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5화
#86 인연이라고 하죠 (4)
새벽 한 시. 금 박사는 고양이 무늬가 그려진 파자마를 입고 우리를 맞았다. 우리의 시선에 금 박사가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 소리쳤다.
“그, 그러게 누가 막 오래?”
“고양이 애호가였습니까? 그건 또 몰랐네.”
“그, 그냥 세일해서 산 것뿐이거든!”
“돈도 많은 양반이.”
딱 봐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을 것 같은 사람이 취향도 아닌 걸 세일을 한다고 샀을 것 같진 않다. 그냥 순순히 고양이 취향이라고 말해도 될 것을. 이미 지독한 가면 성애자인 것도 다 알고 있는데 새삼 이미지 관리인 건지.
우리는 복도를 지나 거실에 도착했다. 소파에 앉은 나는 죽상을 하고 내 앞에 앉은 금 박사에게 물었다.
“케이크는 안 줍니까?”
“진짜 염치라는 게 있는 거냐고! 애초에 새벽 한 시에 케이크라니.”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금 박사는 케이크를 얌전히 꺼내 왔다. 뉴욕 치즈 케이크였다. 케이크를 본 김재호의 눈이 반짝거렸다.
나는 김재호에게 내 몫의 케이크를 밀어 주었다. 차까지 야무지게 내온 금 박사가 나를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이번에는 대체 왜 온 건데.”
“오랜만에 얼굴이나 볼까 해서요.”
내 말에 금 박사가 어디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새벽 한 시에?”
“배가 열한 시에 항구에 도착했거든요.”
“그럼 그냥 집에 가서 쉬어야지, 왜 우리 집에 와.”
“에이, 집에 가는 길인데 겸사겸사 들른 거죠. 그나저나 정말 자고 있었습니까?”
이 인간 생활 패턴으로 새벽 한 시는 한낮이나 다름없었을 텐데. 내 의심 섞인 시선에 금 박사가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아니.”
“그럼 잠옷은 왜 입고 있어요?”
“그, 그야 편하니까!”
생활복으로 잠옷을 입고 있었냐고. 그전에는 제법 멀쩡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아, 그때는 미리 옷을 갈아입을 시간을 줬었나.
“중국에서 요란하게 사고를 쳤길래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내가 괜한 사람을 걱정했네.”
금 박사의 말에 나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 반응에 순순히 내가 중국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줄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은 건지, 케이크를 깨작거리던 금 박사가 슬쩍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중국까지 다녀왔는데 기념품은 없어?”
“기념품이라기엔 좀 그렇고, 엄청난 장인과의 일대일 미팅권이 있는데요.”
“설마 그 엄청난 장인이라는 게 저 여자애는 아니겠지?”
포크를 든 손으로 준을 가리킨 금 박사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게까지 싫은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잖습니까?”
“어린애잖아.”
“어린애여도 실력은 끝내준다고요. 애초에 제가 중국으로 가려고 마음먹은 건, 저 여자애를 포섭하기 위해서였거든요.”
“얼마나 대단한 장인이길래 그래?”
아닌 척하고는 있지만, 금 박사의 시선은 이미 준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건 앞으로 차차 알아가 보자고요. 그쪽이랑 협업도 준비해 둘 테니까.”
“참나, 협업이라니. 오늘 처음 보는 사이인데 무슨 부탁을 하는 거야.”
금 박사의 말에 내가 덧붙였다.
“오늘 여기에 온 것도 장인님의 부탁 때문이었습니다. 그쪽이 준 가면을 보더니 ‘아, 이런 대단한 물건을 만든 장인은 어디에 있나요? 꼭 찾아뵙고 싶어요!’라고 어찌나 매달려서 빌던지.”
“크, 흠흠. 보는 눈은 있나 본데.”
역시 금 박사는 이런 칭찬에 약하다. 내 과장에 한서현과 차송진이 질렸다는 표정을 짓는 것도 모르는 채 금 박사는 입꼬리를 슬금슬금 올렸다.
“그래서 저 꼬맹이가 원하는 게 뭔데?”
금 박사의 시선에 준이 기분이 나쁘다는 듯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왜 자꾸 나를 힐끔거리는 거야?]
[그야, 네가 저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했으니까. 가면을 만든 사람을 만나 보고 싶다며, 저 사람이야.]
[그런 대단한 물건을 저런 얼빠진 원숭이를 닮은 놈이 만들었을 줄은…….]
