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3화
#80 실수에서 배운다는 것 (3)
[만약 미국으로 가지 못하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어. 어떻게든, 방법은 만들어 줄 테니.]
정 일이 꼬이면, 한국으로 데리고 갈 생각도 있다.
음, 금박사 쪽으로 보내든가 남주현……, 남주현에게 이 이상 사람을 맡기면 머리를 쥐어뜯길 것 같긴 하지만.
확실한 건 해성회를 해체시킬 거라는 거다.
내 말에 어깨를 으쓱인 첸륜이 말했다.
[아이들을 제대로 키울 수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어.]
음, 무진장 가정적인 남편이 할 법한 말 아닌가. 너무 첫인상이랑 다른데.
[그나저나 당장 쓸 만한 전투 인원이 없는 게 흠이네.]
내 말에 첸륜이 말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 보내 둔 조가 있어서.]
[지금 이 상황에도 아이를 구하고 있었다고?]
내가 쳐들어온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따로 사람을 빼지 않았다는 건가. 대단한데?
[……지금은 아프리카에 가 있거든.]
아, 아프리카면 시간 내에 못 빼 올 테니까 어쩔 수 없군. 그나저나 생각보다 엄청나게 글로벌하구만. 괜히 돈을 끌어오기 위해 그 애를 쓴 게 아니군.
[용병대로 활동하는 거라면 내가 직접 움직일 수 있으니, 아이들을 구출하는 것도 편해지겠군.]
[뭐, 애들을 데리고 올 거라면 어둠의 루트를 써야 할 테지만 말이야.]
아무래도 남들의 눈에는 납치나 다름없어 보일 테니까, 으응. 첸륜은 내 말에 다시 한번 씨익 미소를 지었다.
[걱정 고맙군.]
[뭐, 그래.]
어찌 되었든 IMS라는 나쁜 놈들의 손에서 아이들을 구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좋다. 마침 나도 그쪽이 무척이나 신경이 쓰이긴 했거든. 앞으로 해성회, 아니, 첸륜이 제대로 활동을 한다면 IMS의 입지도 크게 줄어들겠지.
그렇다고 첸륜에게만 IMS의 처리를 맡겨 둘 생각은 없다. 지금은 할 일이 많아 곤란하지만, 그놈들이 날뛸수록 세상이 혼란해지는 건 사실이니, 언젠가 한 번 제대로 쫓아 봐야지.
대충 이야기가 정리되는 것 같으니, 이제 내가 제일 묻고 싶었던 걸 물어야겠다.
[그러고 보니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그 아티팩트를 만든 장인은 어디에 있지?]
엄청난 퀄리티의 아티팩트를 공장처럼 찍어내는 데다가, 상위 아티팩트를 복제까지 할 수 있는 능력자! 해성회를 치려는 목적의 99.9%는 그 장인을 강탈, 아니, 스카우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내놔라, 그 장인을.
[아, 그건 의뢰를 맡긴 거야.]
첸륜의 대답에 나는 절망했다.
[의뢰라고?]
[그래, 암시장에 의뢰를 맡긴 거야.]
다이애나가 했던 말과는 달리 해성회에는 따로 장인이 소속되지 않았다고 했다. 필요할 때마다 암시장에 있는 공방과 협력을 맺고 아티팩트를 찍어 냈을 뿐이라나.
[이런 젠장, 블랙 기업에서 개같이 혹사당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개같이 굴려도 자기를 구해 줘서 고맙다고 나에게 절을 할 만한 그런 사정일 줄…….]
[음,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그 여자는 그쪽의 대우에 나름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첸륜의 말에 나는 절망했다.
이럴 수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합법 납치 가능 장인이 없다니.
애초에 혹사당하고 있다는 증거가 없긴 했지만, 그 정도로 아티팩트를 찍어 내면 당연히 혹사당하고 있는 게 맞지 않냐고! 어째서 만족하고 있다는 건데.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그 장인은 한 번 만나 봐야겠네.]
어쩌면 정말로 혹사당하고 있을지도? 어쩌면 탈출을 바라고 있을지도?
