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6화
#75 다시, 중국 (1)
우리는 배에 올라타 우리에게 배정된 객실로 향했다.
백도산이 준비한 객실에 있는 침대는 세 개뿐이었다. 멤버가 더 늘었다는 걸 말하지 못한 내 잘못도 있지만, 정말이지. 추가로 객실을 구해 줄 수는 없었던 거냐고.
“재호 형, 부탁해.”
한서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재호가 주먹을 들어 올렸다.
“뭘 부탁한다는, 세상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런, 무슨 짓을 한 거야?]
한서현의 얼굴에 기절 펀치를 날리는 걸 본 차송진와 에드워드가 비명을 내질렀다.
한서현은 행복한 얼굴로 뒤로 넘어갔다.
“아, 서현이 멀미가 심해서 저렇게 기절시켜 두는 게 최선이거든.”
“세상에!”
“멀미가 엄청나게 심해서 말이야.”
나도 한서현을 저런 꼴로 두고 싶지는 않았지만, 삼 초에 한 번씩 토하는 걸 보는 것도 좀 그렇단 말이지.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저렇게 기절을 시켜 두는 게 최선이지, 암.
내 말을 들은 차송진은 기겁한 얼굴로 말했다.
“멀미가 심하면, 멀미약을 먹이면 되는 거 아니야? 찾아보면 아티팩트나 포션도 있을 것 같은데. 저, 저 방법보다는 나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아.”
그냥 기절시키면 된다는 생각에 다른 방법을 찾아보지도 않았는데. 그런 방법이 있었군.
내 표정을 본 차송진이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상 한심한 사람 취급이로군.
큼, 큼.
나는 기절한 한서현을 구석에 예쁘게 눕혀 두었다.
━기절했다고 저렇게 짐짝같이 구석에 둬도 되는 거냐.
‘괜찮죠, 뭐.’
몸이 결리기야 하겠지마는, 그래도 깨어 있는 사람을 챙기는 게 맞지 않겠는가. 셋뿐인 침대를 의식도 없는 한서현에게 양보하기는 좀.
━보통은 기절한 사람을 챙겨 주는 게 맞지 않나?
‘늘 말했지만, 저희 벨츠머츠는 보통을 거절합니다.’
━이런 건 좀 보통에 따라라!
레이의 말을 무시한 채로 나는 나머지 세 사람과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서현이 기절로 빠지고 남은 사람은 총 넷. 하지만 침대는 세 개뿐.
예전처럼 무식하게 가위바위보로 침대의 주인을 가리던 때는 지났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중국에 갔던 전과는 다르다. 나는 배낭에서 준비해 두었던 아이템을 꺼냈다.
“그게 뭐야?”
“오늘 우리는 신성한 게임, 할리갈리로 침대에 오를 사람을 정할 거다.”
나는 세 사람에게 할리갈리의 규칙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모두가 주목한 건 마지막 규칙이다.
“종을 치는 사람이 모두 갖는다…….”
차송진은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친구를 이길 자신은 없는데.]
김재호를 의식한 에드워드의 말에 차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등이 될 필요는 없어. 꼴찌만 안 되면 돼. 오늘 꼴찌는 바닥에서 잘 예정이거든.”
그 말에 차송진과 에드워드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철창에서 살던 김재호야 사실 바닥에서 자도 별 상관이 없겠지만,
“마력을 쓰면 안 돼. 누구든.”
“재호는 마력 없이도 엄청나게 세잖아!”
차송진의 말에 김재호는 코웃음을 쳤다.
“네가 너무 약한 거지.”
“심판은 내가 볼게.”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침대 한 자리는 네 거가 되는 거냐.
‘명색이 보스인데 바닥에서 잘 수는 없죠.’
━이럴 때마다 야비하게 빠져나가려고 보스가 된 거냐!
이런 비난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인정이다.
‘예!’
인정해 버리는데 뭐라고 할 거냐! 내 뻔뻔한 대답에 레이는 내 예상대로 할 말을 잃고 나가떨어졌다.
“자, 그럼 시작하자.”
나는 모두에게 카드를 나눠 주었다. 제일 처음 1등을 한 건, 모두의 예상대로 김재호였다. 규칙을 제대로 이해도 못 한 김재호가 1등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김재호 특유의 엄청난 피지컬.
두 사람이 손을 들어 올리면, 그 반응을 보고 바로 종을 쳐 버리는데, 눈에 마력을 쏟지 않고서는 김재호의 움직임을 캐치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저걸 어떻게 이겨!”
