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270화 (270/352)

제270화

#72 죽어야 산다 (3)

내 계획, 그러니까 정호산을 죽여야 한다는 내 말을 들은 한서현은 눈까지 반짝이며 이렇게 말했다.

“오, 그것도 나쁘지 않죠.”

그 말에 반응한 건, 내가 아니라 내 말에 경악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차송진이었다.

“그, 그것도 나쁘지 않다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사, 사람을 죽인다잖아!”

“보스도 죽여서 옆에 두는 게 완벽한 해결책이라는 걸 알게 된 거죠.”

“완벽한 해결책이라니…….”

“그야, 죽이면 언제나 함께 있을 수 있잖아요.”

“사람들은 보통 죽음을 이별이라고 생각하거든?”

차송진의 말에 한서현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보통은 아니죠. 그 이상이지.”

“칭찬 아니야!”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 보니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이대로 뒀다가는 대화가 아주 산으로 가겠다. 나는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다들 뭔 소리야. 내가 호산이를 진짜로 죽일 리가 없잖아.”

“죽여 둔다면서요.”

“사회적으로 잠깐. 지금 이대로면, 설록진의 좋은 표적이 될 뿐이잖아?”

내 말에 한서현이 입술을 삐죽였다.

“쳇.”

“왜 아쉬워하는 건데!”

반면 차송진은 눈에 띄게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그런 거지? 진짜 죽이는 건 아닌 거지? 나는 또…….”

한서현의 반응도 영 기분이 이상했지만, 이것도 다른 의미로 기분이 나쁜데…….

두 사람을 흘겨본 나는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었다.

“나도 웬만해서는 정호산에게 개입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 방법이 최선이야. 이미 죽은 사람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

“그냥 여기로 데리고 오면 안 되냐고 묻고 싶지만……. 네가 그러지 않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

다행히 차송진은 내게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한서현에게 내 이야기를 미리 들은 건지, 아니면 특유의 넓은 마음으로 내 사정을 이해해준 것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차송진의 이해가 고마울 뿐이었다.

“그래서 네 계획은 뭐야?”

차송진의 말에 나는 차분히 머릿속에 그려 두었던 그림을 멤버들의 앞에 꺼내 놓았다.

* * *

내가 제일 처음 한 일은 박철완을 납치하는 일이었다.

‘호산이에게 설록진이 나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이 일에서 물러나라고 한들, 내 말을 듣지 않을 겁니다.’

정호산 같은 답답한 녀석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럴싸한 목표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비밀 수사 같은 거.

나는 귀가 중이던 박철완을 그대로 납치해 한적한 곳의 창고로 끌고 왔다. 내게 납치된 박철완은 몸을 덜덜 떨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올 줄 알았다는 듯이 두 눈을 질끈 감은 박철완의 모습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설록진에게 찔릴 만한 일을 했나 본데요.’

나에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세뇌 능력이 아닌 거짓말로 상대방의 머릿속을 뒤집어 놓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는데, 박철완의 경우에는 이미 두려움에 젖어 있었으니 귀찮은 일을 덜어 낸 셈이었다.

나는 박철완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은 그를 두려워하지.”

“누구야, 너, 너는 도대체, 그, 그가 보낸 게 아니야?”

“지금은 그의 말을 따르고 있지만, 언젠가 그가 당신을 죽일 거라는 걸 당신도 알고 있잖아?”

가장 좋은 거짓말은 진실을 섞는 거였다. 박철완은 내 말에 금세 겁에 질렸다. 덕분에 박철완에게 몇 가지 암시를 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박철완의 머릿속에 심은 내 암시는 제법 완벽했지만, 그 암시대로 박철완이 완벽한 역할을 해 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이 정도로 강한 암시를 심은 건 오랜만의 일이거든요.’

━실패할 수도 있다는 거냐?

‘제대로 하긴 했는데, 혹시 모르죠.’

이번 생에서는 처음 해 보는 만큼, 긴장이 됐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멀리에서 박철완과 정호산의 만남을 지켜보았다.

박철완에게서 비밀 수사 제안을 받은 정호산은 당황했다.