━이쯤 되면 포기하는 게 답일 것 같다만.
‘조용히 하세요! 꿈은 꿀 수 있는 거잖습니까?’
내 말에 첸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을 뜨기 전에 그 공방을 꼭 들러 보기로 했다.
중국 암시장이라니, 정말이지 기대가 되는군. 엄청난 걸 팔지도 몰라!
첸륜과의 대화는 이걸로 끝이었다. 나는 구석에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유마에게로 다가갔다.
[왜, 왜 여기로 오는 건데!]
내가 다가가자마자 유마는 곧바로 길고양이처럼 이를 드러냈다.
[저기, 그쪽 보스랑 이야기 다 끝냈거든? 우리는 적이 아니라고.]
[그, 그렇게 말한다고 누가 믿을 줄 알아?]
[누구라기엔, 이미 그쪽 보스는 내 말을 믿는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러니까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 해! 나라도, 그래서 내 몫을 해내야만…….]
내 말을 듣는 듯하더니 다시 삼천포로 빠져 버렸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유마의 상태는 확실히 좋지 않아 보였다.
어렸을 때 무슨 일을 당한 건지. 그러고 보니 드러나 있는 손목과 목에 흉터가 가득했다. 칼에 몇 번이고 그어진 자국과 화상 자국을 본 순간 나는 숨을 내뱉었다.
뭐, 이 사람에게도 조금은 괜찮은 내일을 선물해 줘도 되겠지.
[꼴사납게 중얼거리지 말고, 내 눈을 바라봐.]
내 강압적인 말에 유마의 눈이 곧바로 내게로 향했다. 마치 누군가 버튼을 누른 로봇처럼 인위적인 움직임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역시, 첸륜의 말대로 머릿속에 강하게 암시가 걸려 있었다.
그래도 마력으로 꼬여 있지 않는 이런 세뇌를 푸는 건 간단하지.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거짓말이라는 건, 굉장히 넓은 범위에 쓰일 수 있는 능력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파고 들어가 그 사람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일까지 가능하다.
[뭘 했다고 그렇게 벌벌 떠는 거야? 혼자서는 제대로 서는 법도 몰라?]
나는 유마의 트라우마를 건드렸다. 불안한 듯 눈을 굴린 유마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그렇게 덜덜 떨지 말고. 똑바로 서.]
성의가 없이 무미건조하게 내뱉어진 내 말에도 유마의 몸은 덜덜 떨렸다.
[흐, 흐으윽.]
유마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그 순간, 유마의 몸을 감싸고 있던 자물쇠가 떨어졌다.
머릿속을 뒤흔들 준비는 끝났다는 뜻이다. 보통은 이런저런 달콤한 말로 꾀어 내야 마음을 열 수 있는데, 이쪽은 반대로 윽박을 질러야 열리다니. 작게 속으로 혀를 찬 나는 유마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벌벌 떠는 거야?]
[자, 잘못을 했으니까. 시, 실수해서 죄송…….]
[그래, 잘못했지, 실수도 했고. 근데 뭐.]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유마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그렇게 벌벌 떨면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잖아.]
내 말에 유마의 숨이 거칠어졌다.
[하지만 나는 쓸, 쓸모가 없고…….]
[실수를 해도, 잘못을 저질러도 쓸모 있어. 누가 그래, 쓸모가 없다고?]
유마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녀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얹은 내가 말했다.
[괜찮다고, 실수해도. 실수로부터 배우기만 하면. 그래서 더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그걸로 괜찮잖아. 넌 실수했을 뿐, 실패한 게 아니잖아. 실패해도, 영원히 패배한 게 아니고. 그러니까 쓸모 있어. 살아 있는 동안엔, 넌 늘 쓸모가 있다고.]
내 말에 점차 유마의 거칠었던 숨소리가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숨을 들으며 나는 그녀의 어깨를 도닥였다. 강압적이었던 내 말투는 어느새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워졌다.
[괜찮아.]
떨리는 목소리로 유마가 내게 물었다.
