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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330화 (330/352)

제330화

#85 카르마 (5)

“아, 그러네! 쑤어하오주라면 알겠네요!”

남주현은 기쁨에 그렇게 말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아는 게 끝이 아니잖아. 어떻게 알려 줄 생각인데?”

이희원의 통역으로 그 말을 전달받은 쑤어하오주가 말했다.

“그려 줄게.”

그 말에 남주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그린다고?”

“몽, 몽타주를 보고 사람을 찾은 적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마는…….”

남주현과 유채린의 떨떠름한 반응에도 쑤어하오주의 의지는 강했다. 하긴 이대로 추적이 막혀 버리는 것보다는 무엇이라도 해 보는 게 낫겠지. 남주현은 고개를 끄덕이곤 주변 문방구에서 필기구를 구해다 쑤어하오주의 앞에 내려다 놓았다.

쑤어하오주는 진지한 얼굴로 펜을 들었다. 그리고 종이에 거침없이 펜을 가져다 댔다.

일단 가로로 쫙 긴 직선이 생겼다. 그 아래에 점 두 개. 쑤어하오주는 다시 가는 선을 그려 두 눈을 마무리 지었다.

누가 봐도 삼백안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가로로 쫙 찢어진 두 눈이 생겼다. 그 뒤로도 하오주는 거침없이 펜을 놀렸다. 두 눈 위로 얇은 눈썹이 순식간에 생겼다. 그리고 가르마가 난 앞머리와, 갸름한 턱도 그려졌다.

코끝은 오뚝했고 입술은 야비하게 한쪽으로 말려 올라갔다.

쑤어하오주가 그린 션의 몽타주가 완성되는 데에는 채 3분도 걸리지 않았다.

“됐어.”

대작이 완성되었다.

“어, 그래.”

“수고했다…….”

쑤어하오주의 그림 실력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똑같이 생겼어!”

쑤어하오주는 뿌듯한 듯 그렇게 외쳤지만, 그 그림을 본 나머지 세 사람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유채린은 간절한 눈빛을 남주현에게로 보냈다.

‘이, 이걸로는 무리라고요!’

“그, 그래. 잘 그리는데! 엄청 노력했네! 엄청 열심히 그렸네! 꼭 찾을 수 있겠네!”

‘배신자!’

남주현의 말을 들은 유채린은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쑤어하오주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제 속에 떠올랐던 생각은 모조리 사라지고 말았다.

‘으으.’

평상시에 그렇게 쭈그러져 있던 우리 애가 그림을 그리고 저렇게 뿌듯한 표정을 짓는데! 어떻게 이걸로는 무리라는 말이 나오겠냐고요.

쑤어하오주의 그림을 받은 유채린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아무리 그녀라고 하더라도 이 그림을 보고서 ‘션’을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어떻게든 이 그림으로 션을 찾아 주고야 싶었지만, 무리는 무리였다.

그렇게 유채린이 끙끙거리고 있을 때, 이희원이 슬쩍 입을 열었다.

“그냥 쑤어하오주의 기억을 읽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사이코메트리라면,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의 기억을 읽는 것도 가능할 텐데요.”

이희원의 말에 유채린의 어깨가 떨렸다.

“그, 그건 그렇지만…….”

“왜 그렇습니까?”

“기억을 읽는 건, 어, 무척이나 위험하고 또 위험한 일이라서요. 저느. 저는 도저히…….”

유채린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수십 번이나 사물의 기억을 읽는 동안에도 멀쩡했던 몸이, 이희원의 말 한 마디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런, 죄,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에요. 저야말로 죄송해요. 그, 기억을 읽는다는 생각만 해도 어, 트라우마 같은 게 올라와서…….”

“하아, 그럼 어떡하지?”

남주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흔적이 끊긴 이들을 추적하려면 제대로 된 인상착의가 필요하다. 사실, 인상착의가 정확하대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는 상황이긴 하다. 그쪽이 인상착의를 바꾸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긴 하니까.

