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0화
#77 꿈에서 깨야 할 때 (7)
말이 통하지 않는 절대자를 상대하며 살아남는 방법을 구하시오.
음, 적어도 내가 하는 방법은 절대로 정답이 아닐 거다. 나는 피가 뚝뚝 흐르는 허벅지를 움켜잡았다.
“크윽.”
이 상처는 컸다. 이미 마력으로 온몸에 난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지만, 초회복은 만능이 아니다.
“정말이지, 사기 아니냐고.”
풀숲에 뚝뚝 내 피가 떨어졌다. 하지만 내 피는 풀숲을 붉게 물들이는 대신 나비가 되어 날아갔다.
하, 그 장면을 보며 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내 피는 더럽다는 거냐…….”
이 공간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이미 이 싸움의 답은 나와 있었다.
‘여기는 저쪽의 나와바리잖아요, 저 같은 외부인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죠.’
이 세상은 문자 그대로 저우샤오첸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이 공간 안에서 저우샤오첸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물리 법칙을 무시하고 날아드는 마력장은, 정말이지 피할 새가 없었다. 사방팔방에서 날아드는 마력장을 여태까지 피한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지치니, 따라잡히는 건 금방이었다.
아무리 마력으로 몸의 움직임을 보조해도 결국 본체가 지쳐 버리면 말짱 꽝이다.
‘그러니까 초회복인 주제에 왜 체력은 회복이 되지 않냐고요.’
━무슨 초회복이 무한 동력의 엔진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어디까지나 네 몸에 깃든 에너지를 돌려서 상처를 틀어막는 거래도!
“허억, 허억…….”
이제는 농담에 대꾸할 힘도 없다. 이젠 정말 꼼짝할 힘도 없다. 나는 앞으로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젠장, 이런 돈도 안 되는 일에 나서는 게 아니었는데.”
설록진하고 싸우다가 죽는 것도 아니고, 여기에서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다고? 말도 안 되지. 나는 누가 죽여도 죽을 수 없는 몸이다. 암, 절대로 순순히 죽을 수 없다고.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
어떻게든 입이라도 털어 보는 수밖에.
━입을 턴다고?
‘뭐, 그게 결국 제 능력이잖습니까.’
급할 때엔, 내 입담이라도 믿어 볼 수밖에. 다행히 지쳐서 고꾸라져 죽을 지경이라도 말이다, 입을 움직일 힘은 있거든.
[첸첸.]
내 말에 저우샤오첸이 얼굴을 구겼다.
[그렇게 나를 부르지 마.]
[미안, 이 애칭은 별론가.]
[우리 엄마만, 나를 그렇게 불렀어!]
━좋아, 두 마디 만에 저쪽을 엄청나게 열받게 만들었구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거 좋지 않은데. 아니, 그래도 대화를 받아 줬다는 데서 희망을 봐야 할지도.
[나는 내 꿈속에 너 같은 걸 만들지 않았어. 그러니까 사라지라고…….]
내 앞에 마력이 뭉쳐지는 게 느껴졌다. 오, 저걸 맞았다간 정말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맞아, 여긴 원래 나를 위한 공간이 아니지. 누구를 위한 공간이더라, 어, 그러니까 네 어머니?]
[……맞아. 우리 엄마랑 나를 위한 공간이야.]
어머니를 떠올리는 듯, 저우샤오첸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 틈을 틈타 나는 어깨를 추욱 늘어트리며 말했다.
[이 소중한 공간에 들어오게 돼서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말이야, 나도 그냥 길을 잃은 거거든.]
[길을 잃어?]
[그래, 나는 그냥 이곳을 지나가던 중이었거든.]
그러니까 제발 나를 여기서 내보내 줬으면 좋겠는데.
━그냥 네 놈만 도망치려는 거냐!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해 주실래요.’
━한 백 보 후퇴쯤 될 것 같다만.
하지만 내 부탁에 대한 대답은 이랬다.
[싫어.]
[어, 그래, 싫구나.]
이렇게 이곳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완전히 막혀 버렸다. 나는 허벅지를 꽉 쥐었다. 아직도 피가 뚝뚝 흐르는 내 허벅지를 바라보며 저우샤오첸이 눈을 구겼다.
[아파?]
[그래.]
[어째서? 꿈에서는 아프지 않은데.]
그녀는 내 상처를 노려보았지만, 그런다고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 공간 안에서는 거의 신과 같은 저우샤오첸이었지만 그녀 또한 내 상처가 사라지게 만들지는 못했다.
