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9화
#86 인연이라고 하죠 (8)
금 박사네 집은 끝내줬다.
“진짜 집에 없는 게 없어.”
돈 많은 내향인은 최고다.
“집에 무슨 제트 분사 욕조가 있냐, 아까 봤어? 무슨 집에 극장이…….”
그래, 극장. 그냥 홈시어터 좀 달고 한 수준이 아니었다. 완전 극장 시설을 떼 온 것 같은 ‘극장’이 지하에 있었다. 극장뿐만 아니다. 노래방, 오락실, 거기에 게임룸까지.
처음에는 우리가 눌러앉는 걸 불편하게 여기는 기색이 가득했던 금 박사였지만, 며칠 만에 우리에게 꽤 적응했는지 이내 이것저것을 알려 주었다. 그건 아마도 저 두 사람의 폭발적인 리액션 때문이었을 거다.
“우와, 우와아아!”
“쩐다! 최고다!”
“후후후.”
금 박사는 자신을 찬양하는 차송진과 김재호 사이에서 뿌듯한 얼굴로 코끝을 쓸고 있었다. 뭐냐, 저 표정은. 왠지 트집을 잡고 싶을 정도로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잖냐.
차송진과 김재호는 금 박사를 거의 신으로 모실 정도였다.
“집 나오면 고생이라고 했는데…….”
우리 조직은 어떻게 집 나오고 행복 시작이냐. 흠, 하긴. 여기도 일단 집이긴 하니까 집을 나간 건 아니려나.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나 금 박사네 집에 정을 붙이다니. 이래서야 곤란하다. 나는 차송진과 김재호의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아주 여기서 살 기세네? 엉?”
내 말에 김재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보스 여기 너무 좋다. 여기서 살고 싶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엄연히 우리 집이 있는데, 여기서 살고 싶다니.”
“우리 집은 구리잖아.”
믿었던 김재호도 이런 말을 하다니. 충격이었다.
“안 구려! 뭐가 구리다고 그래! 아니야, 안 구리다고!”
“여기에 비하면 구리잖아…….”
그 말에 숨이 턱하고 막혔다. 그, 그야! 돈 많은 집돌이가 만들어 놓은 파라다이스에 비하면 부족한 점이 많기야 하지만!
“여기 오락실도 있어. 극장도 있어. 노래방도, 오락실도 있어. 마사지룸도 있고, 찜질방도 있고…….”
“그, 그래도! 우리 집엔 추억이 있잖아! 그리고 우리 집도 마사지룸 비슷한 건 있었어! 네가 안마의자를 다 부숴 놓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야!”
“그치만 그건 나를 막 때렸잖아! 하지만 여기 기계는 안 그래. 막 시원하게 주물러 준다고. 그리고 여기서도 추억 많이 쌓았어. 어제도 케이크 다섯 개 먹었고…….”
“그런 걸 추억이라고 하면 안 되지, 인마!”
안 된다. 이래서야 벨츠머츠 기지의 위상이!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여기보다 우리 기지가 나은 점을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30분 뒤.
나는 거실 벽에 홀로 기대앉은 채 패배감을 곱씹었다.
30분 동안 아무리 고민을 해 봐도 없더라, 우리 기지가 더 나은 거.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요?”
한서현의 말에 나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너는 왜 여기에 있어? 다른 사람들이랑 안 놀고?”
“정신없어서 빠져나왔어요. 완전 별로…….”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한서현의 얼굴은 며칠 사이 광이 나고 있었다. 그동안 즐기지 못했던 놀이를 잔뜩 즐겼기 때문인지, 답지 않게 눈이 초롱초롱했다. 옆에 서 있는 한조희(스켈레톤)의 몸에는 인형 뽑기에서 뽑은 인형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이익! 완전 별로는 무슨, 완전 즐기고 왔잖아!
“흠, 그럼 이제 전 좀 쉬러 가 봐야겠어요.”
“어디로?”
“아, 찜질 좀 잠깐 해 볼까 하고요. 노르웨이식 사우나실이 있대요.”
“그, 그래. 잘 쉬러 가라.”
