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2화
#82 내일을 위한 밤 (3)
남주현의 머릿속에는 십 대 시절에 각인된 한 가지 장면이 있었다.
십 대 미국 백인 여자가 주인공을 맡은 하이틴 영화에서 주로 나오는 ‘걸즈토크’ 장면.
여자주인공과 여자 친구들이 파자마를 입고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그동안 속에 있던 이야기를 모조리 털어놓는 ‘걸즈토크’ 시간은 하이틴 영화의 끝내주는 갈등 해결 장치였다. 마치 디X니 영화에서 등장하는 요정 할머니와 같은 존재랄까.
그 어떤 고난과 역경, 갈등도 이 시간에 사르르 녹아 없어지기 마련이었으니까.
걸즈토크 뒤에 오는 것은 흔히들 말하는 사이다 장면이다.
착한 여주인공을 엿 먹였던 무리에게 끝내주는 복수를 하고, 지레 겁을 먹고 고백을 하지 않았던 학교의 킹카에게는 드디어 수줍은 고백을 건넨다.
하이틴 영화에서 ‘걸즈토크’ 뒤에 오는 것은 그런 끝내주는 해피엔딩뿐이다.
걸즈토크의 삼대 조건 중 두 가지는 갖춰졌다.
첫 번째. 이 방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여성인가? YES.
두 번째. 모두가 파자마를 입고, 편안한 행색을 하고 있는가? YES.
문제는 이거다.
세 번째. 모두가 속엣말을 꺼낼 정도로 입을 풀어 놨는가?
아니! NO! 不!
남주현의 말에도 쑤어하오주는 여전히 굳게 입을 닫은 채였다. 남주현은 두 눈을 반짝이며 쑤어하오주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 만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말하기 싫어.”라는 차갑기 짝이 없는 대답뿐이었다.
남주현은 한숨을 쉬었다.
“뭐, 영화는 영화다라는 건가…….”
그리 중얼거린 남주현은 툭툭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주현을 따라 쑤어하오주의 시선이 움직였다. 남주현은 여전히 고집스러운 얼굴로 입을 닫고 있는 쑤어하오주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나도 말 안 해 줘.”
남주현의 말에 쑤어하오주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두 손을 위로 들어 올린 남주현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너 말 안 해? 나도 말 안 해! 이 세상에는 뭐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어요. 너도 말해야, 나도 말하는 거야!”
“그 속담이 저 뜻이 맞나?”
“뭐,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다는 면에서는 맞지 않겠어요?”
이딴 게 언론고시 1등? 인가 싶겠지만, 어쩔 수 없다. 쑤어하오주는 기본적으로 애다, 애. 애를 상대할 때는, 애가 되어야 한다. 남주현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주변의 시선은 어째 아까보다 훨씬 차가워졌다.
“진심입니까?”
특히 이희원 쪽은, 남주현을 숫제 경멸하는 눈빛이다.
“뭐, 뭐가요!”
“아무리 입을 열고 싶어도 그렇지, 애를 상대로…….”
“이잇! 애는 뭐가 애예요! 툭하면 누굴 죽이고 싶다고 말하는데…….”
“그러니까 애죠, 애.”
이희원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거친 말을 한다고 어른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어른이 되지 못했기에 저런 거친 말을 하는 거지. 가시를 둘러야만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거니까.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린 이희원이 쑤어하오주에게 물었다.
[왜 이야기하기 싫은 거예요?]
그 질문에 쑤어하오주가 눈을 찌푸렸다.
[왜냐니?]
[우리를 믿지 못해서? 아직 이야기할 준비가 되지 않아서?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요?]
이희원의 말에 쑤어하오주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냥! 그냥 하기 싫은 거야. 대체 왜 내가 내 이야기를 너희한테 해야 하냔 말이야!]
[그야, 우리는 당신을 돕고 싶으니까요.]
이희원의 말에 쑤어하오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말하지 않아도 돼요. 그래요,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도 이유로 충분하죠. 하지만요, 그렇게 꼭꼭 숨기면 우리는 평생 당신에 대해 모를 거예요. 모르면, 모르는 만큼 도울 수 없게 되겠죠.]
[너희 도움 같은 건…….]
[필요하죠? 우리의 도움.]
쑤어하오주의 몸은 이제 겨우 열네 살, 해를 넘겨 키가 조금 더 자라긴 했지만 그래 봤자 아직 열다섯에 불과했다. 단지 육체적인 나이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쑤어하오주는 아직 많이 미숙했다.
