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4화
#70 바라 마지않는 복수 (4)
밤 10시가 다 된 시간, 야구 모자를 뒤집어쓴 도채희는 편의점 앞에 있는 파라솔로 다가갔다. 그곳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일주일만이네요.”
짧은 인사를 던진 도채희는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를 끌고 와 정호산의 앞에 앉았다.
“잘 지내셨나요?”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한 지 일주일, 두 사람의 얼굴에는 피로가 녹아 있었다.
“요즘 바쁘시죠?”
“예, 아무래도.”
현장 출동에 나선 정호산은 그야말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오늘 밤에야 겨우 시간이 났다.
“그러는 경위님도 바쁘신 것 같은데…….”
“홍 변호사님이 저를 아주 잘 부려 먹고 계시거든요. 덕분에 요새 잠은 사무실에서 자고 있어요.”
“……그래도 되는 겁니까?”
“어차피 대기 상태인데요, 뭐.”
도채희는 정호산 앞에 놓인 소시지 하나를 들고 물었다.
“하나 먹어도 돼요?”
“예, 드세요.”
소시지를 우물거린 도채희가 물었다.
“그래서 그 사건 말이에요.”
“음, 일단 다 드시면 말할게요. 비위가 상할 수도 있는 얘기라.”
“괜찮아요, 나 비위 생각보다 세거든요.”
도채희의 말에 정호산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사건은 현재 송천길 팀장님이 수사하고 있어요. 저는 대기조라 사건 현장에 가지 못했지만, 대신 김용원 씨가 현장에 출동했죠.”
“용원 씨요?”
“예, 덕분에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미리내당은 철저히 언론에서 이번 사건을 묻었다. 대중에게 알려진 건 끔찍한 모습의 시체가 미리내당의 중앙당사 앞에 있었다는 것뿐이다. SNS에 사진이 퍼지는 일도 있었으나, 해당 사진은 순식간에 삭제되었다.
해당 사건에 대해 논하는 글들도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
이번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관계자가 아니고서야 들을 수 없었다.
“피해자의 사지는 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살점 하나 남지 않은 상태라고 했어요. 생전에 모두 절단된 흔적이 있었고, 흑마력으로 가공된 흔적이 보인다고 했어요.”
“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했죠? ‘잘못된 주인을 모신 죄’라고.”
그 메시지 때문에, 오늘 두 사람은 이곳에 모였다.
“한조희의 몸에는 ‘입을 잘못 놀린 죄’라고 적혀 있었죠.”
강이신을 범인으로 몰기 위해 한조희의 몸통에 새겨 놓았던 메시지가 그대로 떠오르는 말이었다.
“그 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호산의 질문에 도채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이 사건 지나칠 정도로 저번 사건들과 유사점이 많잖아요. 시체를 전시한 방식이나, 시체에 나타난 잔혹성은 김성득 의원 사건 때와 데칼코마니처럼 닮았고 시체에 남은 메시지는 한조희 사건을 떠올리게 하죠. 두 사건의 교집합은…….”
“벨츠머츠 뿐이죠.”
도채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부족한 만큼, 확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녀의 본능이 소리치고 있었다. 분명 이 사건에는 벨츠머츠가 연관되어 있을 거라고.
“이번 사건의 피해자가 누구인지가 중요하겠지만요.”
잘 알려진 김성득 의원과는 달리 이번 사건의 피해자는 유명인이 아니었다. 이 사건의 범인이 벨츠머츠라면, 그들은 어째서 이 사람을 고른 걸까. 도채희는 우물우물 소시지를 삼키며 말을 이었다.
“여태까지 벨츠머츠가 노린 사람들은 전부, 어느 정도는 ‘나쁜 놈’들이었잖아요.”
“이번 사건의 피해자는 통칭 청 과장이라고 불리던 사람으로 흥신소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답니다.”
소시지를 단숨에 씹어 삼킨 도채희가 흥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잠깐, 청 과장이라고요?”
“아는 사람입니까?”
“아니요, 아는 사이가 되고 싶긴 했지만…….”
“네?”
“얼마 전에 그 사람에 대해서 들었거든요. 청 과장을 파다 보면 제가 쫓는 배후를 알 수 있게 될 거라고 말이죠. 그래서 아는 정보원에게 청 과장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죠.”
도채희는 눈을 찌푸렸다. 자신이 N에게 청 과장에 대한 조사를 부탁한 지 며칠이 지나지도 않아서 청 과장이 살해당했다.