나는 저우샤오첸을 향해 말했다.
[사실은 알고 있지, 여기가 꿈이 아니라는 것.]
저우샤오첸은 내 말에 몸을 움찔 떨었다. 고개를 저은 저우샤오첸이 말했다.
[아니, 이건 모두 꿈이야.]
[꿈이 아니야.]
[닥쳐!]
그녀의 외침이 가시가 되어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피에 젖은 뺨을 무시한 채로 입을 열었다.
[잘 기억해 봐, 네가 여기에 어떻게 오게 됐는지.]
도망치는 게 불가능해졌다면, 남은 건 정면 돌파다.
잠에서 깬 지 오래임에도 여전히 저우샤오첸은 현실과 꿈을 착각하고 있었다. 그녀를 다시 현실로 불러낼 수만 있다면, 이 환상을 모두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이는 저우샤오첸을 향해 말했다.
[어떤 사람들이 갑자기 연구실로 들이닥쳤을 거야.]
[맞아.]
[그리고 너를 납치했겠지.]
[으응.]
천천히. 내 말에 저우샤오첸의 고개가 천천히 밑으로 숙여졌다.
[놈들은 너를 재웠어. 그래서 끝도 없는 꿈에 빠져든 거야. 하지만 너는 그 꿈에서 깨어났어. 주변을 봐, 이곳은 꿈이 아니야.]
저우샤오첸이 변하게 만든 건 블록 두 개 정도의 공간이었다. 여전히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면 빌딩 숲이 보였다. 검은 연기가 잔뜩 퍼져서 그리 예쁜 그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환상에서 저우샤오첸을 꺼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해 봐야 했다.
[꿈, 이, 아, 니, 야.]
저우샤오첸의 목소리가 섬뜩했다.
━무언가 잘못됐다.
[꿈이 아니야, 꿈이 아니야, 꿈이…….]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꿈이 아니면 좋은 거잖아! 이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지금도 당신이 구출되길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없어.]
천천히 저우샤오첸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에 젖어 있었다.
[없어, 없다고, 없어, 나한테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왜, 왜 저러는 거냐?
‘저라고 압니까?’
나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발악에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잠시 쉬었다고 몸을 움직일 힘이 생겨 있었다.
[일단, 진정하고…….]
[내가 엄마를 죽였어. 언니는 나를 미워해, 미워할 거야. 나, 나는 거짓말을 했어, 또, 또…….]
“이런.”
━네가 마지막 버튼을 눌러 버린 모양인데.
나는 몸의 남은 마력을 짜내 앞으로 쏘아 냈다. 내 몸이 뒤로 확 쏠렸다. 그와 동시에 내가 서 있던 공간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꽃이 가득 피어 있었던 풀밭은 순식간에 거무죽죽하게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젠장, 환상에서 현실을 자각하게 했을 뿐인데 이게 무슨 일이지?
그때 하늘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를 향해 빠르게 거리를 좁히는 게 보였다.
“저건…….”
━젠장! 눈물이 나게 반갑구나!
한서현의 독수리였다.
레이의 말대로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걱정이 되었다.
‘여기로 오면 안 됩니다, 여긴 곧 폭발할 테니까요!’
내가 그토록 막으려고 했던, 마력 폭발이 일어날 거다. 이 주변에 남아 있는 마력이 모두 폭발한다면, 오, 글쎄. 이번에는 에드워드가 한 천 명쯤 있어도 흡수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폭발이 될 거다.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는 한서현을 향해 도망치라고 손을 흔들었다.
“가! 도망치라고!”
━그런다고 잘도 도망가겠다.
‘그래도 여기로 오라고 할 순 없지 않습니까!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고요!’
━그러니까 더더욱 너를 구하려고 하겠지!
‘날 구하겠다고 다 죽으면 그게 무슨…….’
레이에게 말을 하던 중에 내 몸이 누군가에 의해 뒤로 넘어졌다. 내 몸이 있었던 곳을 저우샤오첸의 마력이 뚫고 지나갔다. 뒤로 넘어진 나는 그 마력을 보며 숨을 헉 들이마셨다. 정신이 팔려서 하마터면 몸에 구멍 하나를 더 달고 살 뻔했다.
“재호?”
내 몸을 옆으로 넘어트려 나를 구한 건 김재호였다. 언제 여기까지 왔대?
