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7화
#77 꿈에서 깨야 할 때 (4)
마력에 둘러싸인 건물은 10층짜리 호텔이었다. 마력장의 중심점으로 보이는 곳은 그중에서도 5층쯤, 아마도 객실 중 한 군데에 머물고 있었던 거겠지.
‘사람을 납치한 주제에 호텔에서 머물고, 간이 참 큰 놈들 아닙니까?’
━지금 그런 소리나 할 때냐!
확실히 레이가 이런 소리를 할 정도로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이 건물이 마력장의 중심점이라는 걸 알려 주는 것처럼, 이곳에는 바깥쪽에 퍼진 마력장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짙은 농도의 마나가 퍼져 있었다.
일반인은 조금만 머물러도 바로 마나 중독 증상을 일으킬 정도였다. 실제로 이곳까지 오면서 본 행인들의 얼굴은 이미 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제 와서 마력장을 걷어 낸다고 하더라도, 한조희 때처럼 이미 소생 불가능한 상태겠지.
나는 그 사람들을 지나쳐 호텔의 입구로 들어갔다. 바닥에 쓰러진 호텔 직원들과 손님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가야 하는 곳은 5층, 엘리베이터가 눈에 들어왔지만 나는 대신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런 상황에 엘리베이터를 타는 건 자살 행위다. 이런 고농도의 마나에서는 기계들이 오작동을 일으킬 확률이 높았으니까.
‘그래도 5층이라서 다행이네요.’
말이 5층이지, 중력처럼 내 어깨를 짓누르는 마력장 안에서 계단을 오르는 건 쉽지 않았다.
‘후욱, 후욱.’
마력 없이 움직이면 바로 이렇게 숨이 찰 정도다. 나는 마나를 끌어올려 몸을 강화했다.
마나석을 넉넉하게 챙겨 오긴 했지만, 이런 사소한 움직임에도 마나가 소모될 정도라니.
‘정말 이게 단 한 사람의 마력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는데요.’
우리가 호주에서 상대했던 몬스터인 예브리카도 이 정도의 마력을 뿜어내지는 못했다. SS급 몬스터보다 더욱 강하다니.
‘아무래도 이상해요.’
나는 전생에 저우샤오첸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미래가 바뀌었다고 해도, 이렇게 마력을 뿜어낼 수 있는 각성자가 그전에는 아무런 두각도 나타내지 않았다고?
‘물론 제 덕분에 은월회가 살아남으면서, 미래가 바뀐 것 같기는 하지만 너무 극단적이지 않습니까?’
━상황도 극단적이긴 하지, 전에는 이런 납치 소동이 없었을 게 아니냐.
‘으음,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해성회가 이렇게 세력을 뻗칠 수 있었던 것도 적사회가 사라졌기 때문이니까. 그래도 저우샤오첸이라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게 이상하긴 하지만, 아. 과거에는 쑤어하오주의 파워 펀치에 그대로 당했으려나? 음, 끔찍하지만 충분히 실현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쑤어하오주의 파워 펀치는 휘두르는 범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그야말로 가루로 만들 수 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파워 펀치’라는 이름으로 대충 퉁칠 기술이 아닐 것 같은데.
‘크흠. 뭐, 대충 그렇다고 치자고요.’
치앤츠리앤과 저우샤오첸은 꽤나 막역한 사이 같아 보였으니, 어쩌면 그녀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섰다가 쑤어하오주에게 살해당했을지도 모르지. 아무리 적사회라고 하더라도 빼먹을 게 있는 연구동을 통째로 날리는 판단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미래가 바뀌어서 살아남긴 했는데, 오히려 그게 이 사건을 불러일으켰다는 거네요.’
지닝시에서 이토록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게 된 데에는 결국, 내 잘못도 있다는 뜻이다.
━이건 네 잘못이 아니다, 물론 네 놈이 맨날 나쁜 짓을 저지르고 다닌 건 맞지만! 이걸 네 잘못이라고 하면 안 되지.
‘제가 아니었다면, 죽지 않았을 사람들이긴 하죠.’
