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0화
#79 해성회 (7)
━네놈 말처럼 저놈이랑 지내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지. 게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들이니, 더더욱 다루기 쉬웠을 거고.
확실히 저 애들의 말만 듣고서 판단할 수는 없다.
그래도 말이다.
[그냥, 그냥 우리끼리 행복하고 싶었을 뿐인데…….]
엉엉 울면서 저렇게 말하는 유마라는 여자를 보니, 왠지 싸울 의욕이 들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치앤츠리앤 쪽도 마찬가지인지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서로를 향해 살벌하게 창과 검을 들이댔던 두 사람은 어느새 가만히 서서 유마의 말을 듣고 있었다.
[행복해지고 싶다라, 좋지. 그런데 그 행복이 남한테 폐가 돼서는 안 되잖아? 그러니까 이런 일도 생기는 거야.]
해성회는 본인들의 행복을 위해 나쁜 짓을 많이도 저질렀다. 마약을 유통하고, 죄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을 도박판으로 끌어들이고……. 거기에 어린 애들을 싸움터에 몰아넣기까지 했지.
[유마는!]
[너희는 조용히 해!]
내 윽박지름에 아이들은 입을 닫았다. 어설픈 중국어로 웅얼웅얼 저 여자를 위한 변명을 내뱉는 꼴, 도저히 못 보겠다.
[이건 너희들의 싸움이 아니라고. 너희 같은 꼬맹이들은, 아무런 걱정도 없이 그냥 맛있는 것만 먹고 부른 배를 두드리면서 잠이나 퍼질러 자야 한다고! 이런 데에 싸우러 오는 게 아니라!]
내 말에 아이들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눈빛이 여전히 더러운 걸로 봐서 내 말을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윽박지르니까 무서워서 입을 닫는 것처럼 보였다.
[흐흑, 흐흐흑.]
유마는 계속해서 눈물만 흘려댔고 어린애들은 당장에라도 유마에게 뛰어가고 싶다는 듯이 난리를 피웠다.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다.
이래서야, 이쪽이 그냥 악당 역할 아니냐고! 물론, 난 악당이 맞긴 한데. 그래도 나름대로 남녀노소 중에 소인한테는 제법 친절하단 말이다.
━……남녀노소 중에 소인만 챙기는 거면 그냥 인류 대부분을 싫어한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때,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김재호가 가만히 멈춰 선 남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빈틈!”
━저거 말이다, 누가 봐도 비겁한 기습 아니냐.
‘그러게요.’
다행히(?) 김재호의 검을, 놈은 매끄럽게 피해 냈다. 나는 김재호에게 소리쳤다.
“재호야, 잠깐만!”
“응?”
“멈춰!”
김재호는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일단, 일단 멈춰 봐.”
내 제지에 영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김재호가 다시 그림자로 녹아들었다. 두 사람의 전투는 다시 멈췄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어떡할 거예요?”
마침, 한서현의 질문이 내 귓가를 울렸다.
나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유마라는 여자를 걱정하며, 울부짖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온통 진심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 여자의 목적이 뭐든, 여자는 나름대로 아이들에게 저런 신뢰를 받을 정도로 아이들과의 친분을 쌓아 뒀다는 뜻이겠지.
“일단 애들은 안전한 곳으로 옮겨 둬.”
“음, 지금 애들을 옮기면 잔뜩 원망받을 것 같은데요.”
“그렇다고 여기에 계속 둘 수는 없지.”
내 말에 한서현은 아이들을 다시 모래로 감쌌다. 아이들의 저항이 거셌지만, 그래도 이 싸움터에 아이들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눈앞에서 아이들이 사라지자 유마의 표정이 살벌해졌다. 나는 재빨리 그녀에게 말했다.
[아이들은 해치지 않을 거다.]
내 말에 유마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는? 우리는? 륜과 나는 죽일 거야?]
[아마도?]
내 성의 없는 대답에 유마가 말했다.
[어째서?]
[어째서라니, 답은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말했잖아! 그건 사고라고! 그리고 죽은 건 그 여자뿐만이 아니야. 우리는, 우리 쪽도 세 명이나 죽었다고. 조앤, 야푸, 올레크. 다 그 여자 때문에 죽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복수를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네놈은…….]
