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6화
#71 마주하다 (2)
곧바로 게이트로 향했지만, 이미 설록진과 유채린이 게이트에 들어간 지 시간이 꽤 흐른 상황이었다. 강이신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다. 게이트 근처에 닿자마자, 강이신은 독수리 등을 박차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재빠르게 독수리를 바닥에 착지시킨 한서현이 강이신을 향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조심해요, 그러다가 그놈 만나기도 전에 다리가 부러지겠어요.”
“바람을 다룰 수 있다는 거 알잖아.”
“그래도요.”
“한시가 바쁘잖아.”
한서현은 강이신을 향해 말을 던졌다.
“이미 그 안에서 볼 거 다 봤으면 어떡해요?”
“그러면 저 안에서 어떻게든 설록진을 처리해야겠지.”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지만, 강이신의 얼굴은 창백했다. 한서현은 강이신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겉으로는 평온하게 보여도 속은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다.
늘 설록진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주제에, 강이신은 설록진을 무척이나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특히 요즘에 더…….
‘도대체 그놈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지금에야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훔쳐볼 자신이 있는 한서현이었지만, 과거의 일은 알아낼 수 없었다. 따로 남주현에게 의뢰라도 넣어야 하는 건가. 그녀라고 해도 뾰족한 수가 없을 테지만.
가늘게 뜬 눈으로 강이신을 노려보던 한서현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왜 강이신이 설록진을 쫓게 되었는지, 과거에 두 사람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은 적이 없었다.
‘내 일은 전부 알고 있으면서…….’
지금 이 순간 못내 그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이제부터는 나 혼자 간다.”
게이트 근처에 내려선 강이신은 한서현과 일행을 복잡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혼자 여기까지 오겠다는 강이신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거기까지 걸어갈 생각이냐며 따라붙은 한서현을 비롯해 두 사람이 간다면 나도 빠질 수 없다고 따라붙은 김재호, 그리고 차송진까지. 기지에서 요양 중인 에드워드를 제외한 모두가 이곳에 있었다.
초조한 얼굴로 세 사람의 얼굴을 훑은 강이신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먼저 연락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오지 마.”
강이신의 말에 한서현은 못마땅한 얼굴로 답했다.
“알겠다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세 명 다 기지로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강이신의 말에 한서현이 정색했다.
“그건 절대로 싫어요.”
가뜩이나 강이신 혼자 저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죽겠는데, 기지에 가 있으라고?
그건 절대로 사양이었다.
한서현의 단호한 표정을 본 강이신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 미소도 마음에 들지 않아 한서현은 괜히 발끝으로 바닥만 쿡쿡 건드렸다. 강이신은 잔뜩 골이 난 한서현을 무시한 채로 옆에 선 차송진에게 말을 건넸다.
“송진이 형이 애들 잘 봐 줘.”
“으응!”
차송진은 강이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세 사람의 얼굴을 눈에 담은 강이신이 단호한 표정으로 게이트 쪽으로 향했다. 한서현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강이신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차송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다른 데로 갈까?”
“조금만 더 보다가요.”
한서현의 말에 차송진은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사정을 보고 있던 김재호가 슬쩍 입을 열었다.
“내가 따라가면 안 되는 거야?”
김재호의 말에 한서현이 짜증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여태까지 우리가 한 말을 뭘로 들은 거야. 걔 눈을 보는 순간 형도 그놈 편이 된다니까?”
한서현의 말에 김재호가 당당하게 외쳤다.
“내가 왜 그놈 편을 들어, 나는 보스 편인데.”
“걔 눈을 보면 넘어갈 수밖에 없다니까. 그게 걔 능력이라고!”
“나 그렇게 쉬운 남자 아니야.”
“그런 문제가 아니라니까.”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던진 한서현에게 김재호가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놈이 인형 두 개 사 준다고 해도 안 따라가.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 할 거야. 송진이가 가르쳐 준 대로.”
