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333화 (333/352)

제333화

#86 인연이라고 하죠 (2)

남주현은 자신에게 온 연락에 눈을 찌푸렸다.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한참이나 연락을 무시하더니, 이제야 대답이 나왔다.

그래도 이번에는 영양가 없는 메시지가 아니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남주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여전히 그대로 내뺀 남자를 향한 원망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 대답이면 붕어처럼 눈이 부어 버린 애를 달래기엔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남주현은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유채린은 쑤어하오주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쑤어하오주를 달랬다. 우느라 눈이 퉁퉁 부어 버린 쑤어하오주는 그 말에 어떤 대답도 꺼내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눈이 부을 정도로 눈물을 쏟아 낸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뭐랄까, 상당히 귀여운 얼굴이었다. 그야, 쑤어하오주는 원래도 상당히 귀여운 얼굴이었으니까. 눈이 퉁퉁 부어 버려도 여전히 귀여운 얼굴이었다.

오히려 그동안 사나운 표정에 가려졌던 귀여운 얼굴이 더 잘 드러난다고나 할까. 이렇게 보니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괜히 션이 ‘쑤어하오주와 나를 엮다니!’하고 화를 낸 게 아니었다.

물론 보기보다 나이가 많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귀엽게 튀어나온 볼따구를 보는 순간 그 생각은 사라졌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저 찹쌀떡 같은 볼을 길게 늘려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물겠지.

응, 우리 애는 물어요.

남주현도 진지하게 저 빵떡 같은 쑤어하오주와 션을 엮은 게 아니다. 다만……. 쑤어하오주의 풋풋한 첫사랑을 굳이 자신이 짓밟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상식이 박혀 있는 사람 같았으니까. 이상한 짓을 하진 않겠지.’

음, 사람을 좀 죽여서 그렇지 사람이 아주 나쁘지는 않다……. 남주현은 전에도 션에 대해 그런 판단을 내렸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이후로도 거의 바뀌지 않았다.

딱 하나, 인간관계에 있어서 아주 끔찍한 사람이라는 걸 빼놓고는.

그래도 지금 그 생각도 바뀌었다. 문자를 확인한 남주현은 천천히 쑤어하오주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엉엉 눈물을 쏟아 냈던 것이 뒤늦게 부끄러워지기라도 한 것인지, 정신을 차린 쑤어하오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꼬옥 덮었다. 그러고는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쑤오하오주의 말에 유채린이 귀를 기울였다.

“으응? 뭐라고?”

“호, 혼자 있고 싶다고!”

그렇게 외치는 쑤어하오주의 귀 끝이 벌게져 있었다.

그야, 부끄러울 만도 하지. 션이 사라지자마자 바닥을 구르면서 엉엉 울어댔으니까. 안타깝게도 타이밍이 나쁘다. 혼자 있을 시간을 주고야 싶었지만…….

“그 사람한테 답장이 왔는데?”

“뭐어!?”

발사되는 로켓처럼 바닥을 박차고 일어난 쑤어하오주가 그대로 남주현에게 달려왔다.

“뭐래! 뭐래!”

마치 밥을 달라고 외치는 아기 새처럼 부리를, 아니, 입을 쫙쫙 벌리는 쑤어하오주에게 남주현은 션이 보낸 메시지를 읽어 주었다.

“당분간은 새 멤버를 적응시키느라 바쁠 테니, 너를 당장 받아 줄 수는 없대.”

“새 멤버라면 그, 그 여자?”

쑤어하오주의 얼굴이 다시 분노로 벌게지기 시작했다.

“말했잖아, 그쪽이랑은 그런 사이가 아닐 거라고.”

“그래도 여자잖아!”

“그 사람이 꼭 여자 취향이란 법은, 아니, 아니야.”

남주현은 황급히 입을 닫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던 거람. 어쨌거나 그 남자, 션은 쑤어하오주의 합류 자체에는 긍정적인 답을 내놓았다.

“정말 진심으로 그 사람한테 가고 싶어?”

“……그래, 계속 고민하고 또 고민했어.”

쑤어하오주는 따가운 눈을 거칠게 비볐다. 왠지, 눈물이 또 한 번 흘러나와 도저히 두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제 손등에 눈을 박은 채로 쑤어하오주가 말을 이었다.

