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5화
#84 닿지 않은 마음 (5)
준의 합류를 알게 된 한서현은 마뜩잖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굳이 데리고 갈 필요까지는 없지 않아요?”
하긴, 이 까칠이가 바로 준을 받아들여도 이상하다. 이제는 이런 태클이 반갑게 여겨지기도 했다.
“같은 집에 살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그래도 주변에 있으면 좋잖아. 금박사처럼.”
필요할 때마다 찾아서 뜯어 먹, 아니, 도움을 받으려면 아무래도 근처에 있는 게 좋다. 단순히 우리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준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우리의 행동반경 안에 준이 있는 게 좋다.
“여태까지는 그런 구덩이 안에서 생활했기에 아무도 준의 존재를 몰랐지만, 앞으로는 다를 거잖아. 다른 사람들이 준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아무래도 위험해지지.”
실력 있는 장인은 언제나 수요가 높다. 아무리 대단한 재료라고 해도 형편없는 장인의 손을 거치면, 그 가치가 떨어지기 마련이니까.
━음,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여기 그 예가 있긴 하지.
타이밍 좋게 나를 찌르는 레이의 말이 꽤나 아팠지만, 부정할 생각은 없다. 확실히 나는 형편 없는 장인이니까.
시스템 또한 나를 놀리는 데에 진심이지 않았는가.
애초에 내 손재주가 좋았다면, 장인을 구하러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여러모로 우리 근처에 있는 게 좋다는 뜻이야. 같은 기지 안에서 지내는 게 불편하다면, 금박사 쪽에 보내도 되고.”
사람이라면 학을 떼는 금박사지만, 그래도 같은 장인계니까 통하는 게 있지 않을까.
━또 얼렁뚱땅 사람을 유기할 계획이나 짜고 있는 거냐.
‘아무래도 우리 기지에서 바로 생활하기에는, 음, 뭔가 문제가 생길 것도 같고요.’
우리 기지는 여태까지 금녀의 공간이었다. 딱히, 여자 남자를 가리자는 건 아니지만 한창때의 남자애들 사이에 여자애를 혼자 두는 건 좀.
물론 우리 기지에 오고 싶다면야 환영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공방도 지어 놨고 말이죠.’
━그 움집 같은 곳을 공방이라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다만.
하긴, 내가 부숴 버린 준의 작업실에 비해 우리 집에 있는 공방은, 레이의 말대로 움집 수준이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식의 팩트 폭력은 나빠!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다고, 나는.
내 말을 가만히 듣던 한서현이 내 말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러니까 옆에 둬야 부려 먹기 편하다는 거네요.”
“틀린 소리는 아니긴 하지만, 그걸 그렇게 줄이는 거냐? 그 보호하기 좋다든가, 하는 말은 쏙 빠졌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쪽이 중점은 아닌 것 같아서요. 양심에 찔리니까 괜히 덧붙인 느낌이랄까.”
젠장, 내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분할 정도다. 아니라는 말도 안 나오네.
━쯧쯧, 누가 보스인지.
레이의 말에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언젠가 보여 줄 것이다, 보스의 위엄이 어떤지를!
━그런 걸 찾기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대도.
아니다! 절대 늦지 않았다!
나는 기필코 언젠가 보스의 위엄을 되찾으리라 결심했다. 언제까지 나도 이렇게 모두의 눈치를 보면서, 등짝을 맞는 하찮은 위치에 있을 순 없다.
분명 처음에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아무래도 내가 집안일을 하기 싫다고 뻗댔을 때부터였나? 확실히 양말을 뒤집어 벗어 놓거나, 먹은 그릇을 바로 설거지통에 넣지 않아서 혼나는 건 보스답지 않긴 했다.
음, 다음부터는 먹은 그릇을 곧바로 설거지통에 넣고 양말을 바로 벗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런 노력을 한다는 것 자체가 보스의 위엄이라는 단어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
‘원래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장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노리기보다는 바로 실현 가능한 조그만 목표를 성취해 내는 쪽이 훨씬 지속 가능성이 크기도 하고요.’
━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필요가 있나?
‘안에 든 게 부실하면 포장지라도 화려하게 둘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라서 말이지요.’
