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0화
#87 그 엑스트라의 사정 (1)
백도산은 금 박사랑 따로 얘기하겠다고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분위기가 살벌했다.
문이 탁하고 닫히자마자 한서현이 말했다.
“엿들을까요?”
기껏 우리를 피해서 방으로 얘기를 하러 갔는데 엿듣자니.
“당연하지!”
완전 참된 스파이의 자세 아닌가! 언제 이렇게 성장한 거지?
참된 스파이 한서현 덕분에 우리는 안쪽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대충 엿들을 수 있었다. 왜 ‘대충’이냐면…….
“오! 화낸다! 엄청 화가 난 것 같은데요. 오, 너 호구냐고 혼내요.”
“음…….”
한서현이 전해 주는 축약이 영 부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박하게 오가는 대화를 이 정도로 정리하는 것도 재능…….
“오! 금 박사도 화를 내는데요? 오, 둘이 싸운다, 싸워.”
그래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도는 파악이 되었다. 백도산이 금 박사한테 그만 호구 같이 굴라며 탈탈 털고 있다는 말이지?
그때, 김재호가 말했다.
“손잡고 화해하라고 하자.”
“음, 재호야. 이럴 땐 그 방법은 안 통해.”
“왜? 싸우면 이렇게 화해하라며?”
“그러게.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그런 방법으로 해결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텐데 말이야.”
갑자기 그런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다니.
그나저나 백도산이 여러모로 쌓인 게 많았군. 하긴, 나라도 내 친구가 웬 제비 같은 놈한테 이렇게 뜯기고 있으면 화가 날 테지만……. 그 수법은 금 박사에게 역효과만 불러일으킬 뿐이라고.
금 박사 같은 타입은 말이지. 오냐오냐해 줘야지, 저런 식으로 강압적으로 군다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단 말이지.
━그 ‘오냐오냐’의 결과물이 이 호구질 아니냐?
‘그렇다고 저렇게 말하면 금 박사가 참으로 좋아하겠습니다.’
기회를 노려 금 박사를 신나게 뜯어 먹고 있는 나도 나지만. 저쪽도 문제가 많다.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휘두르려고 하면 언제나 문제가 생기기 마련인데.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저니까 이런 소리를 할 수 있죠. 멋대로 행동하면 얼마나 결과가 안 좋아지는지 아니까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정호산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서현이 별말을 안 하는 걸 보니까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겠지만, 조만간 한 번 그쪽도 염탐해 봐야겠다.
내가 준 돈은 잘 쓰고 있는 건지 한번 봐야겠다. 어디서 금 박사처럼 눈탱이를 맞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 말이지.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복잡한 표정으로 나왔다. 금 박사는 그 짧은 시간 완전히 사람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안쓰러울 정도랄까.
“그럼 난 이제 가 볼게.”
백도산은 금 박사에게 짧은 인사를 건넸다.
“그, 그래. 잘 가고.”
그렇게 나가는 줄 알았던 백도산은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나를 향해 말을 던졌다.
“아, 그러고 말인데 그쪽. 빚은 좀 갚고 살지 그래.”
“예?”
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답해 버렸고, 내 대답에 백도산은 얼굴을 찡그리며 이렇게 말했다.
“너 까먹었지.”
“아이, 뭘 까먹습니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그, 아, 딱 기억하고 있었는데…….”
“푸쉬 앤 캐시. 최인혁 팀장이 그쪽을 아주 간절히 찾고 있던데 말이야.”
아, 이제야 기억났다. 설마 백도산이 그 사람을 대신해서 나에게 추심을 하러 올 줄이야. 역시 사채 업자끼리 통하는 커넥팅이라도 있는 건가.
잠깐, 내가 돈을 빌린 게 작년 이맘때쯤인가. 1년을 거의 꽉 채웠군. 잠깐만, 연이자가 그때 얼마였더라.
━1억 3천에 연이자가 40퍼센트였다. 사채니까 당연히 복리일 거고…….
맞아, 기억난다. 그때 한 달 이자가 430만 원 정도 됐나. 지금쯤이면 대충 2억이 좀 안 되겠군.
“갚겠습니다.”
단번에 나온 대답에 백도산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 바로 갚을 수 있는 돈을 피해 도망을 쳤냐는 듯이. 나도 모르게 변명이 줄줄 나왔다.
“그게, 그사이에 제가 살인 수배범이 되지 않았습니까? 딱히 그 사람을 피해서 도망쳤다기보다는 타이밍이 얄궂게 맞아떨어졌달까?”
