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2화
#86 인연이라고 하죠 (1)
여기에서 제대로 말도 없이 도망치면 X 된다.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어떻게든 한서현을 말려 보려고 했지만, ‘쑤어하오주에게서 도망친다’라는 명령어가 입력된 한서현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평소에는 그래도 주변 사람들을 챙기며 비행했던 한서현이었지만, 쑤어하오주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뺨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아주 사나웠다.
나는 재빨리 마력을 끌어올려 차송진과 준 주변에 보호막을 씌워 주었다. 새에 찰싹 달라붙어 숨만 겨우 쉬던 두 사람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편안해졌다.
하지만 숨쉬기가 편해졌다고 끝이 아니었다.
‘탑건이라도 되고 싶은 거냐고!’
뒤에 따라오는 적기도 없는데, 도대체 코브라 기동은 왜 하는 것인지.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한서현에게 그렇게 물었을 거다.
도시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곳으로 와서야 한서현은 광란의 비행을 멈추고 새를 착륙시켰다.
거친 비행에 차송진과 준은 겉 건조를 끝낸 뒤 속 건조를 기다리는 건어물 같은 상태가 되었다.
무슨 말이냐, 이미 겉가죽은 다 상했다는 뜻이다.
[다, 다시는 저걸 타고 싶지 않아.]
한서현의 새를 타는 게 퍽 익숙해진 나도 속이 안 좋아질 정도였으니, 이번이 첫 비행이었던 준은 오죽하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새에서 내려선 준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하지만 상태가 진짜 심각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우우에엑.”
차송진이 거하게 속을 쏟아 내는 모습을 보며 나는 혀를 찼다. 첫 비행인 준도 저렇게 속을 게워 내진 않았는데, 도대체 얼마나 몸이 약한 건지.
‘운동이 답이다, 운동.’
요즘 들어 툭하면 이런저런 변명을 대며 운동을 빠지려고 하는 차송진이었지만, 더는 봐줄 수가 없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다. 새에서 내리자마자 다리가 풀려 하마터면 그대로 넘어질 뻔했으니까.
우리 중에 상태가 괜찮은 건 운전대(?)를 직접 잡은 한서현과 그림자 속에 숨기라는 사기적인 스킬을 가지고 있는 김재호뿐이었다.
“으어어.”
갈지자로 걷는 나를 보며 한서현이 말했다.
“죄송해요, 빨리 그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엔 안 들어서…….”
뒤에서 들려온 한서현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뭐, 도망치고 싶기야 했지. 그래도 도망칠 생각은 없었어.”
그래도 이왕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거, 제대로 끝맺고 오는 편이 나았을 텐데. 이래서야 결국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그냥 쑤어하오주를 조금 더 열받게 했다는 것 정도?
음, 최악이군.
내 표정을 읽은 한서현이 내게 사과를 건넸다.
“죄송해요. 그쪽이 갑자기 보스를 공격하는 걸 보니, 어, 순간적으로 도망만이 답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뭐, 이미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지. 이번 기회에 확실히 이 일을 처리할 생각이긴 했지만…….”
무어라 말을 잇기도 전, 내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띠롱, 띠롱, 띠롱. 쉴 새 없이 울리는 알람에 슬쩍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보니, 남주현이 보낸 메시지로 알림창이 꽉 차 있었다.
N: 아니, 이렇게 도망치는 법이 어디에 있어요! 댁 때문에 지금 우리 애 운다고요!
처음에는 제법 온화한 말투였던 메시지는 점차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N: 진짜 너무하네! 이렇게 도망치면 다야? 어른이 책임을 져야지! 어? 당신 만나겠다고 중국까지 온 애를 이렇게 버리고 가도 되냐고오!
그리고 마지막에 온 메시지는…….
N: 조강지처 버리고 가면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말 못 들었어? 인생 그렇게 살지 마세요.
그 메시지를 본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아니, 도대체 누가 ‘조강지처(糟糠之妻)’야? 쌀겨를 같이 나눠 먹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을 같이 보낸 적도, 내 처였던 적도 없는데! 심지어 쑤어하오주는 겉보기엔 10대 중반의 소녀란 말이다! 누굴 소아성애자로 아는 건지!
