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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272화 (272/352)

제272화

#72 죽어야 산다 (5)

정호산은 살아 있었다. 왈칵 터져 나온 눈물을 재빨리 손등으로 닦아 낸 도채희가 숨을 내쉬었다.

꿈이 아니었다. 분명히 죽은 줄로 알았던 정호산은 여기에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도채희의 질문에 정호산은 순순히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박철완과의 만남, 그리고 그곳에서 있었던 일. 죽음을 가장하고 숨어있었던 것까지. 도채희는 천천히 정호산에게 들은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정호산 씨한테 비밀 임무를 제안했고, 어, 그래서 적당히 죽은 척을 할 필요가 있었다고요.”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와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그, 그러면 여기에 이렇게 나타나서는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물론 나야 살아 있다는 걸 알려 줘서 고맙긴 한데…….”

박철완과의 약속을 깨면서까지 이곳에 올 이유가 있었을까. 또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다른 일이 있는 걸까? 도채희의 눈가에 의심이 맴도는 걸 본 정호산이 말했다.

“내가 알던 사람이 죽음을 가장하고 연락 하나 없이 잠수를 타는 게 얼마나 거지 같은지, 난 누구보다 잘 알거든요.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도 말이에요.”

그 말에 도채희의 눈동자가 떨렸다. 정호산이 이곳으로 온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경위님이 없는 곳에서 경위님도 모르게 경위님의 행동을 정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어…….”

“박철완 부장은 경위님이 안전한 곳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눈이 멀어 있길 바라는 것 같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었잖아요. 경위님이나, 나나.”

정호산은 쓰게 웃었다. 도채희와 자신이 참으로 비슷하게 느껴져서였다.

강이신의 일을 겪지 않았더라면 정호산은 도채희에게서 별 죄책감도 없이 그냥 모습을 감췄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희생’한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지.

하지만 이런 건 희생이 아니다. 자신의 선택을 희생이라고 포장하는 건 자기기만일 뿐이다.

하루아침에 친구를 잃고, 그 친구가 이렇게 될 때까지 그 무엇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후회하며, 쓰라린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데 어찌하여 그 선택이 자신만의 ‘희생’이 될 수 있겠는가.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 당신을 어쩔 수 없이 속이고 조종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건 결국 기만이잖아요. 경위님은 그런 보호 같은 거 원하지 않는데, 오로지 나를 위해서 그렇게 행동하고 싶진 않았어요.”

정호산은 그래서 박철완의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도채희를 기만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게다가 아직까지는 그 사람을 완전히 믿는 것도 아니어서요.”

무언가 생각이 있어서 자신을 끌어들인 것 같기는 한데, 너무나도 정호산에게 좋은 이야기였다. 당장 도채희에게 전해 들은 박철완이라는 사람과는 너무 다르기도 했고.

“하지만 거절하기에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얘기기도 했고, 만에 하나 정말로 박철완 부장이 저희 편으로 돌아선 거라면 도박을 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판단했어요.”

그렇게 말한 정호산이 도채희를 향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미리 상담하지 못한 건 미안해요. 그런데 그쪽에서 제가 죽기 전까지 시간을 별로 안 줬거든요.”

“어, 어, 네…….”

도채희는 놀란 얼굴로 두 눈을 깜빡였다. 여러모로 충격적인 하루였다.

“그러면 어, 아저씨, 박철완 부장은 그쪽을 통해서 뭔가를 할 작정이라는 거죠? 아직 뭘 할지는 전달받지 못했고요.”

“예. 그래도 제법 진지한 것 같긴 해요. 저한테, 큼, 엄청난 금액이 든 통장을 주고 갔거든요.”

그 말에 도채희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 뒤로 나쁜 놈들과 손을 잡았으니 각범부 부장이 받는 월급보다는 많이 벌겠지만, 과거 헌터였던 정호산의 입에서 ‘엄청난 금액’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대체 얼마를 줬길래…….”