“그러니까 저와 배후를 찾아보자고요?”

“그래. 이대로라면 나도 언젠가 그 사람에게 정리당할 테니까.”

박철완의 말에 정호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뜻이로군요.”

그제야 정호산은 박철완이 하는 이야기를 이해했다.

“너무 위험한 일이니까.”

“어째서 갑자기 그 사람 뒤를 쫓겠다고 생각한 겁니까?”

“말했잖아, 이대로 살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다고.”

이 모든 것이 어쩌면 자신과 도채희를 낚으려는 함정은 아닐까. 정호산의 의심은 타당했다.

‘그래도 아주 바보는 아니거든요.’

━지금 네 친구 녀석을 칭찬해야 할 때냐. 저러다가 네 친구가 박철완을 믿지 않게 되면 네 작전도 모두 꽝이 되는 거 아니냐.

나 또한 그 점이 걱정되었다. 침을 꿀꺽 삼킨 나는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나도 좋아서 그 사람의 명령을 듣고 있는 게 아니야. 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 내 목에 걸린 목줄을 벗고 싶다고.”

박철완의 그 말에는 제법 진심이 묻어나 있었다. 내가 심은 암시 때문이 아니다. 저건 본래 박철완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진심이다.

“왜 하필 접니까? 도채희 경위님이라면, 당신의 이런 부탁을 그 누구보다 기쁘게 받아들였을 텐데요.”

정호산의 말에 박철완은 내가 준비했던 대답을 꺼냈다.

“채희는, 그 아이는 내게 너무 소중해. 하지만 자네는……. 자네는 솔직히 내가 잃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패지.”

그 말에 정호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저따위 말로 정호산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레이는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나는 정호산을 안다.

“기대보다 훨씬 솔직한 대답이네요.”

처음에는 박철완을 의심하기만 하던 정호산도 그 솔직한 대답에 의심을 던져 버렸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제가 하겠습니다. 어차피 그 사람의 정체를 캐기 위해 각범부에 들어왔으니까요.”

━허어.

‘정호산에게는 바보 같을 정도로 자기희생적인 면이 있거든요. 자신에게 주어지는 상은 마다하면서도,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일이 생기면 그 누구보다 먼저 손을 들어 올린다고요.’

이번 일을 받아들이면서 도채희와 거리도 두었으면 하는 게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적어도 ‘박철완’은 그걸 바랄 테니까.

박철완과 정호산은 그렇게 동맹을 맺게 되었다. 새삼 뜨거운 악수 같은 건 없었지만, 오고 가는 시선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연락하지.”

박철완을 향해 신뢰가 가득한 눈빛을 보낸 정호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박철완은 절대로 오늘 일을 기억하지 못할 거다.

오늘 본부로 돌아가 정호산의 정보를 그 누구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숨겨 놓는 것으로 박철완의 역할은 끝난다. 박철완은 모두 잊어야 했다. 오늘 나눴던 대화도, 오늘 자신이 할 일도.

앞으로 박철완을 대신해 정호산에게 명령을 내리고, 정호산을 지원하는 건 내가 될 거다.

━앞으로도 쭉 거짓말을 하겠다고? 만약에 이 모든 게 네놈이 한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되면 네 친구는…….

‘호산이는 알지 못할 겁니다.’

내가 박철완이라고 정호산을 속일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여러 가지 이유로 앞으로는 직접 연락할 수 없다고 말해 두면 그만입니다. 문자 정도야, 저도 문제없이 보낼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금박사가 기껏 만들어 준 가면의 음성변조 기능을 쓰지 않는 것도 아깝지 않은가.

여차하면 박철완의 얼굴을 가면으로 흉내 낼 수도 있고 말이지. 혹시나 나를 알아볼 수도 있으니, 절대로 직접 만날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박철완은 이 일에 대해서 완벽하게 잊는 편이 좋았다. 그래야 설록진에게로 이 작전이 흘러 나갈 일이 없을 테니까.

‘제 작전은 완벽합니다.’