하지만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턱대고 ‘수상한 사람’을 찾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세 사람의 모습을 빤히 보던 쑤어하오주가 제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쫙 찢어진 두 눈에, 얄미운 입술. 갸름한 턱까지. 자신이 그린 그림 속에 있는 사람은 누가 봐도 ‘션’이었지만, 사실 쑤어하오주도 알고 있었다. 이런 그림만으로는 션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그사이 세 사람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일단 주변을 다 뒤져 봅시다. 뭔가 수상한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수상한 점이 있었다면 진작 다들 신고를 했을 것 같긴 하지만.”

“적어도 방향은 알았으니, 그쪽으로 뒤지다 보면 뭔가 또 나오지 않을까요?”

열심히 의견을 내는 세 사람 사이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자.”

“응?”

“돌아가자, 그냥.”

쑤어하오주의 말에 남주현은 깜짝 놀라 외쳤다. 여태까지 그토록 간절하게 션을 만나고 싶다고 했던 주제에 뭐라고? 돌아가겠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힘들어, 션 찾기. 나중에 내가, 내가 혼자 찾으러 오면 돼.”

“하지만…….”

갑작스러운 쑤어하오주의 말에 세 사람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때, 유채린은 깨달았다. 쑤어하오주가 왜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찾을 수 있어요.”

“아냐, 못 찾아.”

쑤어하오주의 말에 유채린이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정보가 있다면요?”

“응?”

“그 사람들, 어떻게 생겼는지 제가 정확히 알 수 있다면요.”

“하지만…….”

“젠장! 해 본다고요!”

유채린의 갑작스러운 욕설에 이희원과 남주현이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왔잖아요. 어떻게 다시 돌아가요. 이렇게는 싫어요.”

“하지만 기억을 읽을 수는 없다고…….”

“할 수 있어요. 하기 싫었던 거지. 그러니까 손 줘 봐요.”

유채린의 말에 쑤어하오주가 재빨리 두 손을 뒤로 감췄다.

“싫어.”

“션을 찾고 싶잖아요.”

“너 싫다고 했잖아…….”

그 말에 유채린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예, 싫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싫었어요. 왜냐면 억지로 기억을 보는 게 정말로 싫었거든요. 그래서 못하는 척했어요.”

어렸을 적 재능을 각성하고서부터 유채린의 삶은 엉망이 되었다.

“난 톱니바퀴였어요. 누군가 필요하다면 들고 가서 멋대로 끼워 맞춰서 돌리다가, 더는 필요가 없어졌다 싶으면 빼 버리는 그런 톱니바퀴요. 나는 내가 무얼 위해서 돌아야 하는지도, 내가 왜 돌아야 하는지도 몰랐어요.”

남의 기억을 보면서, 유채린은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너무 많이 봐 버렸다. 기억을 읽는다는 건, 그 사람의 삶을 멋대로 헤집는다는 것과 같았다. 그런 짓을 하고 나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거부했다.

한 번 그렇게 정신적으로 거부를 하고 나니, 몸 또한 자신의 능력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윗선에서는 유채린을 ‘오래 써먹기 위해서’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그 뒤로 유채린은 다른 방법으로 소모되기 시작했지만, 이게 낫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누군가의 머릿속을 멋대로 뒤집는 것보다는 그게 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말했잖아요. 돕고 싶다고요. 처음으로 내가 누군가를 돕고 싶어졌다고요.”

“어…….”

쑤어하오주의 눈을 바라보며 유채린이 말했다.

“내가 기억을 뒤집는 동안에는 아주 불쾌할 거예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넌?”

“난 괜찮아요.”

자신의 기억을 누군가 멋대로 본다는 것, 불쾌할 만도 했지만 쑤어하오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냐.

만나고 싶었으니까, 션을.

“좋아요. 손 줘요.”

그렇게 두 사람의 손이 닿았다. 유채린의 마력을 느끼며 쑤어하오주는 눈을 감았다.

* * *

“누군가 우리를 향해 오고 있다니?”

“이런.”

준에게 스태프를 맡겨 놓은 터라 모래를 다루진 못했지만, 한서현은 그동안 언데드들로 사방에 감시망을 만들어 놓았다. 그 감시망은 여태까지 완벽하게 작동했다.

아니, 작동한 줄로 알았다.

“상대방이 인식을 흐리는 무언가를 쓴 모양이에요. 보고 있어도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요.”

