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7화
#81 한 명만을 위한 쇼 (4)
중국에서 유학 중인 최권승은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깜빡였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휴일. 빽빽하게 채워 두었던 알람도 모두 끄고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오후 1시였다.
“이게 행복이지.”
커튼을 걷어 중천에 뜬 해와 인사를 나눈 최권승은 시리얼 위에 우유를 부으며 TV를 틀었다. TV를 틀자마자 나온 뉴스에 최권승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 또 이 뉴스네.”
「정부는 월요일부터 지닝시 참사의 피해자들에게 재난구호보조금을 지급할 예정이며…….」
벌써 참사가 일어난 지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뉴스에서는 지닝시에서 일어난 일을 깊게 다루고 있었다. 워낙 사건의 파장이 컸던지라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인명 피해가 크기도 했지만, 재산 피해 또한 엄청났다. 화재가 폭발로 이어지고 그 폭발이 건물의 붕괴로 이어졌으니까. 교통사고로 마비된 도로도 엉망이었다. 그 모든 피해를 수습하는 데만도 몇 달은 걸릴 거라고 예측되는 판이었으니.
그리고 아직도 이 일을 저지른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각성자가 엮여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지만, 누가, 어떤 이유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것만큼은 밝혀지지 않았다.
생존자들의 증언 또한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느샌가 정신을 잃고 깨어났을 때에는 본인들이 지옥에 있었다는 말뿐이었으니.
이 모든 일을 저지른 범인은 혼란 속에 사라졌다.
그 때문에 이번 일에는 유난히 음모론이 많이 돌았다. 중국 내에서는 그나마 정부의 감시로 인해 음모론이 활발히 퍼지지 못했지만, 외국에서는 그 사정이 달랐다.
당장 옆 나라인 한국에서는 이 모든 게 중국 정부의 각성자 실험 프로젝트 중 일어난 각성자의 폭주로 인한 거라는 음모론이 거의 정설로 퍼져 있을 정도니까.
그런 음모설이 돌 정도로 한국에도 이 사건은 많이 알려져 있었다. 그 덕분일까. 최권승은 시도 때도 없이 ‘너는 괜찮냐’, ‘잘 지내고 있냐’는 연락을 받았다. 먼 타국 땅에서 유학하고 있는 자신을 향한 가족들의 걱정은 늘 감사했지만, 그것도 도가 넘으니 짜증이 절로 일었다.
그래도 엊그제에는 꽤 이상한 일이 있긴 했지. 갑자기 괴상한 검은 구름과 함께 가면을 뒤집어쓴 이상한 놈들이 나타나 사람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있었다던가.
마침 학교에 있었던 최권승은 직접 겪지 못한 일이라 나중에야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전해 들었다.
지닝시의 참사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이라, 사람들은 잔뜩 긴장했으나 다행히 그놈들은 별다른 일을 저지르지 않고 그냥 사라졌다.
공안들에게도 신고했다고 들었지만, 그놈들이 잡혔다는 소식은 없었다. 건물 주변으로 순찰을 몇 번 더 돌았을 뿐이다. 별다른 피해도 없는 상황이라 공안도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최권승은 그 일이 영 찜찜했다.
‘사람들을 다 내쫓고 그사이에 이곳에 무슨 짓을 했을지 어떻게 알아. 정말 그냥 사람들을 놀리려고 그 짓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나온 최권승은 깜짝 놀라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미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밝았던 하늘에는 한 점 빛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하늘에 검은 암막 커튼이라도 친 것처럼, 햇빛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해가 들어 밝았던 거실은, 조명을 켜지 않으면 코앞도 거의 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졌다.
“뭐야.”
최권승은 깜짝 놀라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조명부터 켜야겠지만, 왠지 이 상황에 조명을 켰다가는 더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바깥에 있는 놈이 거실에 켜진 불을 보고 자신을 찾으면 어떡하나.