유마의 말을 들으니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그래서 그쪽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저우샤오첸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건 알아. 실수를 했다는 것도. 하지만 그쪽은 저우샤오첸에게 실수를 수습할 기회도 주지 않았잖아. 차라리 잘못을 알려 주었더라면…….]
[또 자신을 속였겠지! 그 여자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자기를 속였어. 나는 알아! 내가 봤으니까!]
유마의 말에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애초에 왜 저우샤오첸을 감시했던 건데?]
[그야, 나는, 나느은…….]
유마의 시선이 남자에게로 향했다. 여태까지 굳게 입을 닫고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각성자들에게 적당한 도움을 주었을 뿐이야.]
[그리고 그 도움에는 당연한 대가가 따랐겠지. 예를 들어 너희 회에 들어가는 거라든가.]
범죄 조직인 해성회에서 각성자들을 모은 이유야 뻔하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린애들을 싸움터에 내보내지 않았는가.
내 질문에 남자가 답했다.
[그게 뭐가 나쁘지?]
[진심으로 묻는 소리야?]
[각성자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세상에 이용당하기 마련이야. 어차피 우리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게 우리의 미래라는 거다. 아까 본 아이들은 IMS에게 팔려 나갈 운명이었고, 그걸 내가 구해 줬을 뿐이다.]
[좋은 곳을 찾아 줬어야지.]
[좋은 곳, 어디?]
남자는 내 말에 입꼬리를 올렸다.
[도대체 누굴 믿을 수 있는데? 어제는 웃으면서 나를 보던 사람도, 내일이면 칼을 꽂는 동네야. 그 어린애들에게 무슨 짓을 시킬지 어떻게 알고? 난 그저 그 애들에게 앞으로 살아갈 길을 알려 주려고 했을 뿐이야.]
그 한 마디에, 나는 저 남자가 살아온 삶을 이해해 버렸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수라장을 걸어온 거다.
그렇다고 해도 저건 변명밖에는 안 되지만.
[도움이 필요한 각성자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지, 하지만 저우샤오첸에게는 네놈들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어. 왜냐? 가장 가까이에 그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이미 있었으니까!]
내 말에 남자가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며 속삭였다.
[아하, 사실은 마음속 깊이, 샤오첸을 원망하고 있는 저 ‘언니’라는 사람 말이지?]
그 말에 치앤츠리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 * *
저우린은 눈앞의 치앤츠리앤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 더 하다가는 쓰러지겠어.”
“더 할 수 있어요.”
당장 쓰러질 듯 위태위태한 모습인데도, 치앤츠리앤은 고집을 부렸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는 강박적으로 훈련을 이어 나갔다. 널 위해서 하는 소리다, 이런 말은 귓등으로 듣지 않았다.
본인은 각성자고, 육체 강화계인 만큼 몸을 혹사할수록 이득이라고. 그런 말을 여태까지 몇 번이나 내뱉었지.
저우린은 눈을 감은 채로 어깨를 들썩거렸다.
“안타깝네, 쉬면서 재미있는 얘기나 하나 해 줄까 했는데.”
그 말에 치앤츠리앤의 표정이 변했다.
“무슨 얘기요?”
“우리 조금만 쉴까?”
저우린의 말에 치앤츠리앤은 투덜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늘 강박적으로 훈련을 이어 나가는 그녀였지만, 고작해야 십대 중반. 사실 놀고 싶은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니.
자리에 앉은 저우린이 치앤츠리앤에게 말했다.
“지금은 절영검법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말이야. 처음 우리 조상님이 이 검법을 만들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멋진 이름이 아녔어.”
“처음에는 어땠는데요?”
“듣고서 웃지 마.”
“저도 지금 절영검법을 배우고 있잖아요.”
치앤츠리앤의 말에 후, 하고 숨을 내쉰 저우린이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십보내필살검이었어.”
“진심이에요? 십보내필살검?”
그 직관적인 이름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치앤츠리앤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내게 다가오는 적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지지 않니?”
“그런 이름이었더라면, 배우려는 사람이 지금보다 훨씬 줄었겠어요.”
“나부터 도망가지 않았을까?”
저우린의 농담에 치앤츠리앤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분위기를 탄 저우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그보다 직관적인 이름이 없기는 해.”