“너랑 다른 사람이랑 살면서. 살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같이 살고 싶다고? 그 사람이랑.”

“응.”

자신은 그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 같이 살고 싶은 모양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정답이라고.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랑, 같이 ‘살고’ 싶다는 게 이기적이고 이상하다는 건 알지만, 나는 아무래도 그러고 싶은 모양이라고.

쑤어하오주의 눈물에 담긴 뜻을 남주현은 한숨을 쉬었다.

쑤어하오주는 어리다. 실제 나이가 몇이든 상관이 없다. 아직 감정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미숙하기 짝이 없다. 그런 어린애가, 그 나쁜 놈이 좋다면서 집을 나가겠다는데 반길 보호자는 없을 거다.

‘나도 참 제정신은 아니야…….’

그래도 어째. 션이 자길 버리고 갔다는 걸 알자마자 저렇게 눈이 다 퉁퉁 붓도록 우는데.

“빨리 한국으로 갈 준비해.”

남주현이 쑤어하오주에게 말했다.

“그 자식이 한국 가서도 같은 생각이면 짐 싸서 연락하래!”

“어?”

“데리고 간대, 너!”

남주현의 외침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입을 쩌억 벌렸다. 그랬다. 션, 그 인간이 드디어 쑤어하오주를 책임지기로 했다.

* * *

김현기의 재판이 끝났다. 판사는 김현기에게 15년 교화형을 선고했다. 재판이 끝나자마자 김현기는 눈물을 흘렸다.

재판이 끝나고 판사는 판결문을 천천히 읊었다.

“피고인은 미성년자로서 성인들의 도움이 필요했음에도 그 누구도 피고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는 점, 그로 인해 피고인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를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 또한 피고인이 진심으로 자신이 저지른 일을 뉘우치고 있다는 점을 참작할 만하다.

허나 피고인이 각성자로서 자신의 재능을 개발하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점, 그로 인해 결국 죄 없는 민간인이었던 피해자를 자신의 재능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는 점은 위의 사실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인한 과실치사라고는 해도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여, 비각성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점은 변하지 않기에 피고인에게 교화 15년 형을 선고한다.”

그 판결에 홍난희는 미소를 지었고 김현기는 주먹을 꽉 쥐었다. 15년 형. 살인이 아니라, 과실치사로 인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은 여전히 무거웠다. 하지만 홍난희가 말했다.

이건 우리의 승리라고.

김현기는 판결이 떨어지자마자 홍난희에게 곧바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아니에요. 내 덕이 아니지, 이건. 저 방청석에 숨어 있는 사람 덕분이지.”

홍난희의 말에 김현기는 방청석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도 각범부 소속으로 피고인석에 앉을 수 없다고 말한 도채희는, 오늘 방청석 쪽에 자리를 잡았다.

도채희는 방청석에 홀로 앉아 있었다. 검은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려 했던 그녀지만, 기우였다. 그 누구도 이 재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김현기는 주변 경찰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방청석 쪽으로 다가갔다.

“경위님.”

“여기서 경위님이라는 말은 좀…….”

“그럼 누나?”

그 말에 도채희가 기겁했다.

“누, 누나라기에는 내가 현기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데?”

“얼마나 많은데요?”

“그냥 이모라고 불러요.”

“아무리 그래도 이모는 좀, 그렇지 않아요?”

“……좀 그런가?”

그렇게 왔다 갔다 가벼운 말을 나눈 두 사람은, 이윽고 서로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무 근심 없이 가벼워 보이는 김현기의 웃음과 달리, 도채희 쪽은 무척이나 쓰라린 미소였지만.

“어쨌거나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겨, 결과도 그리 좋지 않고…….”

“결과가 좋지 않다뇨. 최고로 좋은 판결을 받은 건데요.”

각성자는 같은 죄를 지어도 각성자 특별 범죄법에 의해 판결을 받아야만 했다. 일반적인 과실치사와는 달리, 그 법에 의하면 과실치사의 형량은 최소 15년부터가 시작이었다.

업무상의 과실치사라면 집행유예도 종종 받아 내는, 일반적인 형사건과는 달라도 너무나도 달랐다.

“그래도 경위님이 도와주셔서 이 정도인걸요. 아니었다면 무조건 무기징역이 나왔을걸요.”