━그거야…….
새삼 죄책감에 짓이겨질 생각은 없다. 이미 내 손에는 수많은 피가 묻어 있었으므로. 다만, 잊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다.
그리고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떻게든 담아 보려 노력할 뿐이다.
레이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5층이었다. 복도에 쓰러져 있는 청소 직원을 지나쳐 나는 마력이 가장 짙게 느껴지는 방 앞에 섰다. 마력을 끌어올린 나는 그곳의 문을 통째로 뜯어냈다.
그리고 안에서, 나는 이 모든 일을 저지른 이의 정체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총 네 명이었다. 저우샤오첸은 그 가운데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로 있었다.
두 눈을 감은 그녀의 몸에서 짙은 마력이 흘러나와 앞에 놓인 세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멀쩡해 보이는 저우샤오첸과는 달리 그녀의 앞에 놓인 세 사람의 상태는 그렇지 못했다.
━이 정도의 마력을 방출한다면 멀쩡할 수가 없다고 말했지. 미라나 다름없는 꼴이 될 거라고.
‘네, 그랬죠.’
내가 했던 말대로 저우샤오첸의 앞에 놓인 세 사람의 꼴은 살아 있는 미라와 같았다. 살가죽이 뼈에 바짝 붙은, 생명력이라곤 단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은 세 사람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들은 저우샤오첸의 능력은 ‘환상’.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지나쳐 온 사람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졌을 뿐, 환상을 보는 것 같지 않았다.
‘저우샤오첸이 만든 약의 이름이 메이멍이라서 환상으로 다른 이들을 잠들게 했거니 했지만, 아니었던 겁니다.’
사람들을 재웠던 것은 저 세 사람 중 한 명의 능력일 거다. 저우샤오첸은 저 세 사람의 마력을 갈취해서 퍼트렸고…….
“젠장.”
저우샤오첸은 여전히 멀쩡했다. 차라리 마력이 모두 빠져나간 상황이었더라면, 그녀를 제압하는 것이 훨씬 쉬웠겠지만…….
━함부로 자극하면 큰일이 날 것 같은데 말이다.
‘예.’
조심스럽게 접근해서 마력의 연결부터 끊어야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를 공격했다가 마력이 폭주하기라도 하면, 이 근처는 모두 날아가 버릴 테니까. 이 정도의 마력이면 거대한 폭탄이 터진 것과 비슷한 꼴이 될 거다.
‘꼭 시한폭탄을 해체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나는 조심스럽게 저우샤오첸에게 접근했다. 저우샤오첸은 깊게 잠들어 있었다. 그녀와 다른 세 사람의 연결은 단단했다.
‘저 사람들이 무슨 능력을 가졌는지, 읽을 수 있겠습니까?’
━흐음, 가드가 모두 내려간 상태라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저 녀석들 쪽으로 마력을 접근시켜 볼 수 있겠냐.
‘일단 제가 죽지 않으면요.’
나는 조심스럽게 앞쪽으로 손을 뻗었다. 내가 뻗은 마력이 조심스레 세 사람 사이의 연결부를 파고들었다. 나는 실드를 치며 혹시 모를 공격을 대비했지만, 다행히 내 쪽으로 공격이 날아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레이의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네 놈의 예상대로 사람들을 재운 건, 저기에 있는 남자의 능력이다. 저우샤오첸의 환상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어.
‘끄응.’
━그리고 안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다.
‘하나 더요?’
━저 남자의 능력에 취한 건 바깥에 있는 사람들뿐만이 아니야, 저우샤오첸도 마찬가지다.
‘예?’
━꿈을 꾸고 있단 말이다.
* * *
“도대체!”
차송진은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한서현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입을 닫고 있던 한서현이 잔뜩 열이 받은 얼굴로 바닥을 걷어차고 있었다.
“이럴 거면 왜 따라간다고 말해서는!”
“무, 무슨 일인데?”
“하아.”
차송진의 질문에 한서현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차송진은 한서현의 옆에 앉아 물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냐니까?”