음, 확실히 육체파인 김재호를 두 사람이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나.
[진짜 사기다, 저건!]
“우우!”
두 사람의 야유와 함께 패자전이 시작되었다.
누가 뭐래도 벨츠머츠의 최약체인 차송진과 누군가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때는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에드워드의 싸움이다. 일방적인 김재호의 독주로 끝났던 조금 전과는 달리 두 사람은 서로 번갈아 가며 카드를 빼앗고, 빼앗길 반복했다.
하위권 싸움은 내 예상보다 훨씬 치열했다.
“두 손 다 내가 볼 수 있게 올려놔!”
흥분한 차송진은 영어로 말하는 것도 잊고 에드워드에게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영어로 말해야지.”
“푸쳐핸쪕!! 이 양키야!”
그 얌전했던 차송진이 맞나. 꼭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할리갈리가 이렇게나 위험한 게임이었다니.
마치 인격이 바뀐 것처럼 사나워진 차송진의 윽박에 에드워드는 입술을 깨문 채로 두 손을 올렸다.
[그러는 너는 치사하게 내 카드를 훔쳐보는 것 좀 그만해!]
“안 훔쳐봤거든!”
[뭐라는 거야!]
[나만 왜 영어로 말해야 해? 너도 한국어 해!]
“아라써, 아라써!”
두 사람 사이의 신경전은 대단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두 사람의 대결은 치열했다.
하지만 차송진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꼴찌는…….
“젠장!”
“그러게 운동을 더 해야 한다니까.”
내 말에 차송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운동이랑 이게 무슨 상관이 있어!”
“생각해 봐. 팔근육이 조금만 더 많았어도 에드워드보다 빨리 칠 수 있었어.”
암, 그렇고말고.
내 논리정연한 말에 할 말을 잃었는지, 차송진은 입술만 꾹 깨물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팔을 쓰다듬는 표정이 제법 분해 보였다.
“정말 조금만 더 키웠다면, 됐, 됐으려나?”
“응, 그렇고말고.”
내 말에 레이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기회를 참 잘 잡는다고 해야 할지.
‘제가 저 좋으라고 이런 말 합니까? 이게 다 송진이 형한테 도움이 되라고 하는 소리라고요.’
━퍽이나.
레이는 내 정성을 그렇게 폄하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네, 다음 근육 없는 유령 씨.’
━너 진짜 복수한다!
* * *
나는 김재호의 손에서 산산조각이 난 종을 다섯 번째로 고쳤다.
=====
너덜너덜해진 종 / C급
------
보조 아이템ㆍ기타
형편없는 손길로 만들어진 종
본래는 각성자의 손길도 견딜 수 있을 만큼 튼튼하게 만들어졌으나 몇 번이나 깨진 뒤 수리되어 내구도가 엉망이다
고철로 돌아가는 걸 간절히 바라고 있다
=====
이 정도면 시스템 창이 나를 정말 먹이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종을 내려다보니 그 말은 쏙 들어갔다. 음, 확실히 간절히 은퇴를 바라는 모양새네.
“빨리, 빨리 해.”
김재호는 당장에라도 게임을 이어 가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그 뒤에 선 에드워드와 차송진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간절히 고개를 가로젓는 두 사람을 보면서 나는 결심을 내렸다.
후, 겨우 고쳤으니 아깝긴 하지만 벨츠머츠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대가라면…….
나는 종을 쥔 손에 힘을 주었고, 종은 내 손에서 뭉그러졌다.
“아이고, 이런! 망가져 버렸네.”
내 말에 김재호가 얼굴을 찌푸리곤 말했다.
“그럼 못해?”
“응, 나중에 더 튼튼한 종 사서 하자.”
나는 이렇게 말하며 김재호를 달랬지만, 응, 아니야. 다시는 우리가 할리갈리를 하는 일은 없을 거다. 김재호의 몸에 디버프를 잔뜩 걸어서 김재호가 평범한 몸이 되지 않는 한…….
━평생 안 하겠다는 말을 참 돌려서 하는구나.
배가 공항에 도착하기 직전, 우리는 근 삼 일간 김재호의 기절 빔을 맞고 쓰러져 있던 한서현을 깨웠다.
“으, 으. 왜 이렇게 몸이 결리지?”
중간중간 등에 욕창이 생길까 봐 뒤집어 준 것만으로는 부족했나.
