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8화
#72 죽어야 산다 (1)
어차피 실드도 깨졌으니, 오래 버티지 못할 거다. 하지만 내 예상을 비웃듯이 다시 설록진의 근처에는 실드가 나타나 내가 던진 창을 막았다.
설록진의 입가에 피가 흘렀다.
아티팩트에 저장되어 있던 마나를 모두 사용한 뒤, 설록진의 마나까지 가져다 쓰기 시작한 거다.
저렇게 무한히 버틸 수는 없다. 조금만 더 두드리면, 설록진은 곧 무너질 거다. 하지만 시간은 나의 편이 아니었다.
세상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부서지고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나와 함께 차원의 먼지가 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 설록진이 미소를 지으며 눈을 노랗게 빛냈다.
“난…….”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유채린이 나에게로 달려들었다.
“젠장!”
갑작스럽게 달려든 유채린에게 받쳐 나는 뒤로 나뒹굴었다. 일반적인 여자의 힘이 아니었다. 마력을 폭주시키기라도 한 걸까. 유채린의 몸은 육체 강화계로 의심될 만큼 힘이 넘쳤다.
나는 마력을 끌어올려 설록진의 앞을 흙으로 가로막았지만, 내가 만든 흙벽은 금세 무형의 기운에 흩어져 버렸다.
“설마하니 내가 가진 아티팩트가 실드 하나만 있다고 믿은 건 아니지?”
설록진의 말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뒤늦게 날린 얼음 창은 설록진의 근처에 떨어졌다. 유채린 때문에 제대로 조준조차 되지 않았다.
“으으윽!”
유채린은 내 몸을 꽉 끌어안고 놔주지 않았다.
“당신……!”
나는 설록진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설록진에게는 닿지 않았다. 유채린과 뒤엉켜 바닥을 구르고 있는 나를 보며 설록진이 가볍게 말을 던졌다.
“그래도 내가 했던 말은 모두 진심이었으니까 잘 생각해 봐.”
유유히 게이트를 빠져나가며 설록진이 미소를 지었다.
“또 보자고, 이신아.”
그 귀에 익은 호칭에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설록진은 게이트 바깥으로 빠져나간 다음이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설록진을 놓쳐 버리다니.
“젠장.”
설록진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유채린의 몸은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축 늘어졌다. 나는 기절한 유채린을 끌어안고 게이트를 넘었다.
게이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노랗게 물들어 있는 걸 확인한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내게 달려드는 이들을 모두 정리한 뒤에는 이미 설록진이 떠난 뒤였다.
“빌어먹을.”
나는 또 한 번의 기회를 날렸다.
* * *
한서현을 기다리며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마력을 끌어다 쓴 내상을 치료하고 나에 대해 알아내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수족처럼 부리던 청 과장이 사라졌으니, 전보다 시간이 조금은 더 걸리겠지만…….
그래도 얼마 걸리지 않겠지. 이미 내 이름에, 내 출신까지 모두 들었으니까.
내 주변은 이미 깔끔하게 정리해 두었다.
문제는 정호산이다.
바벨의 수치, 그 뒤를 파다 보면 그 수치 하나를 곁에 끼고 살던 바보 같은 놈이 하나 나올 테니까. 바벨의 수치라고 불릴 정도로 형편없는 실력을 지녔던 내가 바벨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모두 정호산 덕분이었다.
과거로 돌아온 뒤 곧바로 연을 끊긴 했지만, 설록진이라면 나에 대해서 더 잘 알기 위해서라도 정호산을 노릴 거다.
“설록진은 제가 미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능력이 통하지 않는 건 무엇 때문인지, 어떻게 미래를 알게 되었는지, 저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싶어 하겠죠. 자신이 말한 대로 저에 대해서 ‘관심’이 생겼으니까요. 정호산은 저에 대한 정보를 털어 낼 아주 좋은 정보원이니 몸을 추스르는 대로 바로 접근할 겁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내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던 건 최악의 선택이 되었다.
설록진을 죽이기는커녕, 내 쪽의 정보만 유출해 버렸으니 말이다.
