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8화
#79 해성회 (5)
아시아계로 보이는 성별을 알 수 없는 더벅머리 꼬맹이가 한 명, 긴 갈색 머리를 내려뜨린 여자애가 하나, 그리고 그 뒤에도 뭉쳐 있는 세 명. 총 다섯 명의 꼬맹이가 우리의 앞에 나타났다.
이 꼬맹이들의 리더로 보이는 녀석은 앞머리를 덥수룩하게 가린 더벅머리의 꼬맹이였는데, 꼭 한서현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저런 우울한 분위기에 더벅머리는 흔치 않단 말이지. 정말로 다시 살펴봐도 한서현과 판박이다.
“쟤 너랑 닮지 않았어?”
“지금 그런 소리를 할 때예요? 그리고 말이죠, 하나도 안 닮았거든요?”
한서현 본인은 안타깝게도 그렇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쩝, 멋쩍음에 시선을 돌린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다시 꼬맹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듣고 이 자리에 섰는지는 모르겠지만, 건물 밖으로 튀어나온 녀석들은 우리를 원수 보듯이 바라봤다.
겁에 질린 듯 몸을 떨어대면서도 우리의 앞을 막아선 꼬맹이들의 얼굴에는 사생결단의 태도까지 엿보였다.
무슨 말을 해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지만, 그래도 일단은 말로 설득을 해 볼까나.
어떤 언어를 내뱉어야 할지도 고민이 될 정도로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었지만, 중국 땅에서는 중국말을 써야 하는 법.
[우리는 너희를 해칠 생각이 없어. 그러니까 순순히 비켜 주면, 별일 없을 거야. 우리가 여기에 온 건, 너희를 여기에 잡아 온 나쁜 사람한테 볼 일이 있어서니까.]
하지만 내 말에도 대답은 없었다. 혹시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건가 싶었지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녀석들의 마력이 요동치는 걸 보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너희도 여기에 원해서 있는 건 아니잖아. 으응? 억지로 잡혀 온 거 아니었어?]
나는 안타까움에 그렇게 말해 보았지만, 녀석들의 반응은 더욱 사나워지기만 했다. 구해 주러 왔다는 말에 되레 역정을 내다니.
‘세뇌일까?’
아니, 내가 모르는 S급의 세뇌 능력자가 또 한 명이 있는 게 아니라면 저 반응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 설록진 또한 저렇게 여러 명에게 자연스러운 세뇌를 걸 순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자신을 납치한 자들에게 속은 거죠.’
아직 나이가 어린 만큼, 속이기도 쉬웠을 거다. 너희를 위해서 너희를 데리고 온 거야. 나쁜 사람이 우리를 노리고 있어. 그 사람들에게 잡혀가면 너희는 정말 끔찍한 곳으로 가게 될 거야…….
그런 말로도 얼마든지 속여 넘길 수 있을 정도로 눈앞의 어린애들은 순진하니까.
그러니까 필사적으로 우리를 막아선 거겠지.
최악이다.
나는 녀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딱 한 번만 물을게. 너희를 여기에 데리고 온 사람은 어디에 있어?]
내 질문에 날아든 건, 마력의 덩어리였다. 나는 슬쩍 고개를 숙여 더벅머리가 쏘아 낸 투명한 마력을 피해 냈다. 마력에 민감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속절없이 당했을 거다.
더벅머리 꼬맹이는 바람을 다룰 수 있는 것 같았다. 수북하게 덮인 앞머리 너머 푸른 빛이 일렁였다.
더벅머리의 선공을 시작으로, 소심하게 서 있던 녀석들의 동공도 일제히 빛나기 시작했다.
“이런.”
녀석들을 설득해 전투 없이 이곳을 돌파하겠다는 내 계획은 상큼하게 실패해 버렸다.
어쩔 수 없이, 이제부터 전투인가. 더벅머리 녀석이 무어라 소리를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몸 주변으로 거칠게 마력이 뽑혀 나와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나는 그 바람을 실드로 막으며 뒤로 걸음을 옮겼다.
“이거 곤란하네.”
나는 검을 뽑으려는 치앤츠리앤에게 소리쳤다.
“잠깐만요!”
“하지만…….”
“저희가 상대하겠습니다.”
치앤츠리앤의 무기는 ‘검’. 뽑는 순간 유혈사태가 예고된 무기다. 칼로 살살 친다고 안 아플 리가 있겠냐고. 그러니까 치앤츠리앤은 이번 전투에서 빠져야만 한다.
