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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337화 (337/352)

제337화

#86 인연이라고 하죠 (6)

잠시 쉬는 시간. 텐트로 들어간 준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낸 뒤 물을 들이켰다. 정말이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일단 기초 공사를 하고, 그다음에는 기둥을 세울까……. 그런 고민이 한창일 때,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반짝거렸다.

준은 손을 뻗어 휴대폰을 확인했다.

M : 준준, 한국에는 잘 도착했어? 무사한지 걱정이네! 어떻게 내가 먼저 연락하기 전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을 수가 있어?

메이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방방 뜬 분위기에 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나 해킹을 당한 걸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곧 이어진 메시지에 의심이 사그라들었다.

M : 뭐, 우리 사이가 최악이었단 건 알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우리 둘밖엔 안 남았잖아. 그러니까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기엔 좀 그렇지만 자주 연락하고 지내자고!

어렸을 때 들었던 메이의 다정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준은 차분히 메시지를 보냈다.

J : 무사히 도착했어. 넌 어떻게 지내?

M : 나? 나는 엄청나게 잘 지내고 있어! 가게를 거금에 사 주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전부 다 넘긴 거 있지. 다들 가게를 접는다는 말에 아쉬워했지만 말이야, 더 큰 꿈이 있다고 하니까 다들 응원해 주던걸! 다들 내 오디션을 응원해 줬고 말이지.

J : 오디션? 무슨 오디션?

M : 으음~!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말 안 해 줄 거야!

갑자기 오디션을 봤다니. 어디서 사기나 당한 게 아닌지. 준은 메이의 ‘오디션’에 대해서 더 캐묻고 싶었지만, 메이는 ‘잘 되면 말해 주겠다’는 말로 대답을 회피했다.

‘그럼 아예 말을 하지 말지, 괜히 걱정만 되잖아!’

준은 뚱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띠링, 메이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M : 그래서 거기는 어때?

그 메시지에 준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말할까? 솔직하게? 솔직하게 말하면, 글쎄, 메이가 속상해하지는 않을까.

도착했더니 웬 거지 같은 집에서 같이 살자고 하길래 다 뜯어고치는 중이라는 말을 하면,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라고 말할 것 같은데.

사실, 준도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 집을 바라보는 순간 이 집의 비명이 그대로 들려서 말이지. 도대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시체를 꿰어 만든 것 같은 괴물이라는 표현은 과한 게 아니었다. 그 남자도 이 흐름을 봤다면 같은 말을 했겠지.

‘그 남자…….’

정말이지 손 대신 발이 달린 건 아닐까 싶게 형편없는 솜씨를 가졌다. 정말이지 최악.

그 의자도 그랬다.

아무리 고문용이라도 그런 걸 만들다니. 그딴 걸 만들기 위해 희생된 재료한테 사과해, 사과하고 다시는 아무것도 만들지 마.

뭐, 그런 걸 제외하고서는…….

J : 그럭저럭 괜찮아.

준의 뜨뜻미지근한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듯, 메이의 질문이 이어졌다.

M : 뭐야, 그게. 그럭저럭 괜찮다니.

J : 그럭저럭 괜찮으니까, 그럭저럭 괜찮다고 말하는 거야.

M : 그래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긴 하네! 네 성격에 진짜 거지 같았다면 그렇다고 말했을 테니까.

J : 뭐어.

거지 같은 집을 지어 놔서 사람을 열받게 하긴 했지만, 그 남자가 아주 나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 집을 새로 짓게 해 달라는 부탁도 허락해 줬고. 분명 이 집에 애착이 많아 보였는데 말이다.

실제로 이 집을 다 부숴 버리겠다고 말했을 때, 절대로 부숴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해 줬고.

잠시 맡아 준 어린애들이 그리고 갔다는 그림도 그렇고. 영 솜씨가 이상해서 그렇지, 정성이 느껴지긴 했다. 재료는 확실히 나쁘지 않았다. 주변의 재료를 이용해서 벽돌을 하나하나 만들었다니. 그 솜씨에서는 나름 최선이었겠지.