양아버지가 만든 우리에 갇혀, 오로지 그가 원하는 무대에만 섰던 그녀에게 이 세상은 낯설기만 했다. 이 세상을 살아갈 상식도, 능력도 쑤어하오주에게는 아직 없었다.
당장 한국에 입국할 때, 입국심사관에게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고 말해서 괜한 관심을 끌었던 것도 그 예다.
[혼자서는 못하는 거 알잖아요?]
이희원의 말에 쑤어하오주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내 얘기를 들어야만 도와준다는 거야?]
[그야, 당신은 그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말했으니까요. 살인을 도와 달라면서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 건 너무하잖아요?]
이희원의 말에 쑤어하오주는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진짜로 죽일지는 아직 몰라. 아니, 죽일 건데, 죽일 거지만…….]
[그 전에 일단 그쪽이랑 대화하고 싶다고 했죠?]
이희원과 쑤어하오주의 대화를 가만히 보고 있던 남주현이 발을 구르며 말했다.
“으아아! 무슨 말을 하는 건데! 저, 정말이지 이 소외감 견딜 수가 없다고요!”
“자, 잠깐만 기, 기다려 볼까요?”
유채린은 재빨리 남주현을 잡아 바닥으로 끌어 앉혔다. 겨우 남주현을 진정시킨 유채린이 쑤어하오주와 이희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주현의 폭발에도 쑤어하오주의 시선은 여전히 이희원에게 향해 있었다.
남주현은 제게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는 두 사람을 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슬쩍 남주현 쪽을 살핀 이희원이 입을 열었다.
[대화든, 뭐든. 그 사람을 만나려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잖아요.]
[그냥은 안 도와주겠다는 거고.]
[도와줄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도움에 우리의 진심은 들어가 있지 않겠죠. 들어가더라도 엄청 함유량이 낮을 거예요. 바나나맛 우유에 들어가 있는 바나나 과즙처럼?]
[그건 거의 사기잖아!]
얼마 전 바나나 우유에 바나나가 거의 들어 있지 않음을 깨닫고 길길이 날뛰었던 쑤어하오주에게 이희원의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뭐, 그래도 바나나 우유라고 잘만 팔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의 진심도, 진심인 거지.]
[아냐! 그건 진심 같은 거 아니야!]
어린애를 달래듯, 이희원이 쑤어하오주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말해야겠네.]
그 말에 쑤어하오주는 성이 난다는 듯 볼을 부풀렸지만,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말할게.]
작게 미소를 지은 이희원이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두 사람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말하겠대요.”
이희원의 말에 남주현이 입을 쩌억 벌렸다.
“뭐야, 도대체 어떻게 설득했어요?”
“이런 타입은 꽤나 익숙하거든요.”
“이런 타입?”
이희원은 진연화를 떠올렸다. 그녀의 곁을 떠난 지 몇 달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쓰렸다. 쉽사리 다른 이를 믿지 않았던, 이희원의 전 보스는 과연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어깨를 으쓱인 이희원이 재빨리 말을 돌렸다.
“한 번 들어 볼까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의 시선이 쑤어하오주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에 쑤어하오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막상 모두의 시선이 닿으니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가만히 고개를 숙인 쑤어하오주는 제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말을 해야 해. 말을 하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나를 돕지 않을 거야. 아니, 돕겠지만, 진심이 아닐 거라잖아.
진심이 아니면 싫다.
하지만 진심이라는 게 뭘까. 진심으로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어떤 마음인 걸까.
그게 바로 ‘친구’라는 걸까?
쑤어하오주의 기억에 ‘친구’는 없었다. 파파를 만난 뒤부터는, 언제나 파파가 제 속에 있는 빈자리를 채워 줬으니까. 친구도, 가족도, 누구도. 파파로 충분했으니까.
그 틈을 비집고 처음으로 들어온 게 바로 그 남자였다.
션, 여우처럼 생긴 기다란 눈을 접으며 환하게 웃었던 남자는 제게 ‘내일’을 말했고, 그 대가로 쑤어하오주는 자신의 세상에 떠 있던 태양이자, 유일한 이정표인 파파를 잃었다.
그래서일까.
두려웠다.
이 사람들에게 틈을 보이는 것이, 무엇보다 두려웠다. 하지만 이희원의 말이 맞다.
