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4화
#74 그걸 저희한테요? (1)
‘이거 어쩐지 귀가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는데요.’
누군가 내 욕을 질펀하게 쏟아 내고 있는 것 같단 말이지.
━그럼 그쪽으로 사람 하나를 더 보내 놓고도 욕을 안 먹을 거라고 생각했냐.
‘그래도 그보다 더 좋은 생각이 나질 않았는데 어떡합니까.’
유채린은 남주현과 좋은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쪽에 있는 사람은 무해하기 짝이 없으니 지친 심신을 쉬게 하기에는 딱이었다.
━무려 그 쑤어하오주가 껴 있는데 ‘무해한’ 사람들이라고?
‘그래도 여태까지 남주현을 안 죽이고 같이 잘 지냈지 않습니까? 이 정도면 무해한 거죠.’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이 세상에 무해하지 않은 게 있을까 싶은데.
레이는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나는 제법 진심이었다.
그래도 중국에 있었을 때에 비하면 쑤어하오주는 지금 순한 양이나 다름없었다. 전에는 조금만 수틀리면 바로 사람 머리를 깨부쉈다고.
‘제가 쑤어하오주를 남주현 쪽으로 보낸 건, 뭐, 제 편의를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 사람이 이 세상을 다른 눈으로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남주현은 이러나저러나 해도 좋은 사람이었다. 여태까지 쑤어하오주가 봐 왔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평범하게 좋은 사람.
진실을 좇겠다는 열정 하나로 이 길로 들어서긴 했지만, 그 빌어먹을 놈의 사건만 아니었다면 남주현은 나 같은 놈과 엮이는 일 없이 행복하게 살았을 거다.
그런 좋은 사람인 만큼, 쑤어하오주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거다. 나도 남주현 옆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휘말려서 이런저런 심부름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건 남주현이 유별난 게 아니라 그냥 네가 쉬운 놈이라서 그런 것 같은데.
‘아니거든요.’
━아니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뭐든 해 줬던 주제에.
‘일하는데 힘들다잖아요.’
━이런 점이 쉽다는 거다.
어쨌든 남주현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정신적으로 많이 지친 유채린이 편히 쉬기에는 그곳보다 더 좋은 곳이 없었다.
설록진의 세뇌에도 불구하고 유채린의 정신은 깨지지 않았다. 하지만 억지로 봐야 했던 것들 때문에 거의 신경쇠약이 왔을 만큼 그녀는 많이 약해져 있었다.
당분간은 복잡한 생각 없이, 단순한 일상에 젖는 게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단순한 일상을 보내기에는 그곳이 딱이지.
내가 전해 듣기로 남주현 일행은 일주일에 한 번 외부로 장을 보러 나올 때를 빼고는 집안에 틀어박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니까 말이다.
이번에 위로금 겸 활동비를 넉넉하게 넣어 주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전형적인 돈이면 된다는 식의 졸부 마인드로구나.
‘돈도 안 주고 떠맡기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돈으로 사겠다?
‘안 될 게 뭡니까?’
어렸을 적 드라마에서 나쁜 남자 주인공이 하던 ‘큭, 큭. 그깟 사랑? 돈으로 사겠어.’ 하는 대사를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나는 많은 돈으로는 아주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음,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건 맞지. 하지만 아주 많은 돈이라면 어떨까? 아주 아주 아주 많은 돈이라면?
‘그 게임인가 뭔가, 신나게 지르라고 하면 됩니다.’
생각해 보니 진짜 쉬운 게 누구지? 과금을 허락하니까 남주현은 나한테 청혼까지 했다고!
됐다, 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것 같다.
우리가 유채린을 데리고 있을 수 없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곧 한국을 떠야만 했다.
차송진의 장비를 받으러 금박사에게 들렀을 때, 나는 그에게서 백도산의 부탁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 부탁이라는 건 바로…….
“시간이 나면 같이 중국에 한 번 들르자고 하던걸.”
“중국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전에도 말했지만, 그 친구 일은 그 친구 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라서 말이야.”
