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267화 (267/352)

제267화

#71 마주하다 (3)

설록진은 언제나 나를 ‘이신아’라고 불렀다. 설록진답지 않게 다정한 부름은, 언제나 내 귀에 달라붙어 나를 괴롭혔다. 몇 년 동안을 놈에게 그리 다정하게 불렸기 때문일까. 설록진의 입에서 나오는 ‘강이신 씨’라는 호칭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이신아’가 아닌 ‘강이신 씨.’

저건 나를 모르는, 내가 모르는 설록진이다. 얼굴만 똑같은 열화판에 불과하다고.

생각을 정리한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역시 내 능력은 통하지가 않네요. 그 가면에 뭔가가 있는 건가?”

노랗게 동공을 물들인 설록진이 내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멋대로 생각해라. 나는 설록진의 얼굴을 노려보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내 이름을 안 이상, 설록진은 이곳에서 죽어야만 했다. 나는 가장 익숙한 형태의 창을 꺼냈다.

공중에 떠오른 얼음 창을 보며 설록진이 입을 열었다.

“나를 죽일 셈입니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로울 수 있다니, 대단하네. 속으로 그렇게 비꼰 나는 그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고 얼음 창을 설록진에게 쏘아 보냈다. 얼음 창은 투명한 막에 튕겨 사라졌다. 설록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향해 말했다.

“겨우 정체를 들켰다는 것만으로 나를 죽이려 들기에 강이신 씨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조금 전 자신을 노리고 날카로운 얼음 창이 날아갔음에도 설록진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로운 그 얼굴이 아니꼬워 나는 설록진과 쓸데없는 말을 나누지 않겠다는 결심도 깨고 입을 열었다.

“이번 기회에 당신을 죽여 버리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왜요?”

설록진의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왜냐니?”

“강이신 씨가 저를 죽여 버릴 정도로 미워할 이유 같은 건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데요.”

놀라울 정도로 뻔뻔한 말이었다. 그렇게나 죄를 많이 지었으면서, 내가 자기를 노리는 게 이상하다고?

할 말을 잃은 내게 설록진이 이제 막 생각이 났다는 듯 산뜻하게 덧붙였다.

“아, 생각해 보니 제가 그쪽에게 살인 누명을 씌워 놓긴 했네요. 사과드립니다.”

그 같잖은 사과에 나는 코웃음을 쳤다. 설록진은 제게 날아드는 얼음 창을 또 한 번 튕겨 내며 말했다.

“이런, 제 사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모양이네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건 예의가 없는 일인데요.”

그러는 자신은 뭐 그리 예의가 있는 사람이라고. 나는 설록진의 말을 무시했다.

설록진은 수많은 아티팩트로 자신의 몸을 보호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 안으로 들어온 건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나도 아무런 생각 없이 이곳에 들어온 건 아니거든.

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공간에 얼음 창이 빼곡하게 떠올랐다. 무리한 마력 운용에 마나 회로가 죽겠다고 외쳐댔지만, 그뿐이다. 나에게는 마력을 충전할 수단이 있으니, 마력이 고갈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 잘난 아티팩트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내 말에 설록진이 굳은 얼굴로 답했다.

“어쩌면 조금은 방심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의 얼굴에서는 드디어 같잖은 여유가 사라졌다. 나는 얼음 창을 연달아 날렸다.

드디어 투명했던 실드가 금이 가는 게 보였다. 조금만 더 공격하면 어쩌면 저 실드를 깰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아까 제가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한 것 같은데요. 강이신 씨가 저를 왜 노리는지요.”

“끝까지 그 이유를 들어야겠다?”

“죽을 때 죽더라도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 정돈 알고 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는 자기는 그 누구에게도 정당한 죽음의 이유 따위 알려 주지 않았으면서, 그저 자신의 재미로 수없이 많은 이를 죽였으면서. 나는 반질반질한 설록진의 얼굴을 보며 소리쳤다.

“같잖은 존댓말 집어치워.”