진심이 닿기 위해선, 말해야 한다.
[나한테는 파파가 있었어. 파파만, 있었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파파랑 나는 행복했어.]
천천히 쑤어하오주는 입을 열었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 남자가 어떻게 자신의 삶에 끼어들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왜 그 남자를 죽여야만 하는지도.
[그 남자는 자기를 죽이러 오라고 했어. 그때까지 살라고 했어, 나한테. 그래서 나는 살았고, 그 남자를 찾으려고 했어.]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너희를 만나게 되었다.
쑤어하오주의 복수에 이 사람들은 없었다.
툭하면 자신을 노려보면서도 늘 맛있는 걸 입에 물려 주는 남주현도,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상대면서도 얄밉게도 제가 듣고자 하는 말은 죽어라 안 해 주는 이희원도, 말없이 쓱 제 곁에 다가와 제 부족한 말을 들어주는 유채린도.
쑤어하오주의 계획에는 없었던 사람들이다.
[난 그 남자를 만나야 해. 션을 만나기 위해, 그를 죽이기 위해 나는 살아 있는 거니까.]
쑤어하오주의 말이 끝난 뒤, 세 사람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쑤어하오주의 이야기는 그만큼이나 무거웠으니까. 하지만 그 침묵은 곧 깨졌다. 남주현에 의해서였다.
“조, 좋아. 그러니까 그 사람이 잘못했네.”
툭 말을 던지고 보니, 그 생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래, 잘못했네. 누가? 벨츠머츠의 그 인간이!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그냥 툭하고 여기에 이 꼬맹이를 버리고 가면 그만이야? 아니, 이젠 눈앞의 쑤어하오주를 단순히 ‘꼬맹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기억을, 전부 시스템에게 넘겨 왔다니. 그로 인해 몇 년 동안이나 저 작은 몸에 갇혀 있었다니.
벨츠머츠의 그 남자는 확실히 이상했다. 그 남자는 확실히 세간에서 말하는 ‘악’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이라고 할 수도 없다. 확실히 이 경우에는…….
‘악이라고 말해야겠지.’
지금 그 남자가 눈앞에 있다면, 남주현은 기꺼이 그 남자의 멱살을 잡았을 거다.
‘정말이지, 겨우 열몇 살 먹은 정신연령을 가진 여자애 앞에서 아버지를 그렇게 죽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날 죽이러 와야 하니, 너는 살아야 한다는 말이 가당키나 하냐고!’
그 남자의 문제 해결 방식은 뒤틀려 있다. 세상 그 누구도 그 남자가 ‘옳다’고 말할 순 없을 거다. 하지만 그 남자는, 자기가 아는 최선을 택했다.
그 남자는 자신이 아는 최선의 방법으로 쑤어하오주를 살려 놓은 거다.
그래도 그렇지…….
남주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그 남자는 남주현에게 쑤어하오주를 맡겨 놓았다. 그냥,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잘 돌봐 주라는 말만을 남긴 채로. 쑤어하오주의 복수를 도우라는 말도, 방해하라는 말도 없었다.
“좀 열이 받네?”
남주현이 살벌한 얼굴로 말했다.
“하오주한테는 자길 죽이러 오라고 말했으면서, 막상 그 복수는 조금도 신경 쓰고 있질 않잖아, 그 인간.”
그 살벌한 말에 이희원이 물었다.
“어, 그런가요?”
“그야!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하오주를 신경 썼다면 우리에게 하오주를 안 맡겼을 거 아니에요?”
일단은 협력 관계인 자신들에게 쑤어하오주를 맡긴 것만 봐도 뻔하다.
“정말이지, 진심으로 쑤어하오주가 자길 찾아온다는 생각 자체를 안 했잖아요. 평생 이대로 도망만 다닐 생각인 거잖아!”
그야, 쑤어하오주에게 죽어 줄 수는 없을 테니 당연한 선택이겠지만. 아니, 당연하지 않다! 그렇게 그쪽이 도망만 다니는 사이, 이 아이는! 이 아이는 속으로 곪아 갈 뿐 아닌가!
남주현은 아득 이를 갈았다.
확실히 이건 ‘걸즈토크’가 맞았다.
이 대화가 어떤 사건에 대한 방아쇠가 되었다는 점에서, 완벽히.
남주현이 말했다.
“가자, 중국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