그런 비이성적인 걱정까지 들 정도였다. 더듬더듬, 테이블 위에 두었던 휴대폰으로 손을 뻗은 최권승은 휴대폰의 불빛으로 겨우 앞을 식별해 나가며 거실 벽에 붙은 창문 근처로 다가갔다.
‘저번에 우리 동네에 왔다던 그놈들이 또 온 건가?’
최권승은 벽에 붙어서서 창가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집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최권승과 똑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 듯, 창문 너머로 사람의 그림자로 보이는 것들이 어른거렸다.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 놈들이 쳐들어온 시간은 주말이었기에 창가에 붙은 이들은 생각보다 꽤 많았다. 창문 너머 이웃집의 조명이 켜졌다가 황급히 꺼지는 걸 본 최권승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때 최권승의 휴대폰이 울렸다. 벨소리에 놀라 휴대폰을 반쯤 던졌던 최권승은 가까스로 휴대폰을 공중에서 잡아챘다. 욕설을 내뱉은 최권승은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권승아!]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학교 친구의 목소리에 최권승은 반쯤 내뱉었던 욕을 겨우 삼켰다.
“어! 진호야.”
[너, 너, 너희 집 바깥도 이러냐?
“어. 새까매, 하나도 안 보인다.”
[씨X, 이게 뭐냐.]
“나도 몰라, 저번에 우리 동네 와서 지X하고 갔다는 그놈들 또 온 거 아니냐?”
[저번에는 그냥 잠깐 이러다가 사라졌다던데. 왜, 또, 또 왔지?]
친구의 목소리는 불안함과 긴장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평상시였더라면 무슨 이런 일에 쪼냐고 친구를 놀렸을 최권승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도 다르지 않았다.
“나야 모르지, 씨X. 저번에도 별, 별일 없었다며. 이번에도 그냥 조용하게 지나가겠지. 아니, 그러니까 씨X, 공안 놈들은 뭘 하는 거냐고. 저런 놈들 안 잡아가고.”
그저 하늘이 검게 물든 것뿐인데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공포심이 장난이 아니었다. 최권승은 앓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이러니까 옛날에 일식 일어나면 난리 나고 그랬구나. 옛날 사람들 다 무식하다고 깠는데, 반성합니다. 으응, 이거 엄청 무서운 일이네.”
[참나.]
최권승의 과장이 섞인 말에 친구의 목소리가 풀어졌다.
[쫄?]
“야, 쫄기는 네가 더 쫄았지. 아까 네 목소리 녹음해서 들려줄까? 막 덜덜 떨기가 진짜 무슨 휴대폰 진동모드인 줄.”
긴장도 잠시, 곧 두 사람은 풀어진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에도 저번과 똑같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으며.
[저거 사라지면 오늘 저녁에 술이나 한잔할래?]
“미친놈. 어제 그렇게 달려 놓고 오늘 또?”
[씨X. 이럴 때 한잔하지, 아니면 언제 하냐?]
애써 그렇게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며 곧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간절히 바라던 두 사람의 소망은 안타깝게도 곧 산산조각이 났다.
퍼어엉, 어디선가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 게 첫 번째 신호였다. 처음, 최권승은 그 폭발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곧이어 엄청난 소음과 함께 터진 충격파가 최권승이 있는 건물을 덮쳤다.
[억!]
“악!”
휴대폰을 붙잡고 있던 두 남자는 동시에 비명을 내지르며 귀를 꼭 틀어막았다. 그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유리창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깨질 것처럼 흔들리던 유리창은 다행히 깨지지 않았지만, 최권승의 유리와도 같은 멘탈은 그대로 박살이 나 버렸다.
“씨, 씨, 아, 아…….”
최권승은 겁에 질려 제대로 말도 내뱉지 못했다.
“이게, 이게 뭐야.”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별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최권승이 멍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또다시, 멀리에서 불빛이 번쩍이고…….
