤늦게 털어 보았자, 미리내당을 흔들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써먹을 데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나는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이 비밀을 써먹으려면, 협조가 필요하다.

“복수는 생각해 본 적 없습니까?”

내 말에 금 박사는 눈을 끔뻑였다.

“복수?”

평생 자기를 가둬 둔 데다가, 자기를 죽이려고 했으니 복수를 생각할 만도 하지 않나.

“글쎄, 딱히.”

“어, 어떻게 복수 생각을 안 할 수 있어요? 그 사람 때문에 인생이 망한 건데!”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 한서현이 입에서 불을 뿜었다. 하긴, 복수 예찬론자시니까. 나도 같은 생각이긴 하다.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대상이었기 때문입니까?”

“아니, 그보다는 그냥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파라서. 나를 봐, 지금 엄청 잘살고 있잖아. 굳이 그 사람을 건드렸다가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도 싫고…….”

“그러니까 그냥 넘기겠다고요?”

“날 살려 준 건 도산이야. 내가 괜히 나서서 여기저기를 들쑤시면 걔한테 피해가 갈 수도 있고…….”

“백도산 씨한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그 사람한테만 복수를 할 수 있다면요?”

“으음.”

그렇게 끙끙거린 금 박사가 내게 물었다.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확실히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라니까. 나는 금 박사에게 조금 전에 떠오른 작전을 말해 주었다.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금 박사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좋네, 그거. 그 사람도 한 번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혀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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