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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273화 (273/352)

제273화

#73 부탁합니다

정호산의 장례식이 끝난 뒤, 나는 설록진 쪽의 동향을 살폈다. 그 후로 며칠, 설록진은 수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내게 두 번이나 죽을 뻔했으니, 아마도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거다. 그 상한 자존심을 복구하기 위해서라도 곧바로 내 뒤를 쫓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설록진이 택한 건 조용히 몸을 숙이는 거였다.

정호산의 장례식장에 화환을 보냈다고 해서 순간 정호산에게까지 정보가 닿은 건가 싶었지만,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화환도 설록진의 보좌관 쪽에서 알아서 보낸 거라, 설록진이 보냈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흐음, 너무 조용해도 불안한데 말이죠.’

설록진의 근거지는 아티팩트로 무장하고 있어 제아무리 한서현이라고 하더라도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음 설록진의 움직임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냥 느긋하게 기다리겠다고?

‘제 수는 이미 두었으니까요.’

우리 둘의 싸움을 체스라고 치면 나는 이미 내 쪽의 움직임을 끝냈다.

유선제를 구했고, 청 과장에게 복수를 성공했으며 설록진에게 선전포고를 날렸고 정호산을 설록진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빼돌렸다.

지금 나에게는 두려울 것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지금 당장 설록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별로 없을 것 같기도 하고요.’

설록진이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그전에도 못 잡았던 우리를 갑자기 잡을 방법이 생길 리 없다. 기껏해야 내 과거를 캐는 게 전부일 텐데……. 그 과거 또한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다.

‘제 과거를 조사해 봐도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실제로 과거의 저는 지금의 저와는 아예 다른 사람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제가 미래를 안다는 걸 들키기야 했지만, 어떻게 제가 미래를 알게 되었는지는 과거를 털어 봐도 알 수 없다는 뜻이죠.’

━하긴 네 녀석이 이번 삶으로 돌아온 건 작년이니까, 그 이전의 너를 찾아본다고 한들 너와는 다른 사람이겠지.

‘그럼요.’

오히려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혼란이 가중되지 않을까. 바벨 아카데미에 다녔을 때의 나는 정말로 형편없었으니까.

‘어쨌거나 다음 제 수는 설록진의 수를 본 다음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걱정을 덜어 낸 나는 곧바로 금박사에게로 향했다. 이번 일의 결과를 알려 줄 겸, 내가 저번에 의뢰했던 아이템을 받으러 가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는 꽤 오래 걸렸네요.”

“네가 중간에 이상한 일만 시키지 않았더라도 훨씬 일찍 끝났을 거야.”

금박사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내게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차송진의 몫으로 부탁했던 가면과 유니폼이었다. 가면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것뿐입니까?”

“정신계 방어용 아티팩트는 구하지 못했어. 생각보다 구하기 까다롭더라고.”

“등급이 낮은 것들도요?”

내 질문에 금박사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부탁에도 물건을 구하지 못했다는 게 퍽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잘 알아볼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상자를 열고 금박사가 직접 제작한 가면을 살펴보았다.

“가면 무늬가, 좀 독특한데요.”

금박사는 우리들의 특징을 살려 가면에 괴상한 무늬를 넣어 두었다. 내 경우에는 내가 전에 쓰던 가면에서 가져온 듯한 웃는 얼굴, 한서현의 경우에는 네크로맨서니까 해골. 김재호의 경우에는 눈이 없는 늑대였고 새로 완성된 차송진의 가면에는 ‘X’가 새겨져 있었다. X자 옆에 붙은 쉼표가 마치 눈처럼 보였다.

“왜 이런 무늬를 새겨 넣은 겁니까?”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기도 했고, 원래 보물지도 같은 데에 보면 목적지에 X자를 그려 넣잖아? 그래서 거기에서 영감을 받았지.”

“아무리 봐도 토끼 입처럼 보이거든요, 이거. 입이 무진장 커진 그 토끼 캐릭터 같다고요.”

“아, 그것도 노리긴 했지.”

“그러니까 왜 그렇게 보이게 만들었냐고요.”

도대체 빌런 조직원이랑 토끼랑 무슨 상관이 있냐!

“그야, 그 친구는 비전투원이라면서? 원래 그런 캐릭터들은 순한 인상의 가면을 써 줘야 하는 법이거든.”

“그러면 그냥 표적이 될 뿐이잖아요. 아, 아! 그래서 X자인 겁니까? 이곳이 목표다, 이렇게 알려 주는 거예요?”

내 말에 금박사는 서운하다는 듯이 어깨를 추욱 늘어트리고 말했다.