벽에 걸린 목검을 손에 잡은 저우린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첫 번째 걸음은 마치 바람처럼 가벼웠다. 그리고 두 번째 걸음은 그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꽃잎처럼 부드러웠다.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저우린의 몸은 바람처럼 움직였다.
처음에는 평범한 성인 여성의 보폭으로 시작했던 걸음은, 어느새 한걸음에 몇 미터는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그 보폭이 넓어져 있었다.
십 보 만에, 저우린은 넓은 훈련장의 절반을 건넜다. 그 사이사이에 놓인 훈련용 인형들은 모조리 옆구리가 베어져 있었다.
저우린의 검을 본 치앤츠리앤의 눈동자가 반짝 빛이 났다.
“내 걸음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일 거야.”
각성자가 아닌 그녀가 이 정도의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이 검을 배우기만 했을 뿐, 제대로 써먹은 적이 없어.”
저우린은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뭐, 검을 뽑을 일이 잘 없기도 했지만, 그런 일이 오더라도 나는 도망쳤어. 검을 뽑는다는 건, 무척이나 두렵고 어려운 일이잖니. 그래서인지 도저히 검을 뽑을 수가 없더라고.”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치앤츠리앤은 망설임 없이 그 사람을 겁쟁이라 매도했을 거다. 하지만 자신의 스승인 저우린은 무척이나 강한 사람이었다. 단순히 겁이 나서 겁을 뽑지 않은 겁쟁이들과는 달랐다.
치앤츠리앤의 얼굴을 바라본 저우린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게 뭔지 아니?”
무어라 치앤츠리앤이 대답하기도 전에 저우린이 말했다.
“뽑았던 검을 다시 집어넣는 일이야.”
저우린이 치앤츠리앤의 얼굴을 보며 속삭였다.
“이 검을 뽑을 일이 없었던 나와는 달리 너는 검을 뽑게 되겠지. 그러지 말라고 내가 부탁한대도 소용없을 일임을 알아. 검을 뽑을 땐 신중해야 해. 하지만 검을 집어넣을 땐, 망설이지 마라. 검을 뽑았다고 뭐라도 썰어야 한다는 놈들은 다 바보 멍청이들이야.”
치앤츠리앤의 가느다란 어깨에 손을 얹으며 저우린이 다정히 속삭였다.
“검을 집어넣을 수만 있다면 언제든 집어넣어.”
툭, 저우린이 치앤츠리앤의 목검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지금 그 검을 집어넣자고. 곧 샤오첸이 돌아올 시간이잖니? 오늘 저녁에는 꼭 돼지볶음을 먹고 싶다고 어찌나 나를 들볶던지. 으응? 이 스승님 살려 주는 셈 치고 조금만 일찍 돌아가자. 아직 장도 안 봤다고.”
조금 전까지의 진지한 모습은 어디 가고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저우린을 본 순간, 치앤츠리앤의 굳은 입가에도 미소가 감돌았다.
그동안은 그저 검술을 배우기 위해 그녀의 곁에 있었을 뿐이지만, 오늘 치앤츠리앤은 가슴 저리게 깨달았다.
아아, 자신은 정말로 이자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 모양이라고.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 싶다고 생각한 저우린은 죽었고, 자신은 그녀의 유언조차 지키지 못했다.
강이신은 치앤츠리앤에게 샤오첸을 납치한 이들에게 복수하자고 말했다.
지키지 못했으니, 복수라도 해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 왜냐하면…….
그래야 자신의 잘못에 잡아먹히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치앤츠리앤은 알고 있었다.
이번 일에는 그녀의 잘못도 분명히 있다는 것을.
저우린의 죽음으로 저우샤오첸을 원망하고, 그녀를 살피지 않은 것도, 샤오첸의 앞에서는 그녀를 챙기는 체하다가도 한순간, 그녀를 향한 원망이 비죽 틀어막은 상처 사이로 흘러나왔다는 것을.
남자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치앤츠리앤은 그 일로 저우샤오첸을 용서한 일이 없다.
그런 주제에 복수를 말했다.
‘아아, 스승님.’
제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며 치앤츠리앤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에게는 이 검을 휘두를 자격이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