━애초부터 갚을 생각이 없지 않았던가?
‘……예.’
백도산이 레이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하는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음, 이 말에도 할 말이 없었다.
“앞으로는 서로 선을 잘 지키자고.”
이건 경고다. 각성자도 아닌 주제에 눈에서 살기가 아주 줄줄 뿜어져 나왔다. 이 말을 끝으로 백도산은 사라졌다.
음, 잔뜩 미움받아 버렸나.
여태까지 나와 백도산은 ‘그럭저럭 좋은 파트너’였다. 하지만 지금 이 기점으로 우리 사이의 동맹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건 내 잘못이다. 여러모로 ‘선’을 넘었지.
‘흠…….’
정말로 내가 괜찮은 일을 물어다 주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은데. 흠, 정말 괜찮은 사업 아이템을 찾아봐야겠다.
백도산과 대화를 끝낸 뒤에 기분이 영 좋지 않은지, 금 박사는 잔뜩 시무룩한 얼굴로 소파에 기대앉았다.
잔뜩 기가 죽어 보이는 금 박사를 보니, 마음 한구석이 콕콕 찔렸다. 정말이지 저 둘 사이에는 끼고 싶지 않은데. 신경 쓰이게 만드네.
“별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꼭 순정 만화 속 여주인공처럼 억지로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아니, 애초에 당신 첫인상은 미치광이 과학자였잖아! 캐릭터 붕괴야, 이거!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는데요. 솔직히 두 사람이 싸운 거 우리 때문이잖아요?”
“미안하다. 너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줄은 알았지만, 저렇게까지 싫어할 줄은 몰랐어.”
음, 우리가 문제가 아닐걸. 그쪽이 우리한테 너무 잘해 줘서일걸. 솔직히 호구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잖아 당신.
“내일 나가겠습니다.”
솔직히 금 박사네가 편하긴 해도, 숙소를 찾아보자면 못 찾을 건 없다.
우리의 행적이 드러나면 안 될 테니, 능력을 써서 흔적을 감추는 것 정도의 노력은 해야겠지만.
주기적으로 숙소를 옮겨 다니며 흔적을 지워야겠지만, 지금처럼 치킨도 마음대로 못 시켜 먹겠지만…….
━엄청나게 아쉬워 보이는데?
‘그야, 불편하긴 하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백도산의 경고까지 무시해 가며 이곳에 있는 건 내키지 않는다.
내 말에 차송진이 비명을 질렀다.
“에엑! 내일 다 같이 농구 게임 하기로 했는데!”
“맞아, 그거 끝나면 아이스크림 퍼먹으면서 우당탕, 코오쨩의 대모험 3편을 보기로 했다고.”
“영화를 다 본 다음에는 서로 감상을 나누며 케이크를 먹기로 했고…….”
“뭔데, 그거…….”
어째서 계획이 벨츠머츠로 일할 때보다도 촘촘한 건데.
금 박사가 말했다.
“아니, 안 나가도 돼! 아니, 나가지 마! 내가 뭔데, 그, 그 자식 말을 들어야 하는 건데? 나도 내 일은 스스로 하는 어른이라고.”
이상하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가 달라는 듯이 나를 봤으면서. 실제로 가끔씩 눈이 마주칠 때마다 금 박사의 눈빛에선 영혼 함량이 점차 낮아지는 중이었단 말이다.
그런 주제에 막상 우리를 합법적(?)으로 쫓아낼 기회가 생겼는데도 쫓아내지 않겠다니.
자기 팔자는 자기가 꼰다고. 딱 그 짝이었다.
어떻게든 우리를 쫓아내고 싶어 했던 백도산이 본다면 그대로 뒷덜미를 잡고 쓰러질 것 같은데.
“그나저나 백도산 저 사람이랑 당신, 정확히 무슨 사이입니까? 아니, 친구 사이겠지만. 도대체 어떻게 친구가 됐는지 새삼 궁금해져서요.”
“정말 궁금해져서 묻는 거야?”
“그럼 그냥 하는 말이게요?”
“아니, 새삼. 나 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나 싶어서.”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나 같은 사람’이라니. 그런 자존감 낮은 소리를 하는 건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아까부터 캐릭터 붕괴가 심각하다. 미치광이 과학자 캐릭터면 그 캐릭터에 걸맞게 눈이나 하얗게 까뒤집으면 좋을 텐데.
뭐, 그동안 얻어먹은 게 얼마인데. 나에게도 양심은 있단 말이지.