“일단은, 사살이 아니라 제압이 목표다.”
지금 우리의 전력은 네 명.
전열에서 탱커 역할을 할 수 있는 에드워드, 중열에서 전열에서 부족한 화력을 담당하고, 후열을 지킬 수 있는 역할의 나. 후열에서 막강한 화력으로 우리를 보조할 수 있는 한서현.
마지막으로 그림자에 숨어 적의 뒤를 칠 수 있는 김재호.
[에디, 일단 앞에서 날아드는 마력을 처리해 줘. 그리고 송진이를 부탁한다.]
차송진에게는 전투 능력이 전혀 없으니 말이지.
내 말에 에드워드는 눈을 크게 뜬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무어라 한서현에게 지시를 날리려 할 때였다.
꼬맹이들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바람을 날리는 게 나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더벅머리는 재빨리 목표를 바꿔 차송진에게 마력을 날리기 시작했다.
우리 팀의 구멍을 바로 파악하다니.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놈인데.
━그야, 혼자 어리바리를 떨고 있으니 그렇겠지.
‘……훈련을 더 시켜야겠습니다.’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저리 벌벌 떨다니.
다행히 더벅머리가 날린 마력은 에드워드가 흡수했다. 연달아 자신의 능력이 무효화되자 더벅머리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 녀석의 뒤를 이어 우리에게 날아든 것은 날카로운 가시였다. 나는 손으로 가시를 잡아챘다.
“뭔데, 이거.”
하지만 투명한 데다가 속도가 빨라 반응하는 것이 어려웠던 더벅머리의 가시와는 달리, 갈색 머리 여자애가 날린 이 가시는 너무나도 느렸다.
그러니까 훈련된 각성자 기준으로, 느렸다는 뜻이다.
치앤츠리앤은 가볍게 검을 뽑아 가시를 모두 쳐냈고 한서현 또한 검은 모래로 자신에게 날아드는 가시를 가볍게 막았다.
에드워드는 위치에너지를 흡수해 아예 가시를 가라앉게 했고, 그림자에 숨은 김재호는……. 글쎄, 아직 김재호의 정체를 눈치챈 꼬맹이는 없어 보였다.
그 뒤로도 몇 번 우리를 향한 공격이 날아들긴 했지만…….
“이게 전부인가?”
그래, 그런 말이 나올 정도로 시시한 공격들 뿐이었다. 미숙한 각성자로는 우리를 상대할 수 없다. 우리가 저 꼬맹이들을 해칠 수 없다는 페널티를 안고 있다고 해도 그렇다.
겨우 이런 꼬맹이들한테 당하려고 그 모진 수련을 견뎌 낸 게 아니라고.
꼬맹이들은 우리의 능력에 점차 절망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꾹 다문 입술과 흰 마디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꽉 쥔 손을 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시간을 더 길게 끌어 봤자 괴로워지는 건 저 녀석들뿐이라고.
“서현아, 부탁하마.”
“하여간, 어린애들만 보면 마음이 약해져서는.”
그렇게 혀를 찬 한서현이 스태프를 두 손으로 잡았다. 그와 동시에 한서현의 주변으로 엄청난 마력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던 검은 모래가 순식간에 압축되어 우리의 근처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우리의 주변을 제외한 곳에는 모두 이 모래가 만들어 낸 거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한서현은 사막에서나 볼 법한 자연재해를 그대로 재현했다.
저 정도 규모의 모래를 제 지배력에 넣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나오는데, 빠르게 모래를 움직여 바람을 일으키고 그 바람으로 토네이도를 만들어 낼 정도라니.
말도 안 되는 마력 운용력이었다.
더 무서운 건 한서현의 주 종목은 네크로맨서라는 거였다. 앞으로 더 좋은 재료를 수급하고, 제대로 된 언데드들을 뽑아내기 시작하면 얼마나 더 강해질지 감도 오지 않았다.
‘저 꼬맹이들도 안 됐네요. 나름 저 나이대에서는 엄청나게 강할 것 같은데, 하필이면 상대가 우주최강제너럴대마도사 한서현이라니.’
여러 개의 작은 토네이도로 갈라진 모래들은 아이들 하나하나를 띄워 그대로 감싸기 시작했다. 마치 모래로 만들어진 고치 같은 모양새에 차송진이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저거 괜찮은 거야?”