“그래도 내가 열심히 만든 건데, 그렇게 폄하하고 말이지…….”

정말이지, 이 나잇값도 못 하는 아저씨가!

“예? 폄하라니요? 세상에 이런 멋진 가면은 두 번째로 봅니다.”

“두 번째?”

“아, 물론 첫 번째는 저번에 만들어 주신 제 가면이죠.”

나는 혼신의 손바닥 비비기를 사용했고, 효과는 굉장했다.

“하하! 다음에도 맡기고 싶은 게 생기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 * *

나는 차송진의 반응을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차송진의 반응은 괜찮았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기뻐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꽤, 꽤나 귀엽잖아?”

“귀여운 걸로 괜찮은 거냐고?”

내 말에 차송진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나도 빌런이 되겠다고 말한 주제에 가면이 이렇게 귀여워도 되나 싶긴 한데……. 그래도 누가 봐도 꺼림칙한 미소를 짓고 있는 가면이나, 보기만 해도 다리가 덜덜 떨릴 것 같은 해골이나, 괴물의 입 같은 게 그려진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아서.”

“저기, 그 가면들 주인이 바로 우리거든?”

“아차차.”

“아차차, 는 무슨 다 알고서 그렇게 말한 거면서.”

그래도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다행이다.

“고마워.”

유니폼까지 꼭 끌어안은 차송진이 씩 미소를 지었다.

“그 유니폼에는 특별한 기능이 많아.”

우리 중 유일하게 전투 능력이 없는 차송진의 것이라 특별히 더 신경을 썼다. 급할 때 쓸 수 있는 기능이 많았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차송진에게 그 기능을 알려 주려는 그때, 거실로 에드워드가 뛰쳐 나왔다.

[그, 그 여자 말이야! 정신을 차렸어.]

“아.”

그 말에 나는 에드워드가 튀어나온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방 안에는 창백하게 질린 유채린이 앉아 있었다.

꿀꺽 침을 삼킨 나는 그녀에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금녀였던 우리의 기지에 그녀를 데리고 온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그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설록진의 피해자라는 점.

두 번째 이유는 그로 인해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떤 피해가 생겼을지 가늠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하여 만약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이 발생했다면 내 손으로 그녀를 처리하기 위해서.

━직접 처리한다고? 백치가 되었다고 한들, 사람의 목숨을 그리 쉽게 포기할 생각이냐!

‘예? 포기하기는 뭘 포기합니까? 백치가 되면 백치가 되는 대로 어떻게든 좋은 요양원을 찾아 넣어 줄 생각이었는데요.’

━네 놈이 처리라고 하면 어쩐지 좋지 않은 생각만 들어서 말이다.

서운한 말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조심스레 유채린에게 다가갔다. 겁에 잔뜩 질린 얼굴로 몸을 와들와들 떠는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조금의 이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모습은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세상엔 기적이라는 게 있으니까.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면 어떻게 할 작정이냐? 설록진의 눈에 찍힌 이상, 다시 돌려보내는 건 안 될 것 같은데.

‘예, 유채린 씨를 돌려보내진 않을 겁니다. 만약 제정신이라고 해도 말이죠.’

━그렇다면 어디로 보낼 생각인데? 설마 금박사, 그놈한테? 다시 한번 자기한테 사람을 유기하면 너한테 절대로 협조하지 않겠다고 말했잖냐.

확실히, 금박사에게는 이제 다시는 사람을 유기할 수 없게 됐다. 그래도 뭐, 사람을 유기, 아니, 맡길 만한 데가 거기 한군데만 있는 건 아니지.

“정신이 드셨습니까?”

유채린은 내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 * *

남주현은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히이익!”

남주현이 두들기고 있던 노트북의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건, 바로 쑤어하오주였다. 전이었더라면 네가 뭘 알아보겠냐며, 코웃음을 쳤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서로옥지인 개자아시익.”

발음도 정확하지 않고 개미가 기어가듯 느린 속도였지만, 쑤어하오주의 입에서 나온 것은 분명한 한국어였다.

남주현은 재빨리 노트북을 덮었다.

“깜, 깜짝 놀랐네!”

그 말에 쑤어하오주의 눈가가 매서워졌다. 최근 이희원에게서 한글과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툭하면 남주현의 노트북을 훔쳐보기 시작한 쑤어하오주였다.

하필이면 벨츠머츠가 시킨 일을 하다가 들키다니. 어차피 봐도 모르겠지만, 쑤어하오주의 학습 능력은 대단했다. 혹여나 자신이 지금 벨츠머츠의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나를 쥐어짜서라도 정보를 얻어 내려고 하겠지.’