자기혐오가 치밀어 올랐다. 그냥, 입이나 꾹 닫고 그놈을 죽였어야지.
그렇게 쉬운 것도 왜 하지 못했냐. 이 멍청한 놈아. 나는 스스로를 욕하며 팔뚝을 쥐어뜯었다.
━그만해라. 그러다가 피가 나겠어.
붉게 물든 팔뚝을 본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또 설록진에게 놀아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머리가 차분하게 식은 뒤 생각하니 정말로 바보 같다는 말밖엔 나오지 않았다.
설록진을 죽이겠다고 몇 번이고 말한 주제에, 막상 설록진을 앞에 두니 바보처럼 얼음 창을 날려대기만 하고 아무것도 못 했다. 그놈의 말에 곧바로 넘어가서는, 줄줄 말이나 내뱉고…….
━내 목소리도 듣지 못하더구나.
“저한테 말을 걸었습니까?”
━그래, 몇 번이나.
들리지 않았다.
온몸의 신경이 설록진 한 명한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이상할 것도 없지. 너는 전생에서 그 녀석에게 종속된 상태나 다름없었으니까.
“영종도에서는 괜찮았는데요…….”
━그때에는 지금과 분위기가 달랐잖느냐. 게다가 그때는 잔뜩 흥분한 상태였고.
확실히 그때에는 몸에 아드레날린이 가득했다. 반면 지금은…….
“젠장, 그래도 저는 더 잘 해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어떻게든 설록진을 죽여야 했다고요.”
그랬다면, 앞으로의 일이 얼마나 편해졌을까. 설록진을 걱정하지 않고, 그저 우리만의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차라리 그곳에서 설록진과 공멸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마라. 어떻게든 살 생각을 해야지.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애들도 있는데!
“하하.”
레이의 말에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불이라도 지를 걸 그랬어요. 바보처럼 얼음 창만 날렸네요. 독을 써도 됐고, 방법은 많았을 텐데.”
뒤늦은 후회가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유채린을 지키려고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요, 솔직히 유채린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곳에 있다는 걸 아예 잊어버렸다고나 할까. 당장 레이의 말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설록진에게 온 신경이 쏠렸는데, 유채린이 떠올랐을 리가. 마지막에 내게 달려들었을 때야 유채린이 있다는 걸 깨달았을 정도였다.
중간에 설록진과 말을 나눌 때는 아주 잊고 있었지…….
━그놈이 헛소리로 네 녀석의 집중력을 다 빼먹긴 했지. 세상을 구하는 데에 협력하겠다, 하! 개소리지.
“개소리인 줄 알면서도, 순간 혹했습니다.”
설록진의 능력이라면 이 세상의 멸망을 누구보다 쉽게 막아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안다.
━그놈이 꿈꾸는 세상은 누군가에게는 아주 끔찍한 세상일 테니 말이다.
“저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설록진에게는 그 어떤 기대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걸요.”
나는 전생에 이미 수많은 교훈을 얻었다.
“아주 조금만, 설록진이 아주 조금만 더 나은 인간이었더라면 저는…….”
과거의 일이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내가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과 포기했던 삶, 그리고 설록진의 미소가 심장을 조여 왔다.
설록진이 내 심장에 새겨 넣었던 낙인은 이미 사라진 뒤임에도 그때 일만 생각하면 누군가 내 심장을 쥐고 있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나는 숨을 뱉어 냈다.
“자기혐오는 이만하렵니다.”
나는 머저리처럼 설록진을 놓쳤고, 설록진은 나에 대해서 전부 알게 되었다. 이건 모두 지나간 일이다.
이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이렇게 된 거 답은 하나죠.”
━뭔데?
“설록진이 정호산을 죽이기 전에 제가 먼저 죽여야 합니다.”
내 말에 레이가 소리를 빼액 질렀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
레이는 내 말에 기겁했지만, 내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아니, 아무리 계획이 있다고 해도 말이지. 아니, 친구랑 잘 말해서 해결을 할 생각을 해야지 대뜸 죽인다니. 너, 너 그런 사람이었니?