이 벽돌을 다 버릴 생각은 없었다.

다만 배치를 달리하고, 회로를 다시 짜서 조금 더 그럴듯한 집을 만들 생각이다.

M :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그 남자 얼굴도 봤어? 진짜 얼굴 말이야.

진짜 얼굴이라. 그러고 보니 메이는 그 남자의 진짜 얼굴을 보지 못했지. 쑤어하오주라는 여자가 찾아왔을 때, 강이신의 얼굴을 본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메시지를 적었다.

J : 응.

M : 정말? 어떻게 생겼는데? 뭐, 뭐! 그 인성을 보니까 이상하게 생겼을 게 분명하지만 말이야. 그냥, 궁금해서 말이지. 그래도 내, 내 동생을 데리고 갔는데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궁금해져서.

J : 조금 야비하게 생겼어.

M : 그게 끝이야?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없어?

“음…….”

준은 메이의 말에 눈을 찌푸렸다. 솔직히 말해 강이신의 얼굴은 준의 머릿속에 그리 잘 남아 있지 않았다.

준은 사람의 외모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편이었으니까.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준은 인터넷에서 검색한 사진을 하나 보내 주었다. 주름이 잔뜩 진 크림빵 사진이었다. 김재호라는 멤버한테 성질을 부릴 때 이거랑 똑같이 생겼다고.

M : 이, 이게 뭐야?

J : 닮았어, 이거랑.

M : 전혀 도움 안 돼! 전혀! 구겨진 빵 사진을 보고 어떻게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고! 으응? 그냥 사진 찍어서 보내 주면 안 돼?

J : 그 남자 얼굴이 그렇게 궁금해?

M : 아니! 그냥, 이런 사진으로는 설명이 안 되니까! 엉? 이런 구겨진 빵 사진이랑 닮은 사람이라니 어떻게 생긴 건지 궁금해서 그래!

“큭.”

준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미소는 곧 사라졌다.

“손 대신 발이 달린 남자는 안 돼, 메이.”

응, 절대로 안 돼.

* * *

금 박사의 케이크 창고는 하루 만에 전부 털려 버렸다.

범인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김재호였다. 범인은 입 근처에 묻은 크림을 미처 닦아 내지도 못한 채 현장에서 검거되었다.

그의 번들거리는 입술과 달콤한 숨결이 그가 이 일의 범인임을 확실히 알려 주고 있었다.

텅 빈 케이크 보관함을 본 피해자 금 박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넋을 잃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 내, 한, 한정판 케이크가…….”

“케이크에 무슨 한정판이 있어.”

“있어! 한정판! 계절 한정판이라서 이제는 더 못 먹는다고! 이제 곧 딸기 철도 끝나서 그 베이커리에서는 더 안 만든다고 그랬단 말이야!”

“딸기 철은 5월까지이지 않아? 지금은 4월이니까…….”

“질 좋은 딸기를 확보하는 건 4월까지가 한계라고 했다고! 저게 마지막이었어, 마지막!”

“어, 그러냐. 미안.”

“미안하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고!”

금 박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히끅거리는 소리를 냈다. 곧 눈물이라도 쏟아 낼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 아니, 겨우 케이크 몇 개에 이런 반응이라니.

“거참! 사다 주면 될 거 아니야!”

“한정판이라는 말 못 들었어? 판매가 끝났는데 무슨 수로 사 와!”

“그, 그…… 비슷한 거라도 사다 주면 될 거 아니야!”

당황스러워서 그런가. 목소리만 크게 나왔다. 그렇게 우리가 왁왁 소리를 지를 때였다.

“일단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게 먼저 아닐까…….”

가만히 우리를 지켜보던 차송진이 나섰다. 꾸벅, 고개를 숙인 차송진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우, 우리 애가 미숙해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우리 애도 반성을 하고 있으니 부디 용서해 주심이…….”

그 말에 금 박사가 소리를 빼액 질렸다.