그 말에 차송진이 끼어들었다.
“저기, 송진이가 아니라 송진이 형이라고 불러야지.”
“형? 형이면 커야지.”
왜 이런 선입견이 박혀 버린 걸까. 한글을 가르칠 때 쓴 교재에 ‘형’이 키가 큰 녀석으로 그려졌기 때문일까. 자신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내젓는 김재호를 바라보며 차송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형이라고 꼭 다 클 필요는 없거든?”
“알겠어, 송진이 작은 형.”
“굳이 작은 형이라고 할 필요는 없잖아.”
“하지만 작은데…….”
“작다고 하지 말라고!”
두 사람이 그렇게 가볍게 말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한서현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강이신이 들어간 게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씩씩거리며 김재호와 말다툼을 벌이던 차송진은 뒤늦게 심각한 분위기를 깨닫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어쨌거나 여기에 계속 있을 수도 없잖아. 보스 말대로 저기에서 설록진이 나와서 우리를 세뇌라도 하면 큰일이고…….”
그 말에 한서현은 짜증이 잔뜩 난 얼굴로 손을 휘저었다. 공중에 나타난 검은 독수리에 올라타며 차송진이 말했다.
“근데 그 친구라는 사람 말이야, 정호산. 그 사람이 누구길래 보스가 이렇게까지 안절부절못하는 거야?”
그 질문에 한서현이 서늘한 얼굴로 답했다.
“높이 올라갈 테니까 단단히 잡아요.”
“아니, 그래도 대답은 해 줘야…….”
김재호가 올라타자마자 위로 급발진하는 검은 독수리에 차송진이 비명을 속으로 삼켰다.
‘왜 나한테 화풀이냐고오오오!’
* * *
게이트 안으로 넘어온 나는 깊은 한숨부터 내뱉었다.
━너무 긴장하지는 말고. 어차피 그놈의 능력은 세뇌밖에 없는 거 아니냐.
‘모르죠, 다른 능력을 감춰 두고 있을지도.’
━두 개의 재능을 가진 사람은 흔하지 않지. 그것도 패시브가 아닌, 액티브 쪽으로는 더더욱.
나만 해도 본래 두 개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는 불굴의 의지(S)라는 패시브였다. 도채희 또한 독수리의 눈이라는 패시브 스킬을 가지고 있었고.
본 재능에 도움이 되는 패시브를 가지는 경우는 아주 드물지 않았지만, 서로 다른 재능을 두 개 가지고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했기에 벨츠머츠 활동 초반 모두가 놀란 거였지. 물을 다루고 번개를 다뤘으니 말이다.
그런 만큼, 설록진에게도 다른 능력이 있을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그렇지만…….
‘설록진이 어떤 아티팩트를 지니고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는걸요.’
툭하면 내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털어놓길 즐겼던 설록진이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티팩트나, 자신의 약점을 밝히는 건 꺼렸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나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내가 자신을 향한 복수를 이미 포기했음을 알면서도, 의심 한줄기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던 거다.
━그렇다고 해도 전력으로 붙으면 네가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
내게는 설록진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우위에 설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아무리 잘난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데에도 한계는 있을 테니까.
하지만 왜일까.
그를 마주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침착해라.
‘예, 그러려고 노력 중입니다.’
게이트 안은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핏자국은 다 지워지지 못했지만, 사방에 널려 있던 시체들은 깔끔히 수습이 되어 있었다. 걸음을 옮기는 내게 레이가 속삭였다.
━그 녀석을 만나면 어쩔 생각이냐?
‘일단 뭘 알아냈는지 확인해야죠.’
다른 곳과 달리 이 게이트 안에서는 내 정체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도 넘쳐났다. 기껏 얼굴을 가린 의미가 없을 정도다.
‘유선제가 제 이름을 부르기까지 했으니까요.’