나는 거실에 앉아 한숨을 푹 쉬었다. 한서현마저 넘어가 버리다니. 하긴,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는 구성이긴 하지.
‘끄응. 준이 우리 기지를 다 완성하고 나면 저도 좀 여러 가지 놀잇감을 들여놔야겠습니다.’
━그래, 솔직히 말해 지금은 완패다. 완패.
‘하지만 제가 놀이공원을 만드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빌런 기지에 꿈과 희망이 넘쳐나는 것도 이상한데요.’
━아직도 그런 되도 않는 거에 집착하는 거냐.
그래, 레이의 말처럼 에드워드에 의해서 내가 칠해 놓았던 검은 칠이 벗겨진 순간 깨달아야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최강의 기지를 지어 주겠다, 이 말이야.
그렇게 다짐하고 있을 때, 누군가 이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요란한 알람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금 박사를 불렀다.
“어이! 금 박사 손님 왔다!”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하긴 지하에 있는 사람한테 이게 들리면, 금 박사가 아마도 각성자일 거다.
초인종은 집요하게 울렸다.
“아, 거참! 누군진 몰라도 더럽게 끈질기네!”
━네가 할 말이냐?
이게 거울 치료인가, 뭔가 하는 건가. 내가 당하니, 썩 기분이 좋진 않은데.
웬만해서는 집주인도 아니니 가만히 있으려고 했지만, 이 정도로 집요한 손님이라니. 꼭 문을 열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 야밤에 누가 온 거지.
“아, 혹시 먹을 거라도 시킨 건가?”
저녁 9시. 딱 출출해진 김재호가 슬슬 야식이 먹고 싶다고 조를 때긴 했다.
이런, 빨리 나가야겠는걸.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예, 예. 나갑니다.”
문을 여니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오, 치킨. 하지만 그 치킨을 들고 있는 사람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나를 본 백도산이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정말 있었네?”
“어, 음.”
* * *
꼭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것 같다. 김재호와 금 박사만이 이 숨 막히는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채 신이 나서 치킨을 거실 테이블에 깔고 있었다. 치킨 열 마리가 순식간에 거실 테이블을 꽉 채웠다.
처음에는 백도산이 치킨 배달 기사로 취직을 한 건가 싶었지만, 당연히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치킨 배달 기사랑 이 앞에서 만났다나. 간이 얼마나 큰 건지, 저 사나운 얼굴에도 기죽지 않은 치킨 배달 기사는 백도산에게 치킨을 맡기고 도망갔단다.
백도산도 이곳에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백도산이 사 온 케이크는 치킨에 밀려 저 멀리에 놓였다.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팔짱을 낀 백도산이었지만, 김재호와 금 박사는 그 사나운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나와 차송진만이 무릎을 꿇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중이었다.
“이거 먹고 케이크도 먹자!”
금 박사의 말에 눈썹을 꿈틀거린 백도산이 말했다.
“너 먹으라고 사 온 건데?”
“그래도 같이 나눠 먹으면 좋잖아.”
김재호는 금 박사의 말에 헤벌레 미소를 지었다.
“박사, 착하다!”
“하하, 내가 좀 성격이 좋은 편이긴 하지.”
가슴이 절로 답답해지는 바보와 호구의 대화에 백도산의 얼굴이 구겨졌다.
여전히 팔짱은 풀리지 않은 채였다. 나는 어깨를 최대한 수그린 채 얼른 손을 뻗어 치킨 무 뚜껑을 땄다. 평소와 달리 얌전히 치킨 무를 세팅하는 내 모습에 금 박사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말했다.
“내가 할게, 그냥 둬. 아! 안 하던 짓 하지 말고 그냥 둬. 국물, 국물 흘려!”
나는 그 말에 머쓱함에 손을 내렸다.
“평소에는 영 안 도와주나 봐?”
백도산의 말에 금 박사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야, 여긴 내 집이고 저쪽은 손님이니까.”
“그래, 손님? 근데 손님이라기엔 왠지 다들 잠옷 차림새네? 마치 여기서 자고 먹고 묵는 것처럼.”