“굳이 내게서 반말을 듣겠다고? 보통은 그 반대인데, 특이한 취향을 가졌네.”

설록진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얼음 창을 날렸다. 금이 가기 시작한 실드가 얼음 창을 또 한 번 튕겨 냈다.

“원한다면 맞춰 줄게. 그러니 너도 내 질문에 답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

짧게 말을 줄인 설록진이 내게 물었다.

“왜 나를 죽여야 하는지.”

이 정도면 집착에 가깝다. 나는 인상을 썼다. 가면 속의 내 얼굴이 설록진에게 보일 리도 없지만, 정말이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걸 꼭 들어야겠어?”

“그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그쪽이 나를 노릴 이유가 짚이지 않아서 말이야. 그래, 나는 나쁜 놈이지. 그렇다고 해도 수많은 나쁜 놈 중에 왜 하필 나였지?”

“한조희를 죽였잖아.”

“그래, 그래서 그쪽은 청 과장을 잡아 죽였고. 알아, 나도 너희의 복수는 아주 잘 봤거든. 하지만 정말 그것 때문이야? 겨우 사람 하나를 죽였다고 나를 노린 거라고? 나, 설록진을?”

설록진에게 놀아나서는 안 돼, 하지만 저 말에는 정말로 열이 받았다.

“겨우 사람 하나라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쪽은 이해해 줘야지. 그쪽도 나 못지않게 많이 죽였으면서, 안 그래?”

그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설록진의 말대로 나도 수많은 이를 죽였으니까. 과거에도, 지금도.

설록진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사람은 늘 죽어. 그보다는 조금 더 큰 그림을 봐야지. 정말로 그 녀석 하나 때문에 나를 죽이려고 든 거야?”

“당신 때문에 이 세상이 멸망할 테니까.”

내 대답에 설록진이 과장되게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성득 의원을 노렸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로 자경단이라도 되고 싶은 거야?”

그렇게 나를 비웃은 설록진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세상을 멸망시킬 거라니. 내가 왜? 나는 이 세상을 제법 좋아해. 내가 이 세상을 멸망시킬 리 없잖아.”

확실히 저번 멸망은 설록진의 예상에 없었던 일이다. 자신의 꿈을 앞두고 있었던 설록진으로서는 그 멸망이 오히려 지독히 원망스러웠을 거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 거다. 설록진이 살아 있다면, 설록진이 지금처럼 살아간다면.

말을 잃은 내게 설록진이 말을 던졌다.

“내가 이 나라를 좀먹고 있다는 데에는 동의할게. 확실히 건실한 정치인은 아니었지, 내가. 하지만 나 하나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설록진은 웃긴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내가 아니더라도 이 나라는 망할 거야, 내가 아니라면 다른 놈이, 내 자리를 차지할 테니까.”

“아니, 당신이 문제야. 당신 때문에 이 나라는 망하게 된다고.”

설록진이 아니었더라면, 대한민국이 그 정도로 허망하게 무너지진 않았을 거다. 그러니 설록진은 없어져야 했다.

내 말에 설록진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진심으로 내가 이 나라를 망하게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정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말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설록진이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긴, 그동안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불법 게이트 사건도, 봄날 보육원도, 김성득 의원도, 청 과장도. 어떻게 그 모든 일을 알 수 있었을까. 어떻게 내 미래에 대해 그렇게 확신할 수 있을까.”

설록진은 차근차근 내가 그동안 저질렀던 일을 읊었다.

“말이 안 되지, 미래라도 보고 온 게 아니라면.”

그 말에 나는 침착하려 노력했지만, 손끝이 떨리는 걸 막지는 못했다. 설록진은 내 반응에 눈을 접어 웃었다.

“정말 그래? 미래라도 보고 온 거야?”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나는 황급히 설록진의 말을 부정했지만, 그 누구보다 사람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는 설록진을 속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진실을 들켜도 상관없다. 어차피 죽이려고 했잖아. 설록진을 죽여 입을 막으면 그만이다. 진실을 들켰든, 아니든. 상관없다.

