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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310화 (310/352)

제310화

#82 내일을 위한 밤 (1)

유채린이 눈을 떴을 땐, 둥그런 눈동자 세 쌍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아아악!”

유채린은 그 광경에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에 굵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는 부스스한 갈색 머리의 여자 또한 비명을 질렀다.

“우와아악! 왜 갑자기 소,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뿔테 안경의 여자, 남주현은 벌렁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하마터면 진짜 심장마비로 갈 뻔했다.

“여, 여기는 어디예요?”

“기억 안 나요?”

남주현의 말에 유채린은 가만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기억이 나는 게 하나도 없었다.

평상시처럼 퇴근하던 길이었다는 것만 빼면, 아……. 그때 끔찍한 기억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억지로 끌려갔던 게이트에서 보았던 끔찍한 광경들.

“우욱.”

갑자기 입을 틀어막는 유채린의 행동에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남주현이 재빨리 소리를 질렀다.

“빠, 빨리 누가 봉투 좀!”

평온한 얼굴의 이혜원이 재빨리 그녀에게 검은 봉투를 건넸다. 유채린은 그 검은 봉투에 속을 모두 게워 냈다. 온몸이 벌벌 떨렸다. 남주현은 재빨리 유채린에게 물을 건넸다.

“입부터 헹궈요.”

그녀가 건네는 물로 입을 헹군 유채린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남주현은 차분히 그녀가 입을 여는 것을 기다렸다. 한참 만에야, 유채린은 겨우 더듬더듬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따라서, 게이트에 갔던 것 같은데…….”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은 누군가 지운 것처럼 중간중간이 지워져 있었다. 누군가를 만났다는 것은 기억이 나지만, 막상 누굴 만났는지, 그가 무어라 말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걸 떠올리려고 할 때마다 달군 쇠로 머리를 쑤시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머리를 잡은 채로 온몸을 덜덜 떠는 유채린을 향해 남주현이 말했다.

“기억이 나지 않으면, 그냥 그대로 둬요. 억지로 떠올릴 필요는 없어요.”

남주현의 말에 유채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불안함이 맴돌고 있었다.

그야, 어쩌다가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도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으니.

마치 그녀의 속을 읽은 것처럼 남주현이 입을 열었다.

“머릿속이 엉망이라 혼란스럽겠지만, 내 말 잘 들어 둬요. 지금 그쪽은 아주 위험한 사람이랑 엮이게 됐어요. 그 사람의 능력은 세뇌고, 그쪽 머리가 엉망인 것도 그 때문이에요.”

“세뇌…….”

“예, 누구인지는, 글쎄, 말 못 해요. 그냥 아주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만 알아 둬요.”

“그, 그쪽은…….”

“아, 내 이름은 남주현이에요. 기자죠.”

“기…… 자요?”

생각지도 못한 직업에 유채린의 눈이 커졌다. 어깨를 으쓱인 남주현이 옆에 서 있는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어, 저쪽은 이희원 씨. 제 경호원 겸 통역사 겸 저희 집 살림꾼이고요. 그리고 그 뒤에서 채린 씨를 노려보고 있는 친구는…….”

“어! 알아요.”

유채린은 낯익은 얼굴에 입을 쩍 벌렸다. 그것도 잠시, 유채린은 경악했다. 왜 저 얼굴이 낯이 익을까?

“아니, 잠깐. 알, 알면 안 되는데?”

친구도 몇 없는 데다가 극도로 외부 활동이 많지 않은 유채린의 인간관계는 좁디좁았다. 그런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 백 퍼센트 그 답은 하나다. 귀염상의 소녀처럼 보여도 수배가 된 몸이라는 뜻!

“안녕.”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며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이름은 쑤어하오주. 벨츠머츠에게 복수를 하겠다며 한국 땅을 밟은 중국 소녀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

남주현이라는 기자나 그녀의 보디가드라는 이희원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갑자기 여기에서 벨츠머츠와 엮인 탈주범이 튀어나온다고?

“아아, 우리도 저 친구가 여기에 왔을 때는 깜짝 놀랐어요.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요. 보기보다 훨씬 안 위험해요.”

“아니, 그게…….”

“밥만 제때 주면 된다니까요. 아, 그리고 절대. 그 이름은 말하지 마요.”

“그 이름이라면……?”

“그, 저 친구와 엮인 그 조직 이름이요. 그 이름만 말하면 아주 난리를 친다니까요.”

모 소설에 나오는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도 아니고, 이름을 말할 수가 없다니.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남주현의 얼굴은 무척이나 진지해 유채린으로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당분간은 저쪽에 있는 방을 쓰면 돼요.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희원 씨한테 말해 주면 되고요…….”

“저, 저기 잠깐만요.”

남주현의 말에 유채린은 재빨리 손을 들어 올렸다. 유채린은 남주현에게 물었다.

“다, 당분간 저쪽에 있는 방을 쓰라는 말이 뭐예요? 저, 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건가요?”

“예.”

남주현은 즉답했다. 흔들리는 유채린의 눈동자를 본 남주현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유채린 씨는 아주 위험한 사람이랑 엮였어요. 그 사람은 유채린 씨가 죽길 바라고 있고요. 지금 이런 상황에 집으로 돌아간다는 건, 음, 글쎄, 나를 잡아 죽여 주세요. 그런 뜻이 될 거예요.”

“그럼 언제 갈 수 있는데요?”

“모르죠?”

남주현의 말에 유채린은 입을 딱 벌렸다.

“저에게는 돌아가야 할 직장이…….”

“아, 그 못돼 먹은 놈들이 유채린 씨를 쪽쪽 빨아먹는 그 직장 말이죠.”

그 말에 유채린의 어깨가 떨렸다.