[실, 실수해도 괘, 괜찮아?]
[그래.]
너는 괜찮을 거다. 실수해도, 그로 인해 배우기만 하면 너는 괜찮을 거다.
실제로 유마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대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대도 상관없다.
[너는 괜찮을 거야.]
내 ‘거짓말’을 듣는 순간, 유마의 탁했던 눈동자에 빛이 들어왔다.
그녀를 도닥인 나는 첸륜을 불렀다.
[칭찬해 봐.]
[말했잖아, 유마는 칭찬을 견디지 못한다고…….]
[됐으니까, 한 번 해 봐.]
나를 바라본 첸륜이 유마를 향해 눈을 돌렸다.
[유마, 저번에 애들을 봐줘서 고마웠다. 토마토 달걀 볶음도 맛있었어.]
그 말에 유마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얼굴을 본 첸륜이 나를 향해 말했다.
[말했잖아, 유마는 칭찬을…….]
[고마워요!]
그렇게 외친 유마는 그대로 첸륜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첸륜은 갑작스러운 포옹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나는 첸륜에게 손을 흔들었다.
[좋아 보이네, 두 사람. 그럼 좋은 시간 되라고.]
첸륜은 제게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유마를 보며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유마, 유마를 고장 내 놨어…….]
* * *
해성회의 두 사람과 이야기를 끝낸 나는 치앤츠리앤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는 애들에게 도시락을 사다 바친 치앤츠리앤은 내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본 순간, 나는 가볍게 말을 던졌다.
“그나저나 이번 일, 은월회의 정식 의뢰가 아니었던 거죠?”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그야 간단하다.
“보스의 입김이 닿았더라면, 이런 식으로 복수를 접는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뭐, 이런 중요한 일을 맡긴다면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보스가 이상하기도 했고요.”
내 말에 치앤츠리앤이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은월회의 간부긴 하잖습니까.”
“그래서 개인의 의뢰를 은월회의 의뢰라고 퉁쳤다?”
“죄송합니다.”
“아니, 뭐 상관은 없습니다만.”
치앤츠리앤이 아니었더라도 어차피 해성회에 볼일이 있었던 건 맞으니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무엇인가요?”
“해성회뿐만 아니라, 은월회에서도 마약 사업은 접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말에 치앤츠리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게 돈이 된다는 건 압니다. 나도 초반에 빨대를 꽂아서 같이 먹기도 했고. 근데 말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 마약이라는 거, 정말이지 지긋지긋해져서요.”
마약은 결국 마약이다. 아무리 좋은 마약이라고 하더라도, 아니, 좋은 마약(痲藥)이라는 건 있을 수 없지.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칠 뿐이다. 아예 손을 대지 않는 게 옳다는 거다.
“저 또한 지긋지긋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수익이 비게 되면 그만큼 회는 약해질 겁니다. 약해진 회는 살아남을 수 없을 거고요.”
이른바 필요악이다. 적사회에게 당해 궤멸 직전에 몰렸던 은월회에게는 회를 회복할 만한 자금이 필요했고 마약은 아주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저우샤오첸을 필사적으로 되찾으려고 했던 이유도, 그녀가 환상적인 마약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으니까.
“저희는 저쪽처럼 기반을 다 버리고 떠날 수도 없고요.”
신생 조직이나 다름없는 데다가, 수도 그리 많지 않은 해성회와 달리는 은월회는 그 역사가 꽤 되었다. 민간인들도 상당수 속해 있는 만큼 용병대가 되어 이곳을 훌쩍 떠난다는 선택지도 없다.
“확실히…….”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지 않고 무조건 ‘하지 말라’는 말은 할 수 없지.
“한 번 같이 고민해 보도록 하죠.”
답을 찾아보자.
답이 나오지 않더라도, 은월회에서는 더 이상 마약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할 테지만.
나는 내 속마음을 감춘 채 웃었다.
내가 저번 카지노 사건, 그리고 이번 일로 느낀 건 하나뿐이다.
이제 정말로 ‘마약’에 얽힌 일을 겪기는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