이 모든 게 우연일까.
‘N과 벨츠머츠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같은 시기에 김성득 의원을 노렸던 것, 그들이 실패하자 마치 응징이라도 하듯 벨츠머츠가 나섰던 것. 그때에는 모두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우연이 아니었다면?
하지만 그에 대한 증거는 아직 없다. N을 탈탈 털어서 확실한 말을 듣지 않는 한.
도채희는 자신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는 정호산을 향해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 조사 결과를 받기도 전에, 지금 살해당했다는 말을 들은 참이고요.”
“으음, 안타깝게 됐네요.”
“예, 그 사람이 제가 가진 유일한 실마리였거든요. 그래도 이번 사건으로 한 가지는 알겠네요. 그 흑막이요, 아무래도 미리내당의 국회의원일 가능성이 크지 않겠어요?”
안 그래도 각범부에 손을 댔다는 점 때문에 국회의원 쪽을 의심하고 있던 차였다. ‘잘못된 주인을 모신 죄’ 여기에서 말하는 잘못된 주인이, 도채희가 쫓고 있던 배후라면, 그 배후는 미리내당 소속의 국회의원일 가능성이 컸다.
“국회의원이 그 일들과 엮여 있다고요?”
“이상할 건 없잖아요. 당장 김성득 의원도 미리내당 소속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미리내당은 현 여당이지 않습니까?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라고요.”
생각보다 그 배후의 정체가 대단할지도 모른다. 고개를 숙인 도채희가 중얼거렸다.
“설마, 대통령이라거나?”
“하하, 그러면 저희는 진짜 망했는데요.”
도채희와 정호산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도채희는 정호산의 앞에 놓여 있던 캔으로 손을 뻗었다. 꿀꺽, 한 모금을 마신 도채희가 기겁하며 말했다.
“큽! 뭐예요, 이거. 맥주일 줄 알았더니.”
괴상한 맛에 얼굴이 구겨졌다.
“아, 제가 술은 안 해서…….”
“보리맛 콜라라니, 이거 범죄거든요?”
“예? 그것보다는 마시던 걸 뺏는 쪽이 더 범죄 아닙니까?”
정호산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도채희를 바라보았다. 도채희는 멋쩍음에 헛기침을 토해 냈다.
“큽, 어쨌거나 비관적인 생각은 그만두고, 일단은 차분히 생각해 보자고요.”
“비관적인 생각을 그만두자고는 말해도, 어떤 생각을 해야 할지…….”
“그 청 과장이 살해당한 이유요. 그 배후의 일을 대신해 줬기 때문이겠네요.”
“예……, 아마도요. 흥신소를 운영해 왔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아직 걸리는 게 있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벨츠머츠가 이런 식으로 청 과장을 잔인하게 살해했을까.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때,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청 과장의 몸에서 흑마력이 검출됐다고 했죠?”
도채희의 말에 정호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력……, 이번 일에 한서현이 관여했다는 뜻이에요.”
“예? 하지만 한서현은 아직 어린애 아닙니까?”
“열여덟이면, 아주 어리다고 하기도 그렇죠.”
당장 홍난희 변호사와 도채희가 변호를 맡은 김현기의 나이는 열여섯밖에 안 됐으니까. 게다가 한서현의 경우에는 열일곱부터 벨츠머츠에 합류한 상태였다. 오히려 지금에서야 현장에서 흑마력이 발견됐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아직 법적인 성인이 안 됐잖아요.”
“그런 걸 신경 쓰는 타입이에요?”
“예.”
고개를 끄덕인 정호산이 도채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희야 운이 좋았지만, 보육원에 있던 다른 아이들은 운이 좋지 않았어요. 각성자의 경우에는 열여섯, 각성자가 아닌 경우에도 열여덟이면 사회에 나가야 했죠.”
법적으로는 성인이 아니나, 더는 보육원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애매한 나이.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신이는 어린애들을 사회로 쫓아낸다고 화를 내곤 했죠. 자기랑은 하나도 친하지 않았던 아이들의 소식에도 진심으로 화를 낼 줄 아는 녀석이었어요.”
그랬던 녀석이, 그 어린애를 이런 일에 끌어들였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정호산의 말에 도채희가 답했다.
“정호산 씨가 알고 있던 사람이 누구든, 벨츠머츠가 된 이상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보는 게 맞아요.”
정호산의 얼굴을 살핀 도채희가 말을 이었다.