“전혀 반성 안 하고 있거든!”

금 박사의 말대로 김재호는 전혀 반성하지 않는 얼굴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입에 묻은 크림을 닦지도 않은 그 모습에 금 박사가 뒷덜미를 붙잡고 소리쳤다.

“진짜로 전혀! 조금도 반성이라곤 쥐뿔도 없는 얼굴이거든, 저거!”

“아잇, 재호야!”

차송진이 김재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살벌한 얼굴로 속삭였다.

“네 것도 아닌데 그렇게 먹어 놓고 뻔뻔한 표정을 지으면 안 되지.”

“하지만 이름이 안 쓰여 있었다고…….”

“그건 우리 집 규칙이고! 여긴 금 박사네 집이잖아. 우리는 손님이라고, 손님! 그러니까 집주인의 허락이 중요하다고.”

“……응.”

“허락도 안 받고 남의 걸 먹으면 안 되지?”

“응.”

“그럼 뭐라고 해야 하지?”

“미안합니다…….”

세상에, 재호가 사과하고 있다니.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감동이다, 감동.

“그래! 그래, 그렇게 사과하는 거야. 나처럼 고개 숙이고, 자, 이렇게 말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름다운 모습에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을 무렵, 차송진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어이, 거기 강 씨 와 보세요.”

“으응? 나?”

“그래! 당신도 보스가 되어서는, 이런 일에 책임은 지지 못할망정! 뭐? 사다 주면 그만이야? 그 태도가 맞아?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아지지. 이래서야 내가 맨날 가르치면 뭘 하냐고!”

“으윽!”

“당신도 사과해!”

나는 차송진의 등쌀에 금 박사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잘못했습니다.”

“진심이 안 들어가 있잖아! 다시!”

“죄, 죄삼다.”

“어엉? 진심을 담으라니까!”

“왜 나한테만 이렇게 까다로운 거야!”

“당신이랑 재호가 같아?”

그렇게 달달 볶인 다음에, 나는 겨우 ‘진심’을 담은 사과를 금 박사에게 건넬 수 있었다.

“자, 그럼 우리 애들이 이렇게 사과를 하니까…….”

차송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금 박사의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어, 어! 울, 울 정도로 화가 났어요?”

“아니, 내 세상에 저 무지막지한 놈들에게 이렇게 상식적인 사과를 받아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 아아, 감동이야. 당신 뭐 필요한 건 없어?”

“아니요, 당장은…….”

아니, 기회가 왔는데 저렇게 거절하다니.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 송진이 형은 허접이니까 좋은 방어구가 필요한데 말이야.”

“날름 말하지 마! 조금 전에 했던 사과가 흐려지잖냐!”

“맞아요, 송진이 형은 전투력이 제로거든요. 참새보다도 약할걸요.”

“그 정도는 아니거든!”

차송진은 얼굴이 벌게진 채로 우리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금 박사는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받아 적었다.

“응응, 송진 씨는 허접이구나.”

“뭘 받아 적는 거야! 아니, 애초에 그 메모장은 어디서 나온 거야?”

“아, 이거 말이지. 언제나 말아서 휴대할 수 있는 메모장이야. 내가 개발했지. 평상시에는 이렇게 팔에 팔찌처럼 감아 두고 필요할 때는 이렇게 풀어서 쓰는 거야.”

“오, 유용해 보이는데. 그것도 줘.”

“정말이지, 너한테는 양심이라는 게 있냐!”

차송진은 그렇게 말했지만, 원래 챙길 수 있을 때는 전부 챙기는 게 답이다. 응, 그렇고말고. 게다가 말이다. 금 박사는 이런 요구에 약하거든.

“오, 여기.”

“그렇게 달라는 대로 다 주면 애 버릇이 나빠지잖아요!”

“하, 하지만 저렇게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안 줘!”

“이 사람도 문제가 많구만…….”

차송진은 우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먼 곳을 바라보는 차송진의 얼굴이 새삼 힘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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