실력은 마음에 들었지만, 첫인상은 영 별로인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원숭이를 닮은 얼굴이라니. 따지고 보자면 너나, 나도 원숭이를 닮았단다. 왜냐, 우리는 모두 영장류이기 때문이지…… 라는 말은 금 박사를 향한 위로로는 적절치 않겠지. 음, 속으로만 생각하자.
나는 대충 준의 말을 각색해서 금 박사에게 전해 주었다.
“그쪽 작업실을 구경하고 싶답니다. 존경하는 장인의 작업실이 어떤지 정말이지 궁금하다는데요.”
“그래? 왠지 내 욕을 하는 것 같았는데.”
쓸데없이 눈치가 빨라서는. 나는 금 박사의 공방에 들르기 위해 준과 금 박사와 함께 일어섰다.
“다들 사이좋게 있어.”
“누가 들으면 꼭 우리가 치고받고 싸우는 어린애들인 줄 알겠네.”
“어, 재호가 지금 송진이 형 케이크 집어 먹는데.”
“아악! 아껴 먹는 중이었는데.”
맞잖아, 애들. 나는 투덕거리는 일행을 뒤로한 채로 두 사람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공방으로 향하는 길, 금 박사가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저 여자애 한국어는 전혀 못 하는 거야? 내가 일본어는 좀 해도 중국어는 하나도 모르는데.”
그래서 다행이지. 조금이라도 아까 한 말을 알아들었다면, 싸움이 날 뻔했으니까.
“일단은요. 그나저나 일본어는 어떻게 아는, 아, 아니다. 어떻게 배웠는지 잘 알겠네요.”
오타쿠니까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배우지 않았을까.
내 말에 금 박사가 발끈했다.
“아니거든!”
“이런 걸로 쓸데없이 거짓말할 필요 없는데요.”
“아니라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말이지 왜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는지. 답답함에 가슴을 퍽퍽 친 금 박사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진짜 아닌데.”
진짜 아니면 솔직하게 말해 주면 될 걸 가지고. 저렇게 쓸데없이 정보를 숨기는 태도가 오히려 더 수상하게 느껴진다는 걸 정말이지 모르는 걸까.
그렇게 말을 나누는 사이, 우리는 금 박사의 공방 앞에 도착했다. 공방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전보다 훨씬 복잡해져 있었다. 지문 인식에 홍채 인식. 온갖 인식을 거치고 나서야 무거운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공방은…….
“우와.”
그야말로 그런 감탄이 절로 흘러나올 만큼 멋졌다.
전에 내가 빌려 썼던 그 공방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내가 왔을 때하고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일단 벽지와 바닥재가 완전히 바뀌었다.
“큼, 돈 좀 썼지.”
“그냥 쓴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이거, 죄다 몬스터 부산물입니까?”
내 질문에 금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벽과 바닥재를 모두 몬스터 부산물로 처리하다니. 그야말로 갑부가 아니고서는 못 할 짓이다. 게다가 그냥 몬스터 부산물도 아니다. 가공까지 전부 마친 다음에 이곳에 타일 형태로 붙인 걸 보니, 특수한 능력이 있어 보였다.
아마 한국에 핵이 터져도 이 공방만큼은 멀쩡하지 않을까…….
“이걸 개발하는 데에도 내가 힘 좀 썼어. 저번에 가면을 만들면서 든 생각이 있어서 주변에 공유를 했더니, 몬스터의 가죽이나 피부를 가공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쳐서 말이지…….”
신이 난 금 박사의 말을 대충 귓등으로 넘기며 나는 눈앞에 있는 바닥을 퉁퉁 두드려 보았다. 확실히 반탄력이 대단했다. 음, 금속처럼 생겨서는 충격을 그대로 흡수한다니.
“이걸로 방어구를 만들면 대박일 것 같은데요.”
“아, 커다란 단점이 하나 있어서 말이야.”
“무슨 단점이길래요?”
“무게가 철의 100배야. 아주 얇게 가공해도 몇십 kg은 되더라고. 그래서 지금 당장은 건축용으로만 사용하고 있어.”
“으음, 확실히 육체 강화계가 아니면 아예 못 입겠네요.”
그런 치명적인 단점이 있을 줄이야. 우리 애들의 방어구를 죄다 이걸로 맞춰 줄 생각은 접어야겠군.
공방의 한 가운데에 놓인 화로도 무슨 SF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금속 재질로 바뀌어 있었다.
가연성 연료를 넣고 불을 붙여 화력을 올리는 다른 공방과는 달리, 이 화로에는 어떤 가연성 연료도 보이지 않았다.