“응, 괜찮아.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
한서현의 말에 차송진이 소리가 날 정도로 붕붕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감히 너를?”
허심탄회한 대화 이후 더는 한서현을 무서워하지 않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새삼 다시 보니 경외심이 느껴지는 모양이군.
모래 안에 갇힌 꼬맹이들이 반항하는 건지 모래가 꿈틀거리기도 하고, 모래 안에서 번쩍번쩍 빛이 나기도 했지만, 고치가 풀리는 일은 없었다.
“일단은 저렇게 묶어 둘게요.”
“버틸 수 있겠어?”
“예, 하루 종일도 버틸 수 있으니까 내 걱정은 말아요. 저 애들을 보낸 나쁜 놈을 찾는 게 먼저잖아요?”
“그래.”
저우샤오첸을 납치하고, 저 꼬맹이들까지 납치하고서는 저 어린 애들 뒤에 숨은 비겁자.
[슬슬 나오시지.]
아까부터 주변이 따끔따끔할 정도로 적대적인 마력이 느껴졌었다. 아이들이 고치에 들어간 다음부터 그 정도는 더욱 심해져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이 말이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건물의 창문에서 누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황색 머리를 길게 뒤로 땋아 내린 여자의 동공은 이미 빨갛게 불타고 있었다.
[애들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건물을 박차고 나온 여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진작 나왔으면 좋았잖아. 애들 뒤에 숨다니, 정말로 비겁한 짓이었어.]
주변의 마력이 진동했다. 공중에 떠돌던 물 입자가 한곳으로 뭉쳐졌다. 과연 자연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엄청난 컨트롤이었다.
나는 내가 서 있던 자리에 날아드는 물줄기를 피해 바로 몸을 굴렀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분명히 강력한 재능을 지녔다. 하지만 말이다.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나는 마력을 뽑아 손끝으로 보냈다. 나에게 날아들던 물줄기는 공중에서 그대로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하하, 나한테 물을 보내면 말이지, 죄다 얼려 버리면 그만…….”
[끄아아악!]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여자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자지러졌다.
“어라라?”
나는 눈을 깜빡였다.
“지금 내 마력이 저 여자한테 닿았나?”
내 질문에 한서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데 왜, 왜 저러는 거지?”
마치 내 공격을 직접 몸으로 받은 것처럼 여자는 고통스러워했다. 뭐지? 저 정도로 고통스러운 공격을 하지는 않았는데? 여자의 몸은 마치 내 마력을 직접 받은 것처럼 군데군데가 퍼렇게 얼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시 고개를 든 여자의 얼굴은 눈과 코, 입에서 흐른 피로 엉망진창이었다.
“허억!”
차송진이 놀라 그렇게 외쳤을 정도고, 나 또한 놀라서 멈칫했을 정도다.
[아파, 너무, 너무, 아파…….]
여자는 울먹거리며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뭔가 이상한데요.’
[하지만 용서 못, 해, 애들을, 우리 애들을…….]
여자의 말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마치 저 말은 애들을 아끼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에.
[저기 말이야. 애들은…….]
애들은 괜찮을 거다. 그렇게 말하려 했을 때였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무언가 온다. 방향은 서쪽. 나는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조심해!]
에드워드의 외침, 그리고 아까부터 두근거리기 시작한 심장, 찌릿찌릿 나에게 적대감을 보이는 마력들. 나는 곧바로 실드를 올렸다. 위력은 3획. 내 마력의 절반을 쏟아부었다.
“크윽!”
그리고 ‘그게’ 왔다. 먼 하늘에서부터 나에게 날아든 창은, 에드워드가 반응할 새도 없이 내 몸을, 아니, 내가 펼친 실드를 부수고 내 어깨를 스쳤다.
스친 것만으로도, 어깨가 박살이 났다.
땅바닥에 박힌 창의 위력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주변 반경의 도로가 깨지고 부서져 움푹 파인 원이 만들어졌을 정도다.
“보스!”
나는 내게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손을 뻗어 막았다.
[유마, 내가 말했잖아. 가만히 있으라고.]
번쩍, 하늘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태양을 등지고 선 장발의 남자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쉽네, 어깨가 아니라 머리를 노린 건데.]
마치 깊은 심연처럼 검푸르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남자다.
해성회의 보스라는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