“큼, 십, 십억이요.”

“십억?!?”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던 도채희가 입을 틀어막았다.

“아저씨한테 그렇게 돈이 많은 줄은 몰랐네요.”

“저도 몰랐습니다.”

“이렇게 큰돈을 그냥 턱하고 줬단 말이죠.”

“예. 그때에는 당황해서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했는데, 확실히 이상하네요.”

대한민국에서 5위권 대형길드에 소속돼 있던 헌터인 정호산에게도 10억은 그리 적은 돈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각범부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다고는 해도 공무원에 불과할 뿐인 박철완이 어떻게 10억이라는 큰돈을 이런 식으로 융통할 수 있는 걸까.

“예, 이상해요. 이렇게 큰돈을 쓰는 것도 그렇지만, 그 돈으로 정호산 씨를 영입한 게 특히 더요.”

돈이야, 여기저기서 뇌물을 받아 챙겼든, 다른 불법적인 방법으로 축적했든 어떻게든 알뜰살뜰 모았다고 치자. 근데 그렇게 개미처럼 열심히 모은 돈으로 기껏 한다는 일이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뒤를 캐는 일이라고?

“아저씨가 혼자였다면 몰라도, 언니를 두고 이런 위험한 도박을 할 리가…….”

그렇게 중얼거린 도채희가 깜짝 놀란 얼굴로 덧붙였다.

“혹시나 이게 다 함정이라면 어떡하죠?”

“이렇게 정성껏 사람을 꾀는 함정이라면 한 번쯤 잡혀 주는 것도 예의가 아닐까요?”

“전혀 아니거든요!”

도채희는 화를 냈다.

“지금 이 상태에서 만약 그쪽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사람들은 아무도 모를 거라고요. 왜냐! 정호산 씨는 이미 사고로 죽은 몸이잖아요. 당장 누군가에게 살해당해도, 아무도 모르고 그냥 넘어가겠죠. 그래요, 아무도 모를 거라고요. 아무도…….”

거기까지 생각한 도채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그걸 노리고 그쪽에서 이런 일을 저지른 건 아니겠지?

“숨 쉬어요.”

정호산의 말에 그제야 도채희는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색색, 밭은 숨을 내뱉는 도채희를 보며 정호산이 말했다.

“그래서 제가 여기에 온 겁니다.”

단순히 도채희의 기분을 낫게 하려고 온 게 아니다. 정호산에게도 도채희는 믿는 구석이었다.

만약 이 모든 게 함정이라면, 그래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누군가는 자신에 대해 알아줬으면 했으니까.

“그리고 챙겨 줬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챙겨 줬으면 하는 사람이요?”

“효창립이라고, 마지막에 저와 함께 출동했던 동료인데. 제가 그 친구의 트라우마를 돋운 것 같아서 말이에요.”

그 말에 도채희는 눈을 깜빡였다.

“아, 그 친구요!”

곧 장례식장에서 머리를 처박고 있던 그 친구가 생각났다.

“이미 만나셨습니까?”

“네. 그 정호산 씨 장례식장에서 만났어요. 다른 사람들이 자리를 모두 떴는데도 혼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더라고요.”

그 말에 정호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최근에 팀원을 모두 잃었던지라, 제가 눈앞에서 죽은 게 충격이 컸을 겁니다. 하필이면 그 사람하고 같이 가게 되어서…….”

원래대로라면 최준희와 함께 가야 했지만, 일이 꼬여 버렸다. 하필이면 얼마 전 동료들을 모두 잃은 효창립이었다니.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도채희는 정호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따로 잘 챙길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제가 아무래도 사정이 이래서, 직접 나설 수가 없으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저한테 남는 건 시간밖에 없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홍 변호사님을 돕는 건…….”

“재판 준비는 거의 다 끝났어요. 재판은 일주일 뒤에 있을 예정이고요. 시간이 나면 같이 가 줄 수 있냐고 묻고 싶었는데…….”