나는 레이의 말을 무시했다. 지금은 레이와 헛소리를 늘어놓을 정신이 없었으니까.
“박철완을 만나야겠습니다.”
━그 인간은 왜?
“가장 확실하게 호산이를 죽여줄 사람이라서요.”
내 말에 레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지 말래도…….
* * *
정호산은 자신에게 들어온 호출에 깜짝 놀랐다. 박철완, 도채희의 보호자이자 배신자. 도채희에게 전해 들은 박철완은 분명 정호산이 경계해야 하는 인물이었으니까.
가족을 모두 잃은 자신을 맡아 길러 주고 사랑해 주었던 사람이지만, 도채희는 박철완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나쁜 놈들과 결탁해 이제는 나쁜 짓을 기꺼이 저지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도채희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가득했다.
한때는 진심으로 믿고 따랐던 사람을, 이제 와 그렇게 말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왠지 그 기분을 알 것 같아, 정호산은 도채희의 축 처진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각범부에 들어온 뒤에도 정호산은 박철완과 마주한 적이 없었다.
정호산이 만난 ‘높은 사람’이라곤 송천길 팀장뿐이었다. 그리고 송천길 팀장은 정호산을 그야말로 개같이 굴려, 각범부 본부에는 거의 들어갈 일이 없게 만들었고.
그런 의미에서 본부,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층에 있는 박철완과는 아예 얼굴도 못 본 사이였다.
그 얼굴도 못 본 사이에, 대뜸 이런 메시지를 보내다니.
「나 각범부 박철완 부장일세. 좀 보지. 퇴근 후에 ◆◇공원 에이트 편의점 앞, 8시. 기밀 엄수.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혼자 올 것.」
제 휴대폰에 떠오른 메시지를 본 정호산은 눈을 가늘게 떴다. 기밀 엄수.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그곳에 혼자 오라니.
‘수상해, 너무 수상해…….’
이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정호산은 절대로 이 메시지에 응답하지 말라고 말했을 거다.
하지만 정호산은 달랐다. 정호산은 박철완의 말대로 퇴근 후에 편의점으로 향했다. 박철완 부장은 파라솔 아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낡은 정장에, 회색 헤링본 코트를 걸쳐 입은 박철완 부장의 앞에는 마른안주와 맥주 두 캔이 놓여 있었다.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쓴 정호산은 홀로 맥주캔을 홀짝이고 있는 박철완의 앞에 앉았다.
각범부의 부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소탈한 모습이었다. 얼마 전 도채희와 자신의 만남이 생각나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졌다.
박철완은 자신의 앞에 앉은 정호산에게 가만히 맥주캔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술은 안 해서.”
“거, 까탈스럽네.”
짧게 혀를 찬 박철완은 정호산에게 건넸던 맥주캔을 도로 자신의 앞으로 가져왔다. 그러더니 말없이 맥주만 두 모금 홀짝였다.
이 자리를 마련한 건 박철완이었지만, 마음이 달은 쪽은 정호산이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무슨 일로 여기에 오라고 하신 겁니까?”
“이야기를 하자면 좀 길어.”
오징어 다리를 주워 입에 넣은 박철완이 정호산의 얼굴을 살폈다. 마치 그의 속마음이라도 들여다보고 싶다는 듯 집요하게 정호산을 바라본 박철완이 말했다.
“하, 이거 참 이상하네. 나는 평생 이런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박철완의 말에 정호산은 초조해졌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런 말을 꺼내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좀 죽어 줘야겠다.”
그 말에 정호산은 눈을 깜빡였다.
“예?”
당황도 잠시, 곧이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 역시 이건 함정이었나? 정호산의 동공이 파랗게 물들기 시작하는 걸 바라본 박철완이 재빨리 외쳤다.
“아, 아니! 잠깐, 내 말 좀 들어봐라.”
그리고 박철완의 말을 들은 뒤 정호산은 어쩔 수 없이 납득했다.
정호산,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