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8화
#76 아름다운 꿈 (1)
치앤츠리앤이 떠나기 전 나는 치앤츠리앤에게 해성회에 대한 정보를 부탁했다.
아무리 거점을 두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여 대는 놈들이라고는 해도, 적어도 중간에 합류할 접선지 같은 게 있을 수밖에 없다.
내 말에 치앤츠리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혹시 내부에 의심 가는 사람이 있으면 제게 데려와 주세요.”
“배신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치앤츠리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상당히 외진 곳에 있죠. 혹여 이 저택까지 따라붙었다고 하더라도 책장 뒤에 숨겨진 이 비밀 공간까지 알아낸 것도 이상하고요. 거기에 이 안까지 와서 사람을 납치해 간다?”
내 말에 한서현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적들이 누군지 몰라도, 완벽히 이곳에 뭐가 있는지 알고 들어왔다는 생각밖에 안 드네요. 내부에 배신한 사람이 있든가, 아니면…….”
“정보 수집에 탁월한 능력자라도 있든가.”
나는 한서현의 말을 마무리 지으며 치앤츠리앤을 바라보았다.
“심문은 저희 쪽에서 맡을 테니, 의심스러운 사람을 발견하면 연락 주시죠.”
치앤츠리앤은 내 말에 어떤 말도 얹지 않고 고개만 끄덕인 뒤 사라졌다. ‘은월회에 배신자 따위는 없다’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지만, 이런 상황에 그런 말을 할 수는 없겠지.
게다가 그 말을 한 사람이 은월회의 둘도 없는 은인이니 더더욱.
‘확실히 전보다 훨씬 반응이 유해졌는데요.’
━하긴 전과 같은 상황에서 배신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했다가는 별소리를 다 들었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연구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송진이 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미 납치가 된 지 5일이나 지난 데다가, 어쩌면 이 지역을 벗어났을 수도 있다며. 어떻게 찾을 생각이야?”
“그야…….”
나는 슬쩍 한서현을 바라보았다. 일단은 한서현에게 전반적인 수색을 맡길 생각이기도 하고…….
“여차하면 지린성에 있다는 그놈들 본진을 덮치는 방법도 있고.”
“제정신이야? 그, 그 중국 갱단 본진으로 쳐들어가겠다고??”
“그러니까 ‘여차하면’이라고 말했잖아. 되도록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빌어 보자고.”
내 말에 차송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왠지 차송진이 저를 엄청나게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데요.’
━한심하긴 하지. 기껏 한다는 말이 저런 소리니까. 결국 한서현이 제대로 된 정보를 물어 오지 않으면 무식하게 적의 본진으로 쳐들어간다는 소리 아니냐?
‘저도 억울합니다. 제가 상황을 통제할 때라면 모를까, 이미 시간이 꽤 지난 다음에 왔잖아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에도 한계가 있다고요.’
━그렇다고 본진으로 쳐들어가?
‘그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으면 말씀해 보시죠.’
내 말에 레이는 침묵했다. 자기도 별다른 수가 없으면서 나를 공격하기는.
제아무리 한서현이 대단해도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한서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보스로서 결단을 내릴 수밖에.
━그래, 네놈의 말에도 일리는 있구나. 그 결단이라는 게 할 말을 잃을 정도로 무식한 방법이라 그렇지.
차송진에게도 말했지만, 웬만하면 나 또한 그 방법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은 치앤츠리앤 쪽에 희망을 걸어 봐야겠지. 5일 내내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는 게 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쪽만큼 이곳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사실, 이미 5일 전에 납치된 사람을 찾아 달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 아니냐. 이 넓은 중국에서 어떻게 사람 하나를 찾아?”
5일이면 해외로 사람을 빼돌리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만약 저우샤오첸이 해외로 빠져나갔다면, 글쎄, 그녀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봐야지.