━부족했지, 그럼! 할리갈리인지, 뭔지 모를 게임에 정신이 팔려서는! 애를 완전히 무시했는데. 하루에 뒤집기도 두 번밖에 안 해 주지 않았냐.
레이의 말에 나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다들 준비됐으면 내릴 준비해.”
내 말에 한서현은 몸을 비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밀항을 하는 만큼, 이제부터는 다른 승객들과는 다른 루트로 움직여야 했다. 우리는 몰래 배에서 내려 항구 구석으로 이동했다.
“일단은 여기에서 접선책을 찾아야 해. 은월회에서 사람을 보내 준다고 했거든.”
내 말에 여전히 파리한 안색의 한서현이 허공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괜찮겠어?”
“예, 엄청나게 몸이 결리고 배가 고파 죽겠는 걸 빼고는 괜찮거든요.”
“……안 괜찮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차송진의 말에 나는 큼큼, 헛기침을 내뱉었다. 돌아갈 때는 멀미약을 사든가, 아티팩트를 구하든가 해야겠다.
추적을 끝낸 한서현이 우리를 이끌었다.
은월회에서는 우리를 맞기 위해 치앤츠리앤을 보냈다. 긴 장발을 올려 묶고 몸에 딱 붙는 검은색 치파오를 입은 그녀는 우리를 보며 고개를 깍듯하게 숙였다.
은월회 보스인 장리우위앤의 최측근인 그녀가 우리를 직접 마중 나오다니. 게다가 심지어 그녀의 뒤에는 고급 리무진이 대기 중이었다. 레드카펫만 없지, 완벽한 귀빈 대우다. 확실히 전과는 달라진 대접이 실감이 났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한국어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은인의 덕분으로 무척이나 잘 지냈지요. 자세한 이야기는 이동하면서 드리도록 하죠.”
치앤츠리앤은 깍듯하게 우리를 리무진으로 안내했다. 우리는 화려한 리무진에 올라탔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본론부터 꺼냈다.
“그래서 우리가 구해야 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내 말에 치앤츠리앤은 리무진 안에 있던 서류를 내게 건넸다. 나는 서류 봉투에 들어 있던 서류를 확인했다.
여자의 이름은 저우샤오첸. 올해 스물넷으로 정신계 재능을 지닌 각성자였다. 더불어 IQ가 160에 달하는 천재이기도 했다. 저우샤오첸의 어머니는 은월회 소속으로 그녀가 정신계 재능을 각성함과 동시에 은월회의 지원을 받아 재능을 은폐하고 은월회에 소속돼 활동을 시작했다고 했다.
━왜 재능을 숨기고 폭력 조직 소속이 된 거냐. 환상을 다룰 수 있는 각성자라면, 굳이 조직에 소속되지 않고도 잘살 방법이 있었을 텐데. 이쪽도 정신계 각성자라고 불이익이라도 주는 건가?
‘으음, 그보다는 각성자인 것 자체가 문제가 돼서요. 중국은 공산 국가라는 말을 저번에 했던가요?’
━그래, 그 공산 국가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쉽게 말해 이 중국에서는 개인의 인권보다 국가의 이익을 위로 둔다는 뜻입니다. 각성자는 존재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일종의 자원이고요.’
━재능을 각성하면, 싫든 좋든 정부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거냐?
‘예.’
중국의 길드는 전부 국가 소속이었다. 자유롭게 계약을 맺고 때로는 해외로 나가곤 하는 다른 나라의 헌터들과는 달리 중국의 각성자는 무조건 국가가 정해 주는 길드의 소속이 되어 한평생 국가의 ‘자원’으로서 활동해야만 한다.
‘때문에 이런 식으로 음지에 있는 조직에 속하는 걸 택하는 각성자도 많습니다. 특히 샤오첸의 경우에는 어머니가 이미 은월회 소속이었으니, 그 선택이 자연스러웠을 거고요.’
물론 이쪽도 단점이 상당하다. 정부를 속이고 조직 소속이 되기로 택한 만큼, 조직에 불만이 생겨도 어쩔 수 없이 조직에 남는 경우도 많고.
하지만 이 저우샤오첸은 운이 좋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은월회 소속 조직원이었으니.
그러나 그녀가 은월회의 소중한 자원이 된 건, 그녀의 능력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 어떤 부작용도 없는 완벽한 약을 개발했어요. 그리고 그 때문에 납치당한 거죠.”
그 어떤 부작용도 없는 마약이라. 왠지 냄새가 나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