거기까지 말한 도채희가 멋쩍은 시선을 다른 쪽으로 던졌다.

“아무래도 어렵겠죠.”

“죽은 사람이 재판장에 나타날 수는 없으니까요.”

“예에. 그래도 제가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드릴게요. 그러니까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정호산은 도채희에게 따로 연락처를 주지 않았다. 도채희가 정호산에게 연락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몰랐는데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나쁘지는 않네요. 엄청 깜짝 놀라서 심장마비에 걸릴 뻔하긴 했지만…….”

정호산은 도채희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호산 또한 강이신을 봤을 때 도채희와 같은 기분이었으므로.

정호산의 얼굴을 바라보던 도채희가 막 생각난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그 사람한테는 말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도채희가 말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던 정호산은 곧 ‘아’하며 입을 열었다.

“당장은 그 녀석에게 연락할 방법도 없고…….”

정호산의 입가가 비틀렸다.

“글쎄, 그 녀석도 한 번 당해 보라죠.”

하나뿐인 친구가 제가 어쩔 수 없는 곳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 애라도 태워 보라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호산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말했다.

“……정말로 그 녀석이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으면 어떡하죠? 그래서 막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는 거예요. 자수를 한다거나…….”

“그러면 오히려 좋은 거 아니에요?”

도채희의 말에 정호산이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조, 좋은 거긴 한데. 그래도 지금 잡히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횡설수설하는 정호산을 바라보며 도채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한서현은 그 둘이 나눈 대화를 나에게 모두 전해 주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기껏 박철완의 입을 빌어서 도채희와 멀어지라는 메시지를 줬는데 말이죠.’

━둘 사이를 갈라놓고 싶었던 거냐?

‘아무래도 도채희는 위험하니까요.’

내가 음지로 숨긴 정호산과는 달리 양지에 드러나 있기도 하고 말이다. 도채희까지 숨길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아니, 이 일에 끌어들이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성공률이 떨어진다.

게다가 박철완을 잘 모르는 정호산과 달리 도채희는 박철완을 잘 알고 있었으니, 내가 그 앞에서 박철완인 척을 했다가는 바로 들켜 버릴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죽음을 가장해서 숨어 있으라고 말했는데, 이렇게 바로 도채희에게 달려가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죽은 척 사람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고 그랬지. 누구하고는 다르게 말이다.

레이의 말에 나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레이가 말한 그 ‘누구’가 나인 게 뻔해서.

정호산이 했다는 말을 들으니, 영 마음이 답답해졌다.

━아무래도 너 들으라고 한 소리 같지?

‘엄밀히 말하면 저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죠. 호산이는 거기에서 나눈 대화가 저에게 흘러 들어올 줄, 꿈에도 모르고 있으니까.’

━그래도 이건 너 들으라고 한 소리다.

‘예, 뭐, 그렇다고 치자고요.’

레이의 말대로 정호산의 말은 정확히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제가 한 짓이 옳은 짓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당사자 입에서 저런 소리를 들으니 새삼 아픈데요.’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지?

‘예.’

━앞으로도 정호산을 속일 거고.

레이의 말에 나는 눈을 굴렸다. 아니라고 말한다면 거짓말이 될 거다. 정호산이 한 말도 맞지, 맞는데…….

그래도 나는 너를 기만할 거다.

네가 안전하기만 하다면야, 나는 몇 번이고 그런 죄를 저지를 거다.

나는 굳게 맹세했다.

그때, 한서현의 말이 귀에 들어와 박혔다.

“그나저나 그쪽에 십억이나 줬어요?”

“으응?”

한서현은 말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아, 그게. 그, 뭐냐. 그래도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지갑이 비어 있으면 좀 그렇고…….”

━그래도 십억은 좀 너무했다.

“십억이나 줘요?!”

역시 레이와 한서현은 같은 편이 분명하다, 으응.

나는 그날도 무릎을 꿇은 채로 한서현에게 한참이나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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