S: 아니, 조강지처라니? 하늘에 맹세컨대 저와 쑤어하오주는 그런 사이였던 적이 없습니다만?
그리고 곧 답장이 도착했다.
N: 하, 역시 이 메시지는 무시 못 할 줄 알았어!
젠장! 그제야 나는 이게 남주현이 나를 향해 던진 미끼였다는 걸 깨달았다.
남주현은 참았던 화를 풀 듯이 내게 우다다 메시지를 쏟아냈다.
타자가 어찌나 빠른지, 내가 무어라 답을 하기도 전에 메시지는 서른 개가 넘게 쌓였다. 그야말로 질릴 만한 속도였다.
으음, 나는 휴대폰을 무음 모드로 바꾼 뒤 슬쩍 주머니에 넣었다.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이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며?
“아이고! 송진이 형, 몸은 좀 괜찮아?”
나는 바닥을 기고 있는 차송진에게 얼른 다가가 물병을 꺼내 건넸다.
차송진은 내가 건넨 물병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었다. 물로 입을 헹군 차송진이 창백해진 얼굴로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휴대폰을 확인하는 것 같았는데…….”
윽,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려고 했는데. 다시 남주현이 보낸 메시지로 화제는 돌아오고야 말았다.
“누군데?”
“누구겠어.”
“남주현 씨?”
“그래. 이런 식으로 왔으니, 화를 낼 만도 하지.”
“그쪽이 우리를 공격했잖아.”
“그 오해가 있었어.”
“오해?”
그 오해가 뭔지는 죽어도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슬쩍 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만으로도 차송진은 내가 하려는 말을 알아차렸다.
“어, 너와 준 사이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쪽이 화를 낼 이유는……. 서, 설마!”
이 쓸데없이 눈치가 빠른 인간 같으니라고! 차송진은 이제야 상황이 이해가 간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헉! 쑤어하오주가 너를!”
차송진의 목소리는 모두의 관심을 끌 정도로 쓸데없이 컸다.
“쑤어하오주가 보스를?”
한서현의 질문에 나는 차송진을 바라보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제발, 한서현만큼은 이 사실을 모르길 바랐다.
“그, 그쪽이 무슨 생각일지는 뻔하잖아.”
“보스를 죽도록 증오하고 있다는 거요?”
“어, 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를 보는 듯한 차송진의 눈빛에 한서현이 발끈했다.
“뭐요! 맞잖아요! 아니면 뭔데요!”
“그게 말이야, 사실 이번에 그쪽이 중국에 들어온 건…….”
나는 일행들에게 조금 전 내가 쑤어하오주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간단하게 요약해서 알려 주었다. 내 말을 모두 들은 한서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복수 때문에 온 게 아니라면, 왜 그렇게 화를 낸 건데요?”
젠장, 이 대화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결국 다시 돌아왔구만.
결국 나는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야 말았다.
“예에? 쑤어하오주가 보스를요? 아니,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사람인데 보스를? 아니, 어째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한서현의 시선에 내가 소리를 빼액 질렀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하긴 이 세상에는 많은 취향이 있으니까요. 그건 그렇다고 치고 보스와 준 사이를 오해하다니. 보스를 좋아한다면서 보스 취향도 모르다니, 실망인데요.”
“……어떻게 알겠냐 그쪽이 내 취향을. 아니, 그러는 너는 어떻게 아는 건데 내 취향을?”
“그야, 보스는 아저씨 좋아하잖아요.”
“아저씨?”
아줌마도 아니고 아저씨? 내 의아한 표정에 한서현이 말했다.
“여태까지 보스가 팬이라고 말한 사람은 그 사람뿐이거든요. 미국에서 만났던 그 아저씨.”
아, 존 스미스.
“……그런 의미로 좋아한다고 말한 거 아니야.”
어이가 없었다. 존 스미스를 향한 내 마음은 그런 더러운 마음이 아니었단 말이다. 스승님을 향한 내 존경심을 뭐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어쨌거나 설록진을 처리하기 전까진 그럴 생각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다들 괜히 이상한 소리 하지 마.”
“하긴, 연애하기에 좋은 상황이 아니긴 하지.”
“그래.”
아무리 가성비 넘치는 복수를 하자곤 했지만, 연애는 또 다른 문제라고.