불알친구인 것처럼 굴어도 각자의 일에는 참 독립적이란 말이야. 하긴 저 독립성 덕분에 백도산이 대놓고 나랑 놀지 말라고 했는데도 날 돕고 있는 거였지.
금박사에게서는 별다른 설명을 들을 수 없었지만, 아주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적사회가 망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은월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중국의 상황은 혼돈 그 자체일 거다. 저번 생에서는 적사회가 압도적인 힘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나름의 평화를 이룩했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으니까. 아마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혼란스럽지 않을까.
그 안에서 은월회가 살아남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굳이 백도산을 통해 내게 도움을 요청한 걸로 봐서는 그리 좋지 못한 꼴을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흠…….’
은월회는 내가 아는 회중에서는 그나마 괜찮은 갱단이었다. 괜한 놈들이 중국을 집어삼키기 전에 내가 개입해서 적당히 힘을 실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은월회가 너무 커지는 건 반대지만, 기껏 힘을 써서 구해 준 쪽이 다른 놈에게 잡아먹히는 것도 기분이 나쁘니까.
나는 금박사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단순히 은월회 때문만은 아니다.
‘마침 중국 쪽에 한 번쯤 들르긴 해야 했죠.’
━그 장인에 대해서 수소문해 볼 생각이냐?
‘예.’
마치 공장처럼 정확하게 아티팩트를 찍어 낼 수 있는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다른 아티팩트의 능력을 복제할 수 있다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그런 장인은 꼭 납치, 아니, 구출해서 내 사람으로 만들어 둬야지.
어쨌거나 그런 고로 다음 벨츠머츠의 행선지가 정해졌다. 금박사를 통해 날짜와 시간을 전달받은 나는 차송진과 한서현 두 사람을 불러 해당 내용을 전했다.
“조만간 중국에 한 번 가야겠어.”
내 말에 한서현과 차송진은 저마다의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중국? 거기엔 또 왜요?”
“또 해외로 나간다고?”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튀어나온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또 해외에 가. 당연히 거기에 무슨 일이 생겼기 때문이지.”
“무슨 일인데?”
“아직은 몰라. 그쪽에서 온 SOS 요청만 받아 둔 상태랄까. 하지만 나쁠 건 없잖아. 마침 그쪽에 볼일이 있었으니까.”
“볼일이요?”
“그래, 카지노에서 발견했던 아티팩트들 기억나? 분명 그 물건을 중국에서 떼온다고 했잖아. 그때 들었던 갱단 이름이 뭐였더라.”
━해성회.
“해성회요.”
한서현과 레이의 대답이 동시에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그 해성회라는 놈들의 뒤를 쫓다 보면 뭔가 답이 나오겠지.
“중국에 간 김에 은월회 쪽도 한 번 살펴보고 그 해성회라는 놈들도 한번 털어 보자고.”
“그 은월회라는 건 뭐야?”
차송진의 질문에 나는 전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전달해 주었다. 그 모든 이야기에 차송진은 입을 떠억하고 벌렸다.
“그럼 그 전에 쑤어하오주와 엮였다는 일이, 바로 그…….”
“응, 내가 말했잖아. 쑤어하오주의 아버지라는 인간은 죽어 마땅한 놈이었다고.”
“……갱단을 이끌고 있을 줄은, 몰랐지.”
차송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나는 모두를 향해 말했다.
“어쨌거나 이번에는 은월회의 은인으로 가는 만큼 저번보다는 훨씬 대접이 좋을 거야.”
“우리가 그렇게 막 남의 나라 갱단 일에 개입해도 되는 거야?”
“중국은 따지자면 바로 우리 옆집이잖아. 아주 못 써먹을 정도로 미친놈보다는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모시고 있는 나쁜 놈이 짱을 먹는 게 낫지 않겠어?”
“짱까지 먹게 해 주려고?”
“모르지, 일단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는 게 먼저야.”
내 말에 차송진은 굳은 얼굴로 침을 꼴깍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재호와 에드워드에게도 같은 말을 해 주었다.