“정말로 궁금해져서 그럽니다. 그래도 알게 된 지 오래됐는데, 박사님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단 말이죠.”
금 박사의 취향에 대해서는 제법 아는 게 많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어울리지도 않게 귀여운 걸 좋아한다는 거라든가, 심각할 정도의 가면 성애자라든가, 케이크와 차를 곁들여 먹는 걸 좋아하는 거라든가.
근데 막상 금 박사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른다.
새삼 생각해 보자면, 금 박사에게는 수상쩍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뭔가 아는 사람도 없어 보이고, 뒤에 누가 있지도 않은데 이 엄청난 재력 하며……. 뭐, 이거야 자수성가했다고 칠 수도 있지만.
백도산과 친구라는 것부터가 수상하긴 하지.
백도산의 배경은 확실했다. 그의 아버지는 지금 그가 이끌고 있는 조직의 전신인 흑표파의 보스였고, 백도산은 그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부터 후계자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을 거다.
그러니 이상하지, 그런 사람의 곁에 이렇게 그 어떤 배경도 알 수 없는 사람이 붙어 있다는 게.
어린 시절부터 암흑 조직의 후계자로 길러진 남자와 눈앞의 헐렁한 남자가 어떻게 만나 우정을 나누게 된 거냐고.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나는 그냥 너희한테 가끔씩 필요한 걸 조달해 주는 그런 NPC 같은 존재 아니었어? 난 사람들이 그리 좋아할 타입도 아니고, 궁금해할 타입도 아닌데…….”
그래, 누군가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얘기겠지.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껏해야 방구석에 처박혀서 가면 히어로 영화를 보는 걸 좋아하는 히키코모리 오타쿠인 그의 이야기를.
그렇지만 말이야.
“NPC라니, 섭섭하네요. 그래도 박사님 정도면 영입 가능한 동료 정도는 될 것 같은데요. 그리고 원래 그런 캐릭터는 나름대로 과거 에피소드를 풀어 주기 마련이라고요.”
“뭐, 뭐야. 지금 내 드립을 알아듣고 받아치기까지 했어?”
“뭐가 그렇게 놀라운 건데요.”
당신이 오타쿠니까! 어쩔 수 없이 오타쿠 화법에 맞춰 대화해 준 것뿐인데!
“어쨌거나 나 나름대로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하다고요.”
내 말에도 금 박사는 눈을 굴려 가며 내 말에 대한 대답을 회피했다.
“재미없을 건데.”
“재미랑은 상관없어요. 아니, 애초에 당신 얘기가 궁금하다는 데 재미 얘기는 왜 나오는 거예요. 재밌자고 듣자는 거 아니거든요. 문자 그대로 궁금하다는 거지.”
“왜?”
“그야…….”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박사님 말대로 박사님을 NPC 정도로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대로 며칠 얼굴을 맞대고 살았고, 그동안 우리를 도운 게 얼만데. 친구까지는 아니어도, 당신을 동료로 여겨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얘기하기 싫으면 딱히 얘기하지 않아도 되지만요, 박사님 태도를 보면 왠지 그것도 아닌 것 같아서…….”
그래, 그게 딱 보이는 게 문제다. 정말로 말을 하는 게 싫었으면 딱 잘라서 싫다고 말했을 거다. 하지만 금 박사는 이상한 변명을 댔지.
나에 대해서 궁금해할 사람은 없을 거다. 재미가 없을 거다……. 그러니까 사실은 더럽게 말하고 싶은데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말할 수가 없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캐물을 수밖에 없잖아.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는지.
“내 정체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할 수가 없어. 나름 목숨이 걸린 문제라.”
“예?”
그렇다고 이렇게 중2병 같은 대사를 기대한 건 아닌데. 게다가…….
“저기요, 그런 말을 한 시점에서 이미 이 대화를 피하기엔 늦었다는 생각 안 듭니까?”
“아차차, 내가 플래그를! 그, 그래도 정말이지 내 정체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고.”
“그야, 박사님이 말하고 있는 대상이 ‘일반인’이라면 그렇겠죠. 근데 말이야, 우리가 누구냐고요.”
그 악명이 무시무시한 악당 벨츠머츠가 아닌가.
“걱정하지 말아요. 박사님 정체를 아는 것 정도는 벨츠머츠를 잡아 족쳐야 하는 이유 상위권에도 들지 못할 테니까.”
내 말에 금 박사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 박사의 정체는, 그가 말했던 대로 나를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