“벨츠머츠가 아무리 좋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방법은 그렇지가 못하니까요.”
이번 사건만 해도 그렇다. 시체의 상태는 참혹했다. 그가 어떤 나쁜 짓을 저질렀는지는 몰라도, 이런 고문을 용납할 수는 없다.
“그 사람이 한조희를 죽인 범인이라면요?”
정호산의 말에 도채희가 눈을 깜빡거렸다.
“예?”
“김성득 의원과 이번 사건은 달라요. 저번처럼 이번 사건이 그저 응징이라면, 한서현이 개입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하지만 벨츠머츠는 굳이 한서현의 능력을 빌어 피해자를 고문하고, 전시했죠. 왜요?”
단순히 잔인하게 사람을 고문하는 거라면, 굳이 한서현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벨츠머츠는 굳이 한서현을 이번 일에 끌어들였다. 강이신은 그걸 용납했고.
왜? 어째서?
“청 과장이 한조희의 죽음에 연관이 있다면 말이 되죠. 이게 한서현을 위한 복수라면…….”
“복수다?”
“어쩌면요.”
정호산의 말에 도채희는 눈을 찌푸렸다. 잠시 생각을 마친 도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럴 수 있겠네요.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요. 벨츠머츠는 이번 일에 겨우 열여덟밖에 안 되는 한서현을 끌어들였고, 한 사람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살해한 뒤 시체를 전시하기까지 했어요.”
“물론 그렇지만…….”
“정호산 씨가 강이신, 그 사람을 어떻게든 좋게 생각하려는 거 저도 알아요. 하지만 머리는 차갑게 유지해야죠.”
복수든, 뭐든 강이신이, 벨츠머츠가 저지른 건 끔찍한 범죄였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저희는 이번 일을 옹호해서는 안 돼요.”
적어도 그 두 사람만큼은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자신들이 상대하는 악과 똑같아질 뿐이었으니까.
“옹호하려고 한 게 아니라…….”
“하나뿐인 형을 잃은 것에 대한 복수다. 게다가 한조희 또한 끔찍하게 죽지 않았나. 어쩌면 나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잖아요.”
제 속을 뻔히 읽은 것 같은 도채희의 말에 정호산은 멋쩍게 웃었다.
“그냥, 저도 이신이를 그런 식으로 잃었다면, 어쩌면 이런 짓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는데요…….”
“그래도 정호산 씨는 안 할 거잖아요.”
도채희의 믿음은 기꺼웠으나, 정호산은 곧바로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만약 강이신이 한조희처럼 고문을 당한 뒤, 시체가 되어 자신에게 돌아왔다면 자신은 복수를 꿈꾸지 않았을까.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경위님께서는 어떻습니까? 가족을 죽인 범인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말에 도채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제 경우에는 가정이 아니네요. 전 만났거든요, 제 가족을 죽인 개자식을.”
도채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일이 아직도 선명하게 생각났다.
“다행히 그때 저와 그놈 사이에는 철창이 있었어요. 그래서 전 아무것도 하지 못했죠. 그때는 그 철창이 원망스러웠지만, 바깥으로 나오니 고맙더라고요. 거기에서 내가 날뛰었다면, 나 또한 살인마가 되어 그곳에 갇히게 되었을 테니까.”
정호산을 바라본 도채희가 말했다.
“저는 그때 결심했어요. 다시는 나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하겠다고. 범죄자들을 전부 감옥에 처넣겠다고.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복수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그게 도채희가 믿고 있는 한 가지였다.
“그래서 경찰이 되신 거고요?”
“네.”
고개를 끄덕인 도채희가 말을 이었다.
“복수를 하는 사람들의 입장도 이해는 가요, 하지만 그 선택을 응원하거나 옳다고 말하진 않을 거예요. 이번 일도 그렇죠. 의도야 어쨌든, 결과는 최악이잖아요.”
솔직히 현명한 복수라는 말은 절대로 나오지 않았다. 정말로 복수를 하고 싶었던 거라도, 굳이 이렇게 해야만 했을까.
“이번 일로 벨츠머츠는 대한민국의 최대 정당을 모두 적으로 돌렸으니까요.”
도채희의 말에 정호산이 말했다.
“그게 목적이었다면요?”
“예?”
“어쩌면 벨츠머츠는 그 배후를 향해 선전포고하고 싶었을지도 모르죠.”
우리는 네가 두르고 있는 권력의 후광도 두렵지 않다고 말이다.