동화책을 읽으며 내 말을 흘려들으며 귀찮다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인 김재호와는 달리 에드워드는 내 설명에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잔뜩 들떠 버렸다.
[중국 갱단도 살펴보고, 아티팩트 장인도 구출할 계획이라……. 그거 재밌게 들리는데.]
[무슨 착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전혀 재밌지 않을 가능성이 크거든?]
[그래도 여기에 처박혀 있는 것보다는 훨씬 재밌을 거 아니야!]
이런 말까지 할 정도라니, 그동안 여기에서 가만히 있었던 게 어지간히 답답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로서도 억울했다. 그러게, 거기에서 왜 나서서 자기가 에너지를 다 받냔 말이다.
━그러게, 그냥 네 놈의 몸이 구워지게 그냥 두질 그러지. 왜 너 같은 배은망덕한 놈을 구해 줘서 이런 욕을 듣냔 말이다.
그래도 온몸을 던져 나를 구해 준 사람에게 뭐라고 해서는 안 되지, 암.
[몸은 좀 괜찮아?]
[응!]
다행히 며칠 만에 에드워드의 몸은 깔끔하게 나았다. 거기에 이번 일로 잃은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에드워드의 몸을 휩쓴 마나 폭풍은 에드워드의 몸에 상처를 남겼지만, 그 상처가 오히려 에드워드의 마나 회로 통로를 넓혀 전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의 마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근육통을 앓고 난 뒤 근세포가 자라나는 것처럼, 이번에도 비슷했다. 조금만 위력이 더 강했다면, 에드워드의 재능이 조금만 부족했다면 안에서부터 찢겨 나가 죽을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끔찍한 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 * *
중국으로 가는 길은 배를 이용하는 게 제일 좋았다.
[왜 비행기를 타지 않고 배로 가는 거야?]
에드워드의 말에 내가 짧게 답했다.
[그야, 중국이 공산 국가이기 때문이지.]
중국은 미국이나 다른 곳과는 달리 각성자라고 해서 신고 절차를 간단하게 축소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각성자일수록 신고 절차가 까다로워졌다. 다른 나라에서는 인권 유린이라고 꺼리는 각종 검사도 입국 시 필수적으로 해야만 했다.
[배로 몰래 입항하면 그 모든 절차를 생략할 수 있거든.]
[무조건 배를 타야겠네.]
나는 항구에서 백도산을 기다렸다. 검은색 차를 타고 등장한 백도산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언제 봐도 참 조폭 같네요.’
━맞잖냐, 조폭.
양옆으로 열을 맞춰 서는 부하들 하며, 그 사이를 태연하게 걸어오는 모습까지. 정말로 그린 듯한 조직폭력배의 모습이었다. 날이 꽤 풀렸다고는 해도 여전히 낮에는 심심찮게 영하로 떨어지는 쌀쌀한 날씨인데도, 백도산은 정장 위에 몸을 딱 맞는 핏으로 감싸는 감색 코트 하나만을 걸쳤다.
그 긴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자신과 같은 톤의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들 사이를 해치고 왔다.
나야, 아티팩트라지만 저쪽은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영화를 너무 본 게 분명합니다.’
━저쪽이 너무 멋져 보여서 질투를 하는 건 아니고?
‘제가 왜 질투합니까? 예? 제가 꿇리는 게 뭐가 있다고요? 저도 코트 입었고, 부하도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백도산의 옆에 각을 잡고 도열해 있는 그의 부하들과는 달리 우리 애들의 자세는 아주 천차만별이었다.
왼쪽 다리를 한쪽으로 굽힌 채 팔짱을 끼고 있는 한서현과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두 손을 바짝 맞잡고 있는 차송진.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며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에드워드까지.
‘재호는 어디에 갔습니까?’
━네 그림자에 숨었다.
그래, 통일성이 뭐가 중요하냐. 우리 애들은 우리 애들 나름의 매력이 있는데.
나는 어느새 내 앞에 바짝 다가온 백도산을 향해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