[화로야?]
준이 반짝이는 눈으로 내게 물었다.
[불은 어떻게 조절해? 설마 여기에 붙은 버튼으로?]
준이 화로의 앞에 있는 버튼에 손을 올리자마자 금 박사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함부로 만지면 안 돼.”
[손 놔.]
“기다려 봐, 천천히 알려 줄 테니까.”
히죽 미소를 지은 금 박사는 버튼을 하나하나 눌러가며 준에게 설명하듯 말을 이었다.
“이게 작동 버튼이야. 누르면 불이 들어오지.”
[응.]
“이건 화력을 위로 올리는 거야.”
[오.]
“안에 마정석이 내장되어 있어서 화력을 이렇게 조절할 수 있지. 전처럼 마정석을 직접적으로 가열하는 방법이나, 가연성 연료를 사용하는 건 온도를 내 마음대로 올리고 내리는 게 불편하지만, 이 방법이라면 엄청나게 편리하게 원하는 온도를 쫙쫙 뽑아낼 수 있단 말씀.”
[뭐라는 거야?]
처음에는 금 박사의 말을 알아듣는 듯했던 준이었지만, 금 박사의 말이 길어지자마자 눈을 확 찌푸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둘 사이의 대화를 적당히 통역해 주었다.
처음에는 준의 행동 하나하나에 기겁하며 그녀의 곁에 따라붙어 그녀를 감시했던 금 박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준이 아무렇게나 장비를 다루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다음에는 그 유난스러운 반응이 조금 괜찮아졌다.
심지어 준이 척척 어려운 장비들을 다루는 모습을 보고는 감탄한 듯 이렇게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너 좀 괜찮은 거 같다?”
[흥, 이 정도야 기본이지.]
두 사람의 대화는 그 이후로 본격적이 되었다. 준은 그동안 궁금했던 내용을 모두 물어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수많은 질문을 쏟아 냈고 금 박사는 그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을 들려 주었다.
번역기를 대충 들려 주고 너희끼리 알아서 말을 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준의 말투가 영 불손한 게 문제였다.
[영 이상하게 생겨서 실력도 형편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꽤 하네?]
이런 말을 그대로 알아듣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우리한테 돈도 대주고 물건도 주는 착한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지 마.]
[호구야? 메이는 그런 손님더러 호구라고 했어. 호구가 아니면 사기꾼. 사기를 치기엔 아무래도 멍청해 보이니 저 남자는 호구가 맞겠지.]
세상에. 평생의 반절을 갇혀 지냈다고 하기에는 엄청나게 똑똑하잖아? 금 박사가 호구라는 걸 이렇게 단번에 꿰뚫어 보더니.
━감탄의 포인트가 그쪽이냐!
“뭐라고 했어?”
“으음, 당신이 존경스럽대요.”
━이렇게 사기를 쳐도 되나?
‘사이가 나빠지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응, 내 소중한 호구, 아니, 장인 둘이서 싸워서 척을 지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고.
그렇게 나는 두 사람의 사이를 열심히 중재했다.
* * *
제 마음에 찰 만큼 금 박사에게서 많은 것을 알아낸 뒤 준은 미련이 없다는 얼굴로 그곳에서 나왔다.
[더 구경하지 않아도 돼?]
[저 공방도 상당히 멋지긴 하지만, 내 공방은 아니니까. 그래서 말인데, 내 공방은 어떻게 생겼어?]
“어, 음…….”
준의 말에 내 심장이 쫄깃해졌다. 그야, 금 박사의 공방에 비하면 우리 집에 있는 공방은…….
━그런 걸 공방이라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젠장, 그러게나 말이다.
━하필이면 눈을 높여 놔서 더 망하게 된 거 아니냐, 이거.
‘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바로 집으로 갈 걸 그랬습니다.’
아니, 나도 금 박사가 그 사이에 공방을 저렇게나 업그레이드해 뒀을 줄 알았냐고!
나는 황급히 준에게 말했다.
[그게 말이야, 우리 조직에 장인 포지션을 맡은 사람은 없어서 말이지. 일단은 구색만 갖춰 놓은 상태랄까.]
내 말에 준이 눈을 찌푸렸다.
[으흥? 그래서?]
[뭐, 앞으로 발전할 여지가 그만큼 많다는 의미에서 음, 긍정적이지?]
젠장! 금 박사가 잘 때, 몰래 저 공방에 있던 화로라도 떼어 가야 하는 건가. 나는 필사적인 변명을 내뱉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