━수단이 문제가 아니지. 이대로 계속해서 그 녀석을 속이겠다고? 저 녀석에게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엄밀히 말해 전 정호산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제가 속인 건 박철완뿐인걸요.’

━너…….

나도 이게 선을 넘은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태까지 수많은 선을 넘지 않았는가. 내가 여태까지 한 짓에 비해 이 정도 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닐까.

‘말했잖습니까, 다시는 설록진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잃을 수 없다고.’

정호산은 이번 일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다. 나처럼 더러운 일에 손을 담글 필요도 없이, 어둠 속에서 좋은 일을 하다가 때가 되면 다시 빛나는 삶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때라는 건 설록진이 죽은 다음이겠지?

‘예.’

내 목표를 이룰 때까지 그 누구도 잃지 않을 수 있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할 거다.

‘박철완에게는 조금 미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것을 모두 던져 버린 그 남자를, 나는 설록진의 과녁에 박아 버렸으니. 이 일을 알게 된다면, 설록진은 박철완을 곱게 죽이지 않겠지.

하지만 아주 미안하지는 않았다. 박철완 또한 자신의 삶을,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말로 이런 짓을 수도 없이 해 왔으니까.

나는 박철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미안해. 딱 당신이 다른 이들에게 미안했던 만큼만.’

* * *

금박사는 기꺼이 정호산 사망 사건의 연출을 도와주었다.

“죽음을 꾸며 내겠다고?”

“예, 화려한 연출이 필요해요. 보는 사람 전부 죽음을 의심하지 않을 만큼.”

정호산은 이 모든 작전을 박철완이 준비한 줄 알겠지만, 사실은 나와 금박사의 협업이었다. 음, 금박사의 비중이 89퍼센트 정도 되는.

━그 애매한 수치는 뭐냐.

‘그래도 시나리오는 제 쪽에서 짰으니까요.’

준비물은 폐쇄된 건물, 건물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분진, 그리고 화염계 아티팩트.

배우는 정호산.

스토리는 ‘자신의 능력을 자만한 각범부 루키와 분진의 위험성을 몰랐던 화염계 각성자의 잘못된 만남’쯤 되려나.

감독을 맡은 나는 박철완의 목소리를 빌려 정호산에게 말했다. ‘2층에 준비해 둔 비밀 통로로 빠져나오라’고.

정호산이 비밀 통로에 진입하는 걸 확인하는 동시에 나는 신호를 보냈고 금박사가 준비한 아티팩트가 멋진 폭발을 만들어 냈다. 그곳에 남은 증거를 모두 태워 버리기에 충분할 만큼 폭발은 대단했다.

장례식장에서 빼돌린 무연고 시체는 정호산의 알리바이를 채워 주기에 충분할 거다.

나는 금박사를 통해 준비한 준비물을 모두 정호산에게 넘겼다.

추적을 당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휴대전화, CCTV를 무력화시키는 안면 인식 장애 기능이 붙은 야구 모자, 그리고 앞으로 활동할 때 사용할 신용 카드와 현금이 빵빵하게 들어 있는 통장 하나, 정호산이 앞으로 사용할 새로운 이름이 적힌 신분증 다섯 개.

정호산은 그 모든 걸 챙긴 채 내가 준비해 둔 안전 가옥으로 향했다. 모든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이 난 다음에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정호산의 사망 뉴스를 확인한, 차송진이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 설록진이 네 친구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할까?”

“아니, 바보도 아니고. 분명 내가 빼돌렸다고 생각할 거야.”

설록진이 내 얕은수에 속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정체를 들킨 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유일한 친구가 사망한다? 누가 봐도 자연스럽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설록진은 정호산을 쉽게 찾을 수 없을 거야. 내가 막을 테니까.”

이전에 정호산은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달라. 내가 그 녀석을 보호할 거다.

━네 친구는 바라지 않을 보호 말이지.

레이는 내 이번 선택에 실망한 듯, 툭하면 이렇게 태클을 걸어댔다. 나도 안다. 정호산이 이번 일을 안다면, 내게 실망할 거라는 걸. 그래서 난 들키지 않을 생각이다.

그 녀석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행복할 자격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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