김현기의 말대로 최소에 가까운 형량을 선고하는 판사는 거의 없었다. 각성자 범죄에는 유난히 무거운 벌을 때리는 게, 요새 재판의 트렌드라고 홍난희가 말할 정도로 최근의 판결은 각성자에게 유난히 엄했다.

“그 형사님도 여기 계셨다면 좋았을 텐데…….”

김현기의 말에 도채희의 어깨가 떨렸다. 공식적으로 ‘사망’한 정호산은 이곳에 올 수 없었다. 정호산의 사고 소식에 김현기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아는 도채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김현기는 다행히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대신 김현기는 도채희를 향해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래도 두 분 덕분에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어서 좋았어요. 누군가는 나라는 사람을 봐 주는구나, 힘이 되어 주는구나. 그게 정말이지 저를 버티게 하고, 견디게 했어요.”

그동안의 설움이 몰려온 듯 김현기는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그런 김현기를 바라보며 도채희는 그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현기 군에게 말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도채희는 김현기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현기 군을 도운 건 현기 군이 아무런 죄도 없는 깨끗한 사람이어서가 아니에요. 현기 군은 분명 죄를 지었어요.”

물론 김현기의 범죄에는 판사가 말했던 것처럼 수많은 ‘이유’들이 있었다. 그래도 김현기가 저지른 짓이 범죄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누군가를 도둑질하겠다는 생각을 도채희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 과정에 누군가를 죽였다면 더더욱.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채희가 김현기를 도운 것은…….

“그래도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면, 현기 군은 죄를 짓지 않았겠죠. 아무도 죽지 않아도 됐을 거예요. 현기 군이 그런 짓을 저지른 건 결국, 현기 군에게 선택지가 마땅찮았기 때문이니까요.”

이 모든 것이 김현기만의 잘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택지를 만드는 건 우리의 몫이잖아요. 어른들의 몫이요. 우리가 이런 세상을 만들어 놓고, 이 세상에서 왜 잘 지내지 못하냐며 말하는 건 잘못된 일이죠.”

도채희는 김현기를 향해 말했다.

“그러니까 약속할게요. 다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괜찮은 세상을 만들겠다고요.”

그동안 김현기를 도우면서 수없이 속으로 중얼거렸던 질문들, 그에 대한 대답.

이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 세상은 잘못되었다. 그리고 그 잘못에 대한 대가를 한 사람만이 치르는 것은 너무한 일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바꿔야겠다.

어떻게든.

* * *

법원 바깥으로 나온 홍난희가 가볍게 말을 던졌다.

“저 안에서 거창한 말을 하던데?”

“다, 다 들으셨어요?”

“바로 내 뒷자리였으니까. 고막이 달린 사람으로서 듣지 않을 수가 없었지.”

도채희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인해 벌게졌다. 확실히 너무나도 ‘거창한’ 말이었으니까 말이다.

세상을 바꾸겠다니.

“그, 그…….”

부끄러움에 말을 더듬는 도채희에게 홍난희가 말했다.

“그래도 확실히 나쁘지 않은 말이었어. 나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거든. 내가 성질머리가 더러운 편이라는 건 전에 말해서 알지? 확실히 이번 건만 해도 그래.”

홍난희는 자기 자신을 ‘성질머리가 더러워 각성자를 대변하는 변호인이 되었다’는 말로 소개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 성질머리가 더러워진 이유가 바로 이거다.

“법이라는 게 참 그래요, 이미 정해 놓은 틀이 있으면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그 틀을 벗어날 수가 없단 말이야. 아무리 자료를 많이 준비해도, 입을 털어도 난 변호사에 불과할 뿐이니까.”

김현기는 각성자라는 이유만으로 과실치사로 15년 형을 받았다.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써 본 적도 없는 이에게 능력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더 큰 처벌을 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

지금 이 세상에서는 ‘옳은 일’이다. 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야. 아무리 기를 써도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벗어날 수가 없단 말이지.”

홍난희가 도채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다르잖아요, 도채희 경위님.”

“전…….”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든 사람을 찾아내서 죄를 물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당신은.”

피식 웃은 홍난희가 말했다.

“한번 해 봐요, 세상을 바꾸는 거. 내가 응원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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