“저요, 유채린 씨의 사정을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사실 그 직장을 좋아하지도 않잖아요. 툭하면 야근에, 특근에. 사정은 생각도 해 주지 않고 부려 먹을 뿐이니까.”

“그야, 그렇지만…….”

타인에게 전해 들으니 정말로 이런 쓰레기 직장이 또 없었다. 하지만 누가 직장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다니는가.

“가족들이 제 걱정을…….”

“놀랍게도 그 가족들은 유채린 씨가 실종되었다는 말에 곧바로 보상금을 타 갈 생각을 하더라고요.”

유채린은 그 말에 어깨를 떨었다. 남주현은 유채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이런 말 하는 거 주제 넘는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런데요, 그 사람들. 정말로 유채린 씨를 아끼는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유채린은 그 말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능력을 각성했다는 말에, 그리고 그 능력 덕분에 공무원이 되었다는 그녀의 말에 슬금슬금 다가왔던 그녀의 ‘가족’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자랑스러웠다. 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던 그녀가 드디어 가족에게 보탬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 뿌듯함은 곧 압박이 되어 그녀의 숨통을 죄였다.

“얘, 채린아. 이번에 너 괜찮은 직장 들어갔다며. 아니, 다른 게 아니라. 우리 유아가 곧 대학교 가야 하는 건 알지? 너는 그래도 우리 가족 중에서는 꽤 벌잖니. 너희 엄마가 그러던데, 너 덕분에 그래도 요새 살 만하다고.”

“아니, 별 건 아니고. 좀만 도와주면 안 되냐? 그 돈 아니면 나 감방 가서 그래. 너는 사촌 오빠가 돈 좀 빌려 달라는데, 그렇게 정색을 하니?”

“큰아빠가 위암이란다. 이번 한 번만 도와줘라.”

그렇게 도움을 주다 보니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그녀는 심장을 꾹 눌렀다.

‘정말 내일은 출근하기 싫다.’

그런 말도 함부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왜냐면 유채린에게는 능력이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남주현이 말했다.

“정말로 그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거라면 방법을 찾아볼게요. 하지만 그러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채린 씨를 위한 거라면…….”

그 말에 유채린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저를 위한 거요? 저를 위하는 게 뭔데요?”

유채린은 진심으로 알지 못했다. 자신을 위한 삶이 뭔지.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능력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쓰기만 했으므로.

“그야, 저도 완벽하게는 모르죠. 저는 유채린 씨를 알지 못하니까. 그래도 말이죠…….”

눈을 데구루루 굴린 남주현이 말했다.

“지금 유채린 씨, 엄청나게 지쳐 보이거든요.”

남주현의 눈이 유채린의 창백한 얼굴로 향했다. 관리받지 못해 까칠해진 입술도, 턱까지 닿아 있는 다크서클도.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칼도. 밑창이 다 까져 너덜거리는 구두도. 모든 게 유채린의 삶이 고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하나뿐인 사이코메트리로, 수많은 사건에 동원되는 하나뿐인 능력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행색이었다.

“일단 쉬어요. 아무런 걱정도 없이 쉬다 보면 그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남주현의 말에 유채린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라고요?”

“예. 합법적인 휴가예요. 말했잖아요. 엄청나게 무서운 사람이 유채린 씨를 쫓고 있다고.”

살기 위해서라도 여기에서 조용히 몸을 낮추고 쉬어야 해요.

그 말은 유채린에게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유채린은 쉬었다.

남주현의 그 말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늘은 뭐 먹을래요?”

남주현이 유채린에게 묻는 거라고는 그런 것밖에 없었다.

오늘 점심으로 뭐 먹을래요? 나 이따 카페 갈 건데, 케이크 사다 줄까요? 음료는 뭘로?

마치 걸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남주현은 유채린에게 계속해서 먹을 것을 퍼다 날랐다.

처음에는 모든 질문에 소심하게 답했던 유채린이었지만, 어느새 적극적으로 남주현의 질문에 대답하게 되었다.

“저! 오늘은 쇼콜라 퐁당으로…….”

“쇼콜라! 좋지. 초코 땡겨요?”

“예. 초코가 땡기네요.”

“평소처럼 아아메?”

“아아메도 좋고, 아니면 얼그레이도 좋고요.”

“좋아! 역시 먹을 줄 알아!”

남주현의 말에 유채린은 배시시 웃었다. 자신을 세뇌했다던 그 나쁜 놈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자신을 그 지옥에서 꺼내 주어 고맙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지 2주째. 슬슬 몸이 근지러워질 때도 됐다. 유채린은 한참 한국어를 배우며 애를 쓰고 있는 쑤어하오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놀랍게도 쑤어하오주는 요즘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그래, 한국어! 처음에는 유채린에게 날을 세웠던 쑤어하오주였지만, 요즘은 달랐다.

“이거 알아?”

일을 하느라 바쁜 두 사람과는 달리 맛있는 것을 먹으며 뒹굴거리는 것밖에 하지 않는 유채린은 곧 쑤어하오주의 눈에 띄었고…….

“아, 이건…….”

마침 심심했던 유채린은 쑤어하오주의 질문에 차근차근 답해 주었다.

“그런데 한국어는 왜 배우는 거야?”

천천히 내뱉어진 질문에 쑤어하오주는 눈을 굴리며 입을 열었다.

“말하고 싶어서.”

“누구한테?”

“션.”

그 이름을 내뱉은 쑤어하오주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진한 감정에 유채린은 깜짝 놀랐다. 여태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늘 뚱한 표정만 짓고 있던 이 어린애가, 이토록 아픈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말할 거야.”

“뭐라고 하고 싶은데?”

“……비밀.”

쑤어하오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고…….

마침내 그 사건이 터졌다.

‘검은 낮.’

중국의 한 도시를 벨츠머츠가 습격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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