“쑤어하오주를 데리고 올 생각이야?”
차송진의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데리고 와도 문제지 않을까? 그쪽이 정말로 나를 ‘좋아한다’면 말이지.”
에드워드 때하고는 또 다르다. 쑤어하오주는 내게 인간적인 호감을 품고 있다. 그리고 그 호감은 내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감정이었다.
“글쎄, 쑤어하오주는 아직 어리잖아. 몸이 아니라, 정신이. 그러니까 문자 그대로 너와 같이 살고 싶다는 뜻으로 한 말일지도 몰라. 가족애나, 우정, 동료애……. 그런 감정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거고.”
“……준을 질투했는데?”
그 말에 차송진이 슬쩍 한서현을 바라보았다.
“뭐요.”
음, 그렇지. 성애적인 관계가 아니어도 질투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긴 하지.
그러고 보면 쑤어하오주와 한서현은 닮은 데가 있긴 했다. 입 밖으로는 절대 내뱉을 수 없는 말이지만, 둘 다 정신적으로 미성숙하다는 것도 그렇고, 성질머리도 그렇고…….
“그동안 너무 거리를 뒀기에 쑤어하오주의 감정이 그런 식으로 발전한 것일지도 몰라. 가까이에서 널 지켜보고 나면, 머릿속에 있는 환상이 모두 깨져 버릴지도 모르지.”
확실히 쑤어하오주의 앞에서 내가 보인 모습들은 어느 정도 연기가 섞여 있긴 했다. 당장 그녀를 두려워한다는 걸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쓰기도 했으니까.
“그나저나 환상이 깨진다니, 너무 말이 그렇지 않아?”
가까이에서 보면 나라는 사람이 영 별로라는 뜻 같잖아?
내 투덜거림에 대답한 건 차송진이 아닌, 한서현이었다.
“음, 확실히 일리가 있는데요?”
“뭐?”
“그야 보스가 집에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면 가끔 나도 정이 털릴 때가 있으니까요.”
“맞아, 보스, 집안일 개 못 해.”
여태까지 조용하던 김재호까지 끼어들었다.
“양말도 맨날 뒤집어서 벗어 놓고.”
“아, 그래도 요새는 제법 잘 벗어 놨잖아…….”
“아직도 다섯 번 중에 한 번은 뒤집어서 벗어 놓잖아요!”
한마디 더 했다가 괜히 욕만 더 얻어먹었다.
“어쨌거나 네 꼴을 보고 내가 좋아하던 사람은 이렇다니! 라고 하면서 현실을 깨닫지 않을까?”
“가까이에서 보면 그렇게나 별로냐고!”
“그걸 바라던 거 아니야? 그쪽이 반하면 네가 힘들다면서?”
“그야 그렇긴 한데…….”
“하하, 걱정하지 마. 곁에 두고 평상시대로 행동하면 그런 생각을 싹 접을 테니까.”
차송진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보기만 해도 믿음직스러워서 더 열이 받았다.
하지만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나에게 그런 식의 감정을 가진 것만 아니라면, 쑤어하오주는 꽤 괜찮은 팀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에드워드가 떠난 지금, 전위를 맡아 줄 사람이 없기도 했고……. 탱커인 에드워드와는 달리 쑤어하오주는 퓨어딜러지만, 그래도 내 앞에 세울 누군가가 있다는 건 좋지.
일단 차송진의 말대로 한 번 데리고 오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긴 했다.
아닐 수도, 감히 내가 실수를 하는 것일 수도. 쑤어하오주가 내 멱을 따는 끝을 맞이할 수도……. 음, 아무래도 조금은 더 고민해 보고 결정을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내가 막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차송진이 내게 말했다.
“일단 그쪽에 연락부터 해. 또 오해가 깊어질라.”
그 말에 내 어깨가 움찔 떨렸다.
“지금?”
“그럼 언제 하게? 한국에 돌아가서나 하게? 한국까지 가는 데 며칠은 걸리는데? 또 이런 식으로 오해를 쌓았다가 펑하고 터트리게? 와아, 너무 기대된다.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있을지 말이야.”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하면 될 거 아니야.”
나는 애써 무시하고 있던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