“하아, 확실히. 이 넓은 땅에서 어떻게 사람 하나를 찾겠어? 게다가 우리한테 남은 거라곤…….”
그렇게 투덜거린 차송진이 연구실에 쌓인 문서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라고 쓰여 있는지도 모를 문서들뿐이고 말이야.”
나는 연구실을 샅샅이 훑었지만, 남은 건 차송진의 말대로 무어라 쓰였는지도 모를 문서들만이 가득했다.
‘이상한데요.’
━뭐가 말이냐.
‘지나치게 깨끗해서요.’
내가 무어라 말을 더 잇기도 전, 한서현이 내게 물었다.
“보스 중국어 잘하잖아요. 이 문서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읽을 수 없어요?”
“나야, 회화 위주로 중국어를 배운 거라서. 간단한 한자 정도는 읽을 수 있지만 이런 건 무리지.”
나는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집어 들었다. 알 수 없는 화학식이며, 전문 용어가 난무하는 서류는 내 눈에도 외계어처럼 보였다. 개중에는 영어로 된 문서도 있어 에드워드에게 건네 보았지만, 에드워드의 반응도 영 시원찮았다.
[여기에 쓰인 건 영어가 아니야.]
[영어인데.]
[아니, 절대로 아니야.]
에드워드도 뭐, 이런 전문적인 지식을 쌓을 기회는 없었을 테니까.
“어차피 이 문서들이 실종에 대한 단서가 될 것 같지는 않아.”
그렇게 말한 내가 일행에게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 중요해 보이는 것만 챙기자고.”
나는 매트리스 근처에 놓여 있던 메모장과 노트북을 챙겼다.
그 밖에도 우리는 현장에 남은 증거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범인들은 현장에 그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았다.
레이에게 부탁해 마력의 흔적도 찾아보았으나 그 역시 깔끔했다.
“흠.”
여기서 더 찾아낼 건 없겠군. 결국 우리는 그 어떤 소득도 없이 저우샤오첸의 연구실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 * *
어제, 그리고 오늘. 우리는 이틀 내내 공을 쳤다.
“그냥 해성회 본진을 털러 가는 게 빠를지도.”
내 중얼거림에 차송진의 어깨가 떨렸다.
“정말로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찾지 못할 줄은 몰랐어요.”
한서현은 자존심이 상해 보였지만, 중국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건 한국이나 미국에 비해 몇 배나 어려운 일이었다.
땅은 넓지, 그 넓은 땅에 사람들은 바글바글하지. 거기에 이미 납치당한 지 며칠은 지났지. 모든 상황이 최악이었다. 나는 한서현에게 어제부터 다른 쪽의 추적을 맡겼다.
━그쪽을 쫓겠다고?
내 선택에 레이가 의아하다는 듯이 그렇게 물었지만, 내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이쪽을 캐야만 확실하게 저우샤오첸을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도 지난 이틀간 아예 얻은 것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저우샤오첸이 남기고 간 다이어리를 통해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일기라기보다는 급할 때마다 마구 써 재낀 낙서에 가까운 그것들은 어느 순간부터 하나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저우샤오첸은 정말로 자신의 약이 성공할 거라고 믿었다.
부작용이 없는 마약을 퍼트린다면, 다른 마약이 모두 사라질 거라는 그녀의 생각은 냉철한 연구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마약을 만들면서 자신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다니.”
자신의 재능만큼이나 환상 속을 살던 여자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내 중얼거림을 들은 차송진이 말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 어떤 부작용도 없는 마약이라면, 어, 다른 마약보다는 훨씬 좋지 않아?”
“그래 봤자 마약은 마약이지. 애초에 왜 마약에 마약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알아?”
“글, 글쎄. 몸에 해가 돼서?”
차송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뭐, 그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크지.”
“그 이유가 뭔데?”
막 내가 차송진의 질문에 답을 하려는 그때, 치앤츠리앤이 내게 주고 간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그 전화를 받았다. 치앤츠리앤은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한 마디를 전해 주었다.