폭발이 일어났다. 최권승은 그 불빛을 보는 순간 비명을 내지르며 곧바로 거실 창문에서 멀어졌다. 벽에 걸어 두었던 재킷을 손에 든 최권승은 그대로 집을 빠져나왔다.
최권승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복도는 이미 어떻게든 탈출을 하려는 인파들로 엉망이었다.
[나가자고! 다 같이!]
[지금 누가 내 발을 밟았어, 이 빌어먹을 뚱돼지들아!]
[차근차근, 아니, 씨X, 나를 밀치지 말라니까?]
사방에서 쏟아지는 중국어에 최권승의 정신은 더욱 아득해졌다. 중국어에는 제법 익숙해진 그였지만, 아비규환 상황에서 뭉개지듯 쏟아지는 말은 그에게 거대한 비명처럼만 들렸다.
겨우 건물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큭.”
얼굴을 스치는 모래에 최권승은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손끝에, 몸에, 까끌한 모래가 스쳤다. 그제야 최권승은 깨달았다.
햇빛을 가린 건 이 모래들이라는 것. 이 공중에 가득 찬 모래들이 사방을 검게 물들이고 있다는 것.
모래가 입에 들어가지 않게 손등으로 입과 코를 대충 막은 최권승은 안전한 곳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래 덕분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안전한 곳을 찾아야만 했다.
그때, 손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최권승!!]
아, 최권승은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손에는 친구와 통화 중인 상태의 휴대폰이 그대로 쥐어져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최권승은 재빨리 휴대폰을 들어 올려 귓가에 댔다.
“어, 어.”
[씨X, 뭔데 대답도 안 하는데! 나는, 네가 어떻게 된 줄 알고, 이 씨X 새X야!]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에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벽에 기대선 최권승이 가쁜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난 괜찮아. 그, 거, 건물 바깥으로 나왔어.”
[미친, 지금 상황에 바깥으로 나왔다고?]
“아, 안에 있다가 우리 건물도 폭발하면 어떡하나 싶어서. 너는 어딘데?”
[나야, 내 집이지.]
“빨리 나와.”
[미친, 나가고 싶어도 지금 바깥이 난리야. 씨X, 나가다가 사람들한테 깔려 죽진 않을까 걱정이 돼서…….]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세 번째 폭발이 이어졌다.
쿠와아아앙!
이번에는 근처였다. 폭음에 귀가 멀어 버릴 것처럼 아팠다. 친구의 목소리도, 휴대폰 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최권승은 그대로 귀를 틀어막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허억, 허억, 허어…….”
생전 머리털 나고 처음 겪는 일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눈앞은 깜깜해졌고 숨은 점차 가빠졌다. 최권승은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미친, X나…….”
씨X, 이래서 집 나오면 고생이라는 건가. 이렇게 있다가 죽는 건가. 최권승이 그렇게 덜덜 떨고 있을 때였다. 어떤 빛에 눈앞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였다. 어느샌가 덜덜 떨던 자신이, 인도를 벗어나 차도까지 이르게 된 거다.
“빌어먹…….”
이대로 죽는 걸까.
최권승이 그렇게 생각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자신의 몸을 덮치는 고통 따위는 없었다.
“허흐, 흑.”
최권승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누군가의 등이 자신의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남자는 자동차와 자신의 사이에 완벽하게 끼어들어 있었다. 최권승을 향해 달려들던 자동차는 완벽하게 멈춰져 있었다. 그 어떤 충격도 없이 한순간에 운동에너지만을 날린 것처럼 깔끔한 정지였다.
뒤로 고개를 돌린 남자는 얼음처럼 굳어져 버린 최권승의 얼굴을 살폈다. 남자는 무어라 최권승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바짝 굳어 있던 최권승은 겨우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국어도, 중국어도 아닌…….
“여, 영어?”
“오, 한구긴?”
영어를 내뱉었던 붉은 머리의 남자는 반갑다는 듯이 최권승을 향해 방긋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