어쨌거나 보스의 위엄 찾기 프로젝트는 오늘부터 시작이다. 음, 적어도 한서현의 잔소리를 벗어나지 않으면, 보스의 위엄은 무슨, 위염 발생자라는 멸칭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다.
그래도 한서현은 내 부실한 설명을 납득했고 이제 남은 것은 메이와 준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준이 우리 쪽에 합류하기로 한 뒤, 준은 담담히 제 작업실로 돌아갔다. 미리 짐을 싸야 한다나.
나는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메이에게 향했다.
[당신은 앞으로 어쩔 작정이야?]
우리를 따라 한국으로 가겠다고 결심한 준과 달리 메이는 중국에 남기로 했다.
[지금까지처럼 가게를 운영하는 건 불가능할 텐데?]
내 질문에 메이가 눈을 찌푸렸다.
[그 가게에는 딱히 미련이 없어.]
[미련이 없다고?]
그런 것치고는 가게를 엄청나게 아끼는 기색이었는데. 내 시선에 메이가 발로 바닥을 툭툭 차며 말했다.
[거긴 그냥, 준이 만든 걸 그냥 놀리기도 아깝고 해서 내다 팔기 시작하던 게 어쩌다 보니 커졌을 뿐이거든.]
시선을 먼 곳으로 던진 메이가 말을 이었다.
[난 그냥 사람들의 관심이 좋았던 것뿐이야. 부모님이 죽은 다음, 그 누구도 나에게 그런 식으로 관심을 주지 않았거든.]
메이는 천천히 내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부모님의 죽음과 그 뒤로 이어진 두 사람의 삶을. 메이는 부모님의 죽음 이후 늘 자신이 ‘덤’인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자신의 삶이 바뀐 것도, 그 일 이후의 자신의 삶이 굴러가는 방식도. 모두 ‘준’에 의해서였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준의 능력을 내 것인 것처럼 말하고,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으면 안 되는 일이었어. 나도 알아, 알지만, 그런 것밖에는 생각이 안 났어.]
[경찰을 찾아갈 생각은 안 한 거야?]
[경찰을 뭘 믿고? 우리 엄마 아빠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준의 이야기를 했다가 살해당했어. 친한 사람도, 친구도, 이웃도 믿을 수 없단 뜻이야.]
메이는 나에게 준을 바깥에 내놓으면 언제든 그런 일이 다시 생길 것 같았다고 말했다. 내가 말했듯, 장인을 원하는 곳은 많으니까 말이다.
[그랬다면 가게를 운영하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그래서 진짜 좋은 건 숨겨 놨잖아. 주변 상점과 비교해도 그리 뛰어나지 않은 물건들만 내다 팔았어. 어린 여자애치고는 대단하지만, 주변과 비교해서 그리 뛰어나지도 않은 물건을. 다행히 장사가 아주 잘 됐어. 내 능력 때문이겠지.]
메이는 천천히 내게 자신의 능력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설명은 장황했지만, 한마디로 하자면 ‘모두에게 호감을 사는 능력’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딱히 능력을 쓰려고 쓰는 게 아니야. 그냥, 자연스럽게 퍼지는 것 같아.]
확실히 가게에서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동공이 빛나지 않았지.
[조금 더 집중하면, 한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을 수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자주는 안 써 봤어.]
나는 메이의 동공이 분홍빛으로 빛나던 장면을 떠올리곤 물었다.
[나한테 쓰려던 게 그거?]
[윽! 어, 어차피 안 먹혔잖아? 나도 꺼림칙해서 자주 쓰지는 않았다고, 그거!]
내게 그렇게 소리치는 메이의 얼굴에는 거짓이 보이지 않았다. 진심이다, 정말로 그 능력을 자주 쓰지 않은 거다. 왜냐? 이유는, 자신이 말한 대로 ‘꺼림칙’해서.
저 능력으로 복수를 한 거겠지, 자신의 부모님을 죽이고 자신들을 납치한 그 나쁜 인간에게.
메이의 말이 이어졌다.
[준이 떠나고 나면, 나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모두가 탐을 낼 만한 재능을 가진 준과 달리 내겐 그런 재능이 없으니까.]
[왜 재능이 없어? 조금 전까지 말했잖아. 모두에게 호감을 사는 능력이 네겐 있다고.]