아뿔싸! 너무 편하게 있던 걸 들켜 버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금 박사에게 눈짓을 날렸지만, 눈치라고는 개뿔도 없는 금 박사는 내 간절한 신호를 알아채지 못했다.
“아, 저쪽 기지가 공사를 한다나? 잠깐 머물 곳이 필요하다던데…….”
“그래서 있으라고 했어?”
“뭐, 집으로 들어온 사람을 쫓아 낼 수도 없잖아?”
아, 안 돼! 멈, 멈춰! 나는 속으로 그렇게 간절히 바랐지만, 눈치도 없는 금 박사는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같이 지내니까 아주 나쁘진 않던데. 재밌기도 하고…….”
“다른 사람 있는 거 엄청나게 싫어하면서?”
계속해서 제게 틱틱대는 백도산의 태도에 드디어 무언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것인지, 금 박사가 드디어 입을 닫았다.
“먹자!”
하지만 김재호의 입은 닫히지 않았고, 치킨에 눈이 멀어 버린 김재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 일단 먹고 얘기하자!”
금 박사 또한 합류했고, 백도산의 팔짱은 드디어 풀렸다.
“너도 먹을래?”
“아니.”
백도산의 말에 내 간담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눈치도 없는 김재호와 금 박사는 싸늘한 시선도 알아채지 못한 채 치킨을 아주 맛나게도 먹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치킨 먹방이 끝난 뒤, 케이크 개봉식이 있었다. 케이크 가게를 털어 오기라도 한 건지, 케이크가 종류별로 많았다. 김재호는 케이크 또한 게 눈 감추듯이 먹어 치웠다.
“할 말이라는 게 뭐야?”
포크를 입에 문 채로 금 박사가 백도산에게 말을 건넸다. 비위도 좋은지 금 박사의 귀여운 척에도 백도산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일단은 저쪽부터.”
“저쪽?”
불똥이 튄 곳은 내 쪽이었다.
“우리한테 말입니까?”
여태까지 무슨 소리 안 들으려고 얼마나 필사적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다 헛것이 돼 버렸다.
“나한테 무슨 할 말이…….”
내 말에 백도산이 사나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그제야 나는 떠올렸다. 아차차, 내가 저쪽 사업을 하나 말아먹으려고 했지? 백도산이 나를 향해 말했다.
“마약 사업을 접자고 했다던데?”
“하하, 그거요. 이번에 중국에서 있었던 일을 겪고 나니까 말입니다. 마약이 얼마나 나쁜 건지 새삼 알게 됐다고나 할까요?”
“아하, 구더기가 무서우니 남의 장독대를 다 부숴 버리겠다고?”
그러네, 내 장독대도 아니고 남의 장독대네, 이거. 웃는 얼굴이었지만 살기가 가득했다.
“한 손 얹게 해 달라고 부탁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양심이 갑자기 자라난 것도 아닐 테고. 무언가 수가 있으니 그런 소리를 한 거겠지?”
큰일 났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런 말을 한 게 맞는데.
그야, 마약 산업을 대체할 만한 수익성을 낼 수 있는 일이 있었다면 사업가들이 가만히 내버려 뒀겠냐고.
하지만 솔직하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사실 생각해 둔 사업 아이템이 하나 있긴 합니다.”
“그게 뭔데?”
“아직은 준비 중이라서 말이죠. 조금 더 확실해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그냥 넘어가 주라, 으응?
“그 계획이라는 거, 정말 있기는 한 거지?”
“예.”
아니, 없다.
백도산은 마치 나의 생각을 꿰뚫어 보려는 듯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도 표정 관리라면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고.
“만약 그 계획이라는 게 잘 안 되면?”
“그럼, 뭐. 장사하시던 거 계속하셔야죠.”
모양 빠지지만 일 보 후퇴다. 절대로 추한 게 아니야. 괜히 여기서 백도산과 분란을 일으켜 봐야 내 손해니까.
그렇게 나는 겨우 백도산의 공격을 흘려 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백도산은 구석에서 얌전히 우리의 얘기를 듣고 있던 금 박사에게로 총구를 돌렸다.
“그럼, 금찬명. 잠깐 얘기 좀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