“함께 미래를 바꿔 보는 건 어때?”

설록진이 말했다.

“아까도 한 말이지만 난 이 세상이 망하길 원하지 않아.”

그렇게 말한 설록진이 가볍게 말을 덧붙였다.

“믿어, 내가 세상이 망하길 원했다면 이 세상은 진작 망했을 거야.”

나도 그건 안다. 설록진이 바라는 건, 이 세상에 자신이 군림하는 것이지 세상을 완전히 망하게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설록진이 왕으로 군림하는 세상도 충분히 나빴다. 하지만…….

멸망보다는 낫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쁘다. 나빠. 훨씬 나쁘다.

설록진이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에게도 나쁜 조건은 아니야. 여기에서 나를 죽이는 것보다, 나를 통해 얻을 게 더 많을 텐데.”

“나더러 당신을 믿으라고?”

설록진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저만 아는 설록진이 잘도 나와 협력하겠다.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하는 말이겠지. 이곳을 빠져나간 뒤에는 오늘 이곳에서 알아낸 정보로 나를 압박할 셈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도 아니고 저 말을 어떻게 믿느냔 말이다.

“진심인데.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진 않아. 당신에게 나름의 관심도 생겼고. 진심으로 당신에게 협력하고 싶다니까.”

“당신의 관심 같은 거, 사양이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절대 사양이다.

“안타깝게 됐네. 사양할 수 없어서.”

설록진은 내 말을 신경 쓰는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나쁘다. 이제는 제 능력이 통하지 않는 데다가 미래까지 알고 있는 사람으로 보였으니까.

“나를 믿을 수 없다면, 내 욕망을 믿어. 당신이 미래의 나를 봤다면 알겠지. 나보다 이 세계의 존속을 원하는 자는 없다고. 그걸 위해서라면, 그래, 내 욕심도 조금쯤은 접어줄 수 있다고.”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난 당신을 믿을 수 없어.”

“어째서?”

그야, 우리는 동등한 관계가 될 수 없으니까. 설록진에게는 아무런 약점도 없지만, 내게는 약점이 너무 많다. 설록진의 능력은 나를 휘어잡기에 딱이었고 이곳에서 나가는 순간 과거가 되풀이될 뿐이다.

왜 당신을 믿을 수 없냐고?

당신은 나를 조종하기 위해서 내게 소중한 사람을 이용할 테니까. 정호산, 한서현, 김재호, 차송진, 그 이름으로 된 목줄을 내게 걸어 버릴 테니까.

“당신은 여기에서 죽어야 해.”

내 말에 설록진이 말했다.

“아쉽게도, 협상 결렬이네.”

진작 말을 잘라야 했다. 왜 말을 나눈 거지, 결과는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나는 얼음 창을 날렸다.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실드가 깨져 나갔다. 처음으로 얼음 창이 실드를 부수고 설록진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얼음 창은 설록진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설록진의 목덜미에서 피가 튀었다. 설록진은 피가 묻은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이렇게까지 설록진을 몰아세운 건 처음이었다. 설록진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기어코 나를 죽여야겠어?”

팔찌에 마나석을 채워 넣은 나는 말없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아쉽게 됐네.”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 설록진이 내 발밑에 무언가를 던졌다. 황급히 마력을 끌어올린 나는 바닥에 던져진 걸 확인하고 눈을 찌푸렸다.

그건…… 게이트 유지 장치였다.

“하늘을 봐.”

설록진의 말에 나는 황급히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제야 부서지기 시작한 게이트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나는 설록진이 왜 계속해서 내게 말을 걸었는지 깨달았다. 게이트가 무너지길 기다린 거다.

아, 나는 설록진에게 바보처럼 놀아나고 말았다.

내 얼굴을 바라본 설록진이 말했다.

“이 거짓된 세상이 무너지기 전에 나를 죽일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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