[……‘모두’는 아니거든.]
물론, 불굴의 신념이라는 사기적인 패시브를 지닌 내게는 메이의 재능이 통하지 않았다.
[내가 좀 눈이 높아서.]
내 말에 메이가 분하다는 듯 주먹을 꽉 쥐었다.
[으! 얄미워! 솔직하게 말해, 대단한 아티팩트를 숨겨 둔 거지?]
[편할 대로 생각해.]
내가 사실을 말해 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깨달은 메이는 금세 내게서 진실을 캐내는 일을 포기했다. 나는 메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 능력이 통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통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거야.]
[정말로 내 재능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재능이라니, 뭘 해도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이잖아. 게다가 네 능력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거잖아. ‘나 능력 쓰고 있어요’하고 광고하지 않아도 된다니, 이것보다 뛰어난 재능이 어디에 있어?]
능력을 쓸 때마다 동공이 빛난다는 건 크나큰 단점이다. 특히 별다른 전투 능력이 없는 정신계 능력자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동공이 빛나는 사람을 보면 누구든 경계를 하기 마련이니까.
운이 좋게도 거의 동공이 빛나지 않는 나나, 능력을 발현하는 순간 사람들의 정신을 즉시 지배하는 설록진의 경우가 특이한 거다. 보통은 동공이 빛난다는 걸 감추기 위해서 선글라스를 쓰든, 가면을 쓰든 별짓을 다 하니까.
한때, 선글라스를 쓴 사람을 주의하라는 말이 괜히 은행 한복판에 붙어 있던 게 아니다.
과거에는 전화로 하는 사기, 그러니까 보이스 피싱이 유행이었다면 각성자 사태 이후에는 선글라스 사기단이 꽤나 유행해서 말이지.
선글라스를 쓴 사람과 말한 적이 있습니까? 라는 대답에 YES를 누르면 아예 계좌가 임시 동결될 정도였다고.
이제는 선글라스로 눈을 가려도 인식표를 차고 있는 이상에야 그런 사기를 칠 수 없게 되었지만, 뭐, 인식표를 따 버리고 돌아다니는 나처럼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은 아직도 많았다.
말이 좀 샜지만, 한 마디로 하자면 이거다.
[네 능력은 충분히 써먹을 수 있어.]
[하지만 이런 재능으로 누군가의 호감을 끈다는 건 아무래도 가짜 같잖아.]
[가짜?]
[그래! 가짜! 진, 진짜가 아니라고.]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예쁘게, 잘생기게 태어나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들 또한 모두 가짜야? 그들의 외모 때문에 인기를 끄는 거니까 모두 가짜냐고.]
[그거랑은 다르지.]
[아니, 똑같아.]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 능력은, 재능은 그런 거하고 다를 게 하나도 없잖아.]
선천적으로 매력적인 사람이 있다.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끄는 이들이. 메이의 재능도 그런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나는 메이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확실히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둥근 이마, 예쁘게 올라온 코끝. 아직은 젖살이 채 빠지지 않아, 귀여운 느낌이 강하지만 젖살이 빠지고 골격이 모두 자라고 나면 훨씬 예쁜 얼굴이 될 거다.
하지만 메이의 매력을 만들어 내는 건, 단순히 예쁜 얼굴이 아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 늘 곡선을 그리며 웃고 있는 입꼬리 같은 거지.
같은 얼굴을 한 준에게는 전혀 ‘예쁘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 것과는 반대로, 메이에게는 확실히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런 생각 안 했어?]
[으응?]
[네게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는 능력이 생긴 건, 그만큼 네가 이미 사랑스러운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
태생부터 죽음에 둔감한 한서현이나, 재능 없이도 사람을 다루는 데에는 도가 튼 설록진처럼.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꽤 있었다.
메이 또한 그런 게 아닐까.
시스템이 인정하는 사랑받을 법한 사람. 음, 거짓말이 재능인 사람으로는 참으로 부럽기 짝이 없다.
[그러니까 가짜 같다는 둥, 그런 이상한 생각하지 마.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받는 것뿐이니까.]
내 말에 메이의 귀 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응? 왜 그래?]
나는 내가 말을 걸 때마다 잎을 접는 미모사처럼 몸을 꿈틀거리는 메이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왜 저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