[배신자를 찾았습니다.]
은월회로서는 씁쓸할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지만, 내게는 이 답이 없던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참으로 반가운 이야기였다.
결국 내부에 배신자가 있을 거라는 내 추측은 맞았다.
나는 당장 그 소식을 일행에게 전했고, 우리 멤버들 모두가 치앤츠리앤이 배신자를 잡아 둔 곳으로 향했다.
자그마한 창고에는 은월회 사람들 몇과 착잡한 표정의 치앤츠리앤이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한 여자가 의자에 온몸이 묶인 채 앉아 있었다. 긴 머리를 앞으로 내려트린 여자의 상태는 척 보기에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고문의 흔적은 없었다. 여자를 훑어본 나는 뒤늦게 치앤츠리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아, 죄송합니다. 당연히 안녕하지는 못하실 텐데.”
내 말투로 내 기분이 그리 좋지 못한 것임을 깨달은 것인지, 치앤츠리앤의 표정이 굳었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진작 저희 측에 배신자가 있다는 걸 알아내야 했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내 질문에 치앤츠리앤이 입을 열었다.
“이번 약 개발에 테스트를 위해 자원했던 사람입니다. 약의 개발이 끝난 다음에는, 테스트가 필요 없어 다른 쪽의 일을 맡겼는데 테스트가 종료된 뒤에도 약을 간절히 원했다는 모양입니다.”
“배신은 그 때문이었습니까?”
겨우 마약을 얻기 위해 자신이 몇 년 동안 모셔 온 조직을 배신했다고?
내 말에 치앤츠리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무런 부작용이 없다는 말은 거짓이었나. 신체적으로는 부작용이 없어도 정신적으로는 그러지 못한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저 여자가 모든 정보를 해성회 측에 유출했다는 말입니까? 저우샤오첸이 만들 미래의 마약을 제공받기로 하고요.”
“예. 당장 내일 해성회와 접촉할 예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가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 ”
내가 배신자를 심문할 필요도 없었다. 치앤츠리앤은 여자에게서 캐낸 정보를 내게 줄줄이 모두 말해 주었다.
“그나저나 마약 때문에 조직을 배신한 사람이 참으로 쉽게 입을 열었네요.”
배신에 대한 대가는 언제나 목숨이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배신자는 모든 정보를 치앤츠리앤에게 넘겼다. 심지어 그 어떤 고문도 없이.
마약에 중독되어 조직을 팔아넘긴 이의 입을, 치앤츠리앤은 어떻게 열었을까?
답은 하나뿐이다.
“저한테 거짓말을 하신 게 있습니까?”
내 말에도 치앤츠리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은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감각에 예민한 김재호의 시선이 곧바로 치앤츠리앤에게로 향했다.
“확실히 이상하긴 했죠. 저우샤오첸은 분명히 자다가 납치되었는데, 그녀의 연구실은 마치 누군가 부러 치워 놓은 것처럼 깨끗했으니까요.”
그녀의 연구실에서 발견된 건 문서뿐. 그 연구실에 당연히 있어야 할 마약의 흔적은 조금도 없었다. 마치 우리가 오기 전에 깔끔하게 청소라도 해 둔 것처럼, 말이지.
“메이멍을 어디로 빼돌린 겁니까? 아, 메이멍을 왜 빼돌렸냐고 묻는 편이 더 확실할까요.”
내 말에 치앤츠리앤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얕은 수로는 은인을 속일 수 없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역시 샘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왜 저희한테까지 거짓말을 하신 겁니까?”
나는 은월회의 은인이고, 이번에도 그들을 돕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그런 내게 이런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다. 거짓말로라도 메이멍을 숨겨야 할 만한 커다란 이유가 있지 않다면, 말이다.
“도대체 메이멍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
내 말에 치앤츠리앤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제야 우리는 메이멍에 엮인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