거기에 내 입으로 바벨의 수치라는 말까지 했지. 내 정체를 알아낼 증거는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만약 그 녀석이 너에 대해 알아냈다면?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설록진은 이곳에서 죽어야만 한다.
‘이곳에서 빠져나간다면, 설록진을 막을 방법이 없으니까요.’
설록진은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조종할 수 있었다.
━정신계 아티팩트는?
‘설록진의 재능이 몇 급인지 정확히 들은 적은 없지만, 최소 S급일 겁니다. 그런 재능을 완벽히 방어할 수 있는 정신계 아티팩트는 손에 꼽을 만큼 희귀하다고요. 제가 알고 있는 것들도 몇 년은 지난 후에야 게이트에서 조금씩 나올 정도고…….’
실제로 설록진의 능력에 저항한 사람을 나는 나 말고는 보지 못했다. 그 대단한 헌터들도 전부 설록진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으니. 내가 정신계 아티팩트를 구해 놓으려는 건, 저번 기만의 시련에서 있었던 일처럼 어이없이 정신계 기술에 당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간혹 잠재력 A급 이상의 재능을 각성한 사람 몇이 설록진의 세뇌를 저항한 적이 있기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저항도 수초에 불과했어요. 마력을 미리 끌어올린 채로 설록진의 세뇌에 대비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요.’
기습적으로 들어오는 세뇌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기껏 시간을 벌어도 그 자리에서 즉시 도망치지 않으면 또 세뇌에 걸려들 뿐이니.
‘설록진의 능력을 잘 모를 때는 저도 설록진의 능력이 그렇게 지독한 줄 몰랐죠.’
하지만 설록진의 곁에 있으며 나는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원한다면 설록진은 이 나라를 순식간에 망쳐 버릴 수 있어요. 수만, 수십만 명을 시선 한 번으로 죽여 버릴 수도 있죠.’
그러지 않는 건, 설록진이 쾌락주의자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자신의 능력으로 ‘소소하게’ 쌓아 가는 과정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놈이라서.
영종도에서는 힘이 모자라 설록진을 눈앞에서 놓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 없다.
하지만 숲에서 걸어 나온 설록진을 본 순간, 내 몸은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바짝 굳어 버렸다.
“어라, 이런.”
나를 발견한 설록진이 미소를 지었다.
“여기에서 이렇게 그쪽을 만날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몸이 떨렸다. 게이트 한복판에서, 적을 만난 셈인데도 설록진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다.
“설록진.”
나는 씹어뱉듯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자기소개할 시간인가요? 내 이름은 이미 그쪽이 잘 알고 있으니, 생략하도록 하죠. 그럼, 그쪽은?”
그렇게 능청스럽게 말을 꺼낸 설록진이 내게 눈짓했다. 자신의 이름을 불렀으니, 나도 내 이름을 알려 줘야 한다는 듯. 하지만 나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설록진을 노려보기만 했다.
“바벨의 수치. 당신은 자신을 그렇게 지칭했죠.”
그 말에 내 몸이 움찔 떨렸다. 저 멸칭이 설록진의 입에서 나왔다는 건, 이미 유채린을 통해 이곳에서 일어났다는 일을 그가 전부 다 봤다는 뜻이다.
“여기에 있는 채린 씨 덕분에 이곳에서 오간 대화는 모두 들었어요.”
그제야 내 눈에 설록진의 옆에 서 있는 유채린이 눈에 들어왔다. 유채린의 상태는 척 보기에도 좋지 않았다. 몸을 덜덜 떨고 있는 그녀는 아무런 표정도 없어 보이는 채로 눈물을 줄줄 흘려댔다.
세뇌가 걸려 있음에도 저 상태라는 건, 이곳에서 본 광경이 그녀의 정신에 심각한 해를 끼쳤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가면 뒤에 자신을 숨겨 봤자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강이신 씨.”
설록진의 입에서 들리는 내 이름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들켰다, 들켜 버렸다.
내가 누구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