“지금 저 독수리에서 여기까지 순간 이동한 거냐?”
“응, 뛰어내린 다음에 이 그림자로 왔다.”
“미친…….”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한 건가.
“고맙다고 해야지, 왜 욕을 해.”
김재호의 말에 나는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고맙다, 근데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알아, 저 위에서 폭발할 거라고 막 뭐라고 했다. 빨리 보스 주워서 가야 돼.”
“날 주워서 간다고?”
그때 머릿속에 스치는 사람이 있었다.
“에드워드! 걔도 주워 가야 해.”
“어딨는데.”
“그게…….”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서현이한테 물어보자.”
“아, 응.”
김재호는 나를 어깨에 둘러메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 이게, 이게 최선!”
김재호는 등에 메고 있던 검으로 나를 가로막던 마력장을 무식하게 부쉈다.
정말이지 ‘무식하다’라는 말밖에는 통하지 않을 방법이었지만, 다행히 통했다. 풀밭 밖으로 나온 나와 달리, 검은 독수리는 풀밭 위를 날았다.
“뭐 해! 당장 나와야 한다니까!”
“여자가 저기로 간댔어.”
“여자? 누구?”
“……그 여자.”
김재호의 말에 나는 김재호의 머리를 붙잡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내 손 아래에서 김재호가 죽겠다는 소리를 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게 왜 사람을 어깨에 이렇게 짐짝처럼 짊어 메서는.
뒤의 장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검은 독수리에서 한 사람이 풀밭으로 내렸다는 거다. 한 사람을 내려놓은 뒤 독수리는 재빨리 나와 김재호가 서 있는 곳으로 날아들었다.
“보스!”
“서현아!”
나는 한서현을 보자마자 소리쳤다.
“빨리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 곧, 곧 마력이 폭발할 거야!”
“알아요, 저희도.”
“알아?”
“그걸 해결하려고 왔으니까요.”
“해결하다니, 뭘 어떻게?”
지금 이 방법을 해결할 방법은 없다.
“……자길 믿어 달라고 했어요.”
한서현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여자요. 거짓말을 한 죄를 갚을 테니 딱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했어요.”
* * *
치앤츠리앤은 눈앞에 있는 저우샤오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그녀를 찾았다.
“샤오첸.”
“……언니.”
이미 저우샤오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피부는 곧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었고, 눈동자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막아 두었던 기억을 자각하는 것으로, 그녀는 자신의 마력에 대한 모든 통제권을 잃었다.
왜냐, 모든 상황을 통제 가능하다는 것 또한 그녀의 환상이었으므로.
완벽했던 꿈은 꿈일 뿐.
이제는 꿈에서 깰 때였다.
“미안해. 나느, 나느은…….”
천천히 치앤츠리앤은 저우샤오첸에게 다가갔다.
“나야말로 미안해.”
치앤츠리앤은 알고 있었다.
저우샤오첸을 편안하게 해 줄 방법은 이제 하나뿐이라는 걸.
“커억.”
치앤츠리앤의 등에 메여 있던 검은 저우샤오첸의 심장을 꿰뚫었다. 재빨리 치앤츠리앤은 앞으로 쓰러지는 저우샤오첸의 몸을 받아들었다.
“언니…….”
제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바라보며 저우샤오첸이 눈을 깜빡거렸다. 치앤츠리앤은 그녀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눈물을 흘렸다.
“정말 미안해.”
쿨럭, 저우샤오첸은 피를 내뱉었다. 고개를 저은 저우샤오첸이 말했다.
“아니야, 고마워.”
저우샤오첸은 치앤츠리앤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며 저우샤오첸은 그녀의 얼굴을 눈에 가득 담았다. 엉망으로 구겨져 눈물이 뚝뚝 흐르는 얼굴을 바라보며 저우샤오첸이 말했다.
“언니여서, 고마워.”
이런 짓을 저질러서 미안하다고, 거짓말로 속여서 미안하다고. 전부, 미안하다고. 그럼에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맙다고. 이런 마지막이라서 미안하다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를 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이래서구나.”
곧 끊길 듯이 약해진 목소리로 저우샤오첸이 말했다.
“엄마가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던 거. 언니, 미안해하지 마…….”
그 말을 끝으로 저우샤오첸의 고개가 꺾였다. 치앤츠리앤은 울면서 그녀의 몸을 꽉 움켜쥐었다.
그것으로 지닝시의 악몽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