그것만큼은 절대로 사양이었다.

“설록쥔 개자싁, 그거 무순 뜻?”

쑤어하오주의 말에 남주현은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뜻도없어!그냥재수없는국회의원한테악플다는게내취미라서!”

숨 한 번 쉴 틈 없이 다다다 쏘아지는 남주현의 말에 쑤어하오주의 미간이 좁혀졌다. 래퍼가 연상될 만큼 빠른 그 말은 한국인이라고 하더라도 단번에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천처니 말해.”

어눌한 발음으로 제게 그렇게 말하는 쑤어하오주의 말에 남주현은 꿀꺽 침을 삼켰다. 어린애처럼 보여도 방심할 수 없다. 벨츠머츠의 리더인 그 작자는 쑤어하오주가 무척이나 위험한 사람이라고 말했으니까.

그러니 웬만하면 기분을 거스르지 말라고 했지만…….

‘당신 일이라면 눈이 뒤집히는 사람한테서 어떻게 정보를 지키냐고!’

“수상해.”

요 며칠 이 말을 달고 살았기 때문일까. 쑤어하오주의 발음은 엄청나게 정확했다.

“내놔.”

“안, 안 돼! 이걸로 일해야 한다니까?”

그렇게 실랑이하는 두 사람의 곁으로 이희원이 다가왔다.

“또 싸우는 거예요?”

이희원의 말에 쑤어하오주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보면 정말로 순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표정에 남주현은 가슴만 퍽퍽 쳤다.

처음에는 남주현에게나, 이희원에게나 툭하면 이를 드러냈던 쑤어하오주였지만 이희원이 그녀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위아래도 가릴 줄 모르는 안하무인인 줄 알았던 쑤어하오주는 생각보다 훨씬 은혜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아니, 아니다.”

그래서인지 이희원의 앞에서는 마치 순한 양처럼 눈치를 봤다. 쑤어하오주가 이럴 때마다 남주현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쳐 댔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에 그녀의 억울함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이지, 무섭다니까요! 내가 일할 때마다 뒤에서 나를 감시하는 것 같아서 숨이 다 막혀요!”

남주현은 이희원에게 그렇게 하소연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영 시원찮았다.

“그래도 저렇게 열심히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게 기특하지 않아요?”

그 말에 남주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야 저한테서 정보를 캐내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저번에 남주현의 휴대폰을 빼앗아 가고도 한국어를 몰라 아무런 정보도 캐낼 수 없었던 것이 분했는지, 그날부터 쑤어하오주는 한국어 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목적의식이 확실한 건 좋은 거예요.”

이희원의 말에 남주현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괜히 시리우스의 진연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버텨 낼 수 있었던 게 아니다! 이희원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하아…….”

“그쪽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어요?”

이희원의 말에 남주현은 슬쩍 쑤어하오주 쪽의 눈치를 봤다.

“그냥 이렇게 대놓고 물어봐도 되는 거예요?”

“아직 저희의 대화를 알아들을 정도로 능숙하지 못하다는 거, 알잖아요.”

“그래도…….”

“게다가 아까도 말했듯, 효과적인 공부에는 목적이 확실한 편이 좋아요.”

확실히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어떻게든 해석하기 위해 애를 쓰는 쑤어하오주의 얼굴을 보자면, 얼마 안 지나서 정말로 한글을 떼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공부의 끝에 진실을 알게 되면 저한테 복수하겠다고 굴까 봐 무서워서 그렇죠.”

“복수 당할 만한 일을, 우리는 하지 않았잖아요?”

“하긴, 그쪽이 잘못했지! 애초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렇게 사람을 던져두기만 하면 다야? 정말이지…….”

새삼 생각하니 열이 받았다. 한참이나 씩씩거리던 남주현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이희원에게 말을 꺼냈다.

“연락은 일방적이었어요. 그쪽에서 시키는 일만 했을 뿐, 제가 원하는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고요.”

“흐음.”

이희원은 쑤어하오주 쪽을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이대로 저 친구를 여기에 계속 두는 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데 말이죠. 언젠가는…….”

이곳을 떠날 저 친구만의 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말하려던 이희원은 말을 멈추고 바깥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잠깐만,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데요?”

쑤어하오주 또한 같은 것을 느꼈는지 이희원이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무, 뭔데요!”

“일단 직접 가서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요.”

세 사람이 달려 나간 곳에는 편지를 들고 있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남주현은 그동안 꾹꾹 눌러 참았던 욕설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이런 미친놈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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