음, 언데드로 만든 감시망은 그런 방법에 약했군. 하나 배웠다.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중국 정부인가?”

“아니요, 그보다 더 나쁠지도.”

“그보다 더 나쁜 게 있어?”

내 말에 한서현이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쑤어하오주예요.”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쑤어하오주가 여기에? 어떻게? 무어라 말을 내뱉기 전, 한서현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옆에 가만히 있던 준이 나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아, 별거 아니야.]

내가 예전에 죽이고 튄 남자의 딸이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오고 있다는 것 정도?

……엄청 별거군.

한서현은 그 사이에 우리를 태울 만큼 거대한 새를 만들었다.

“어서 도망가요.”

한서현의 말에 나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레이가 입을 열었다.

━얘기도 나누지 않고 도망갈 셈이냐?

한서현의 목소리와 정확히 겹쳐 들리는 그 말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도망가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다음에 또 쫓아오면?

‘도망가야죠.’

━그렇게 언제까지?

‘말했잖아요. 쑤어하오주에게 당장은 죽어 줄 수 없다고요.’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다. 그전까지는 쑤어하오주를 만날 수 없다. 왜냐, 죽어 줄 수 없으니까.

━할 일이 다 끝나면? 순순히 쑤어하오주에게 목을 내밀고 죽어 줄 셈이냐?

‘아직 일이 산더미처럼 많이 남았는데, 벌써부터 할 고민은 아닌 것 같은데요.’

“보스! 뭐 해요?”

레이와 말을 나누는 동안, 모두를 새에 태운 한서현이 나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그 새에 당장 올라타려고 했다. 레이가 나를 향해 말했다.

━비겁한 놈.

물론 나는 비겁한 사람이다. 여태까지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얼마나 많이 외면했는데.

━얘기는 한 번 들어 줄 수 있는 거 아니냐. 너를 만나겠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겠죠?’

━진심으로 하는 소리다. 넌 그 여자애가 너를 죽이는 게 두려워서 도망치는 중이라고 말했지만, 솔직히 말해라. 죽어 주려고 해도, 죽어 줄 수가 없을 텐데?

쑤어하오주는 예전처럼 무식하게 강하지 않을 거다. 우리가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일 가능성이 컸다.

한서현과 김재호, 차송진까지 데리고 있는 상황에서는 레이의 말대로 죽어 주려고 해도 죽어 줄 수가 없는 수준일 것이다.

━기껏해야 제 아비를 잃은 여자애의 원망이 두려워 도망치는 거라면, 넌 정말이지 글러 먹은 놈이다.

그 말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보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볼까.”

“그게 무슨 미친 소리예요?”

한서현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여기까지 왔다잖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 음…….”

“그야, 그렇지만. 아니 정말로? 그 괴물이랑 말을 나누겠다고요?”

“실례야, 서현아. 사람한테 괴물이라니. 게다가 지금은 그렇게 강하지 않을 거라니까.”

“보스!”

단숨에 새에서 내린 한서현이 나를 붙잡았다.

“좋은 말로 할 때, 저기에 타요.”

“음, 알겠어. 일단은 타는데, 그래도 얘기만 좀 들어 보면 안 되냐?”

“뭐 하러 말을 섞어요!”

“혹시 모르잖아. 나를 용서하려고 여기까지 오는 걸지도.”

“용서하겠냐고요!”

한서현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내가 왜 이러나, 미쳤나 싶겠지. 응, 아무래도 미친 모양이다. 그래도 말이지.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원망 정도는 들어 줘야 할 것 같아서.”

“하아.”

그래, 그래도 원망 정도는 들어 줘야 하지 않는가. 겨우 원망이 무서워서 도망치는 거냐는 레이의 말이 아주 심장에 콱 박혔다. 그래, 여기에서 도망치는 건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원망조차 듣기 싫다고 내빼는 거지.

“원망을 들어 줘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러고 또 도망치면! 그 여자애가 그야말로 꼭지가 돌아 버릴 텐데.”

“그래도 뭐냐, 여기까지 와 줬는데…….”

더 실랑이를 할 필요도 없었다.

쑤어하오주 일행이 도착했으니.

“션!”

내 고막을 울리는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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