강이신과 에드워드를 안쪽으로 보낸 뒤, 초조하게 그들이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던 차송진에게는 어떻게든 안쪽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한서현의 말 한마디가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 자식이 보스를 버리고 혼자 가 버렸어.”
“뭐?”
차송진은 그 말에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에드워드가 강이신을 버렸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차송진은 한서현에게 붙어 물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데.”
“나였으면 절대로 보스 안 버렸을 거야. 애초에 왜 그 녀석만 데리고 가서는, 역시 믿음직스럽지가 못했다니까.”
“에드워드가 이신이를, 그러니까 보스를 버렸다고?”
한서현이 한 말은 그랬지만, 쉽사리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에드워드가 정식 벨츠머츠가 아닌 건 사실이다. 그런 만큼 강이신을 세 사람만큼 따르지 않는 것도 맞다. 그렇다고 해도 에드워드가 강이신을 버리는 장면만큼은 쉽사리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그동안 같이 먹은 밥이 몇 끼고, 같이 했던 일들이 얼마인데! 강이신을 버리고 저 살자고 도망갈 만큼 에드워드가 형편없는 사람이었나?
‘물, 물론 남의 먹을 걸 홀랑 먼저 먹는다든가, 우리한테 영어를 가르칠 때마다 뭔가 한심한 사람을 보듯이 무시하는 경향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버리고 도망칠 정도로 나쁜 놈은 아니, 아니…….
“어떻게 우리를 버릴 수 있어!”
차송진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러니까!”
한참이나 씩씩거리던 한서현이 말했다.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보스를 혼자 보내다니, 그러면 안 되지.”
“으응? 사람을 구하려고, 어, 그러니까 그래서 보스랑 떨어졌다고?”
“응. 상황이 그래도 말이야, 보스랑 같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
그제야 차송진은 한서현에게서 제대로 된 상황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목적지로 가던 중에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발견한 에드워드가 따로 단독 행동을 하게 된 거라고.
“어, 그럼 잘한 거 아닌가?”
차송진의 말에 한서현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그래!”
한서현은 제게 그렇게 되묻는 차송진이 답답하다는 듯이 얼굴을 구겼다.
“보스가 저 안으로 간 건, 여기에 있는 사람들 전부를 구하기 위해서잖아. 당장 눈앞에 있는 사람들 몇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혹여 그런 생각이 들었더라도 보스가 명령하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말아야지.”
“어…….”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는 차송진에게 한서현이 말했다.
“나였으면, 무슨 일이든 보스 명령에 따랐을 거야. 보스를 믿고 저 안으로 들어간 순간, 모든 판단은 보스가 해야 한다고.”
왜냐? 강이신은 리더니까. 그들을 이끌고 있는 리더니까. 강이신 또한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을 구하다간, 모두를 구할 수 없었기에 희생하기로 한 거지.
“자기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결국 보스를 그곳까지 혼자 보낸 거잖아. 보스한테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어떡해?”
“어, 그야…….”
“보스의 판단을 믿지 않고 혼자서 행동할 거라면, 저기까지는 왜 따라간 거냐고!”
차송진은 그 원망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확실히 눈앞에 있는 사람을 구하겠다는 에드워드의 마음은 이해가 갔다. 하지만 한서현의 원망도 이해가 됐다.
처음 들었을 때는 영 아닌 것 같아도, 강이신은 언제나 그들을 위해 최선을 제시했다. 그 최선이라는 게 늘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았어도, 강이신은 그 결과까지 책임지기 위해 늘 노력했다.
그러고 나서 늘 말하지.
‘이건 내 선택이었어, 그러니까 네가 마음 쓸 필요는 없어.’
차송진이 그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한서현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저 녀석은 우리가 아닌 거야.”
단순히 말이 통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결국, 강이신을 믿고 따르지 않기 때문에.
“좋은 사람일 수는 있어도, 우리가 될 수는 없는 거라고.”
한서현의 